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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08화 (1,108/1,277)

##  1108화

아무리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본 피아니스트라고 하더라도 콩쿠르와 관련된 곳에선 위축되기 마련이다.

하물며 긴 역사와 거기에 걸맞은 엄격함이 살아 숨 쉬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같은 곳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연주는 그저 밉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비단 심사 위원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의 직원이나 관계자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연주의 소심한 성격에 대해 들었던 양지은은 대체 뭐 그런 걸 다 신경 쓰느냐며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사소한 시비가 붙어서 누군가가 이연주를 싫어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그것을 깔끔하게 무시할 수 없었다.

‘저 연주자 좀 무례하던데, 실수 안 하려나?’ 같은 귀여운 수준의 악감정도 받고 싶지 않았다.

최고의 상태로 올라도 불안한 무대에선 아주 약간의 잡념도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연주는 문제가 될 만한 상황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달랐다.

‘사실 우리가 말했어야 할 일인데…….’

아나스타샤는 열일곱 살밖에 안 되는 나이임에도 이 타국의 어색한 홀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고 정당하게 요구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연주나 김진우가 그저 협조적으로 굴 생각으로 5분 리허설 동안 뭘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아나스타샤는 이곳에서 체크하고 가야 할 것들을 꼼꼼하게 짚고 있었던 것이다.

몇 살 많은 피아니스트인 입장에서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아나스타샤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녀에겐 두 번이나 도움을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다음엔 갚아 주리라 생각하며 이연주는 계단을 올랐다.

{이곳입니다.}

세 명의 피아니스트를 이끌며 앞장 선 마르텐은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쓰인 문을 세 번 노크하고는 열었다.

컨트롤 룸 안엔 직원으로 보이는 몇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모두들 문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중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의아해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참가자분들이 영상이 어떻게 나가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하셔서 말입니다.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가브리엘.}

가브리엘이라고 불린 남자의 눈에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감정은 귀찮음이었다.

그는 연주자들이 자신의 일터까지 올라와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 건 예전 것 찾아보시면 되는데. 인터넷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 말대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10년도 전부터 인터넷으로 대회 영상을 송출한 역사가 있었고, 그 기록들은 지금도 남아 있었다.

참고할 자료는 넘치도록 많았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물러서지 않았다.

{4년 전이잖아요?}

아나스타샤의 목소리엔 살짝 고집이 담겨 있었다.

귀찮아하는 가브리엘의 태도가 한층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만약 카메라 구도 등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더라도 조정은 불가능합니다.}

삼각대로 세워져 있는 카메라도 아니고, 홀에 설치된 카메라는 쉽게 움직이거나 할 수 없다.

문제가 있다면 가능하겠지만 참가자 한 명이 불만을 표시한다고 해서 바뀌는 구조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서 리허설이나 하고 가라는 의미였다. 아나스타샤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고도 고개를 저었다.

{그렇겠죠.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어요.}

{그럼 왜……? 어차피 바꿀 수 없는 조건이라는 걸 이해하셨다면 굳이 와서 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괜히 신경 쓰이게 되어도 저희는 책임 못 집니다.}

귀찮음은 이제 책임 회피로 향했다.

그러나 가브리엘의 말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카메라 세팅은 바꿀 수 없고, 불만이 생겨도 해결하지 못하고 무대에 오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세상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불만이 있으면 자연히 자신감이 떨어지고 연주에도 문제가 생긴다.

가브리엘의 말대로 차라리 신경 쓰지 않는 편이 낫다.

이연주도 아나스타샤가 걱정되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옆열굴을 보고는 숨을 삼켰다.

아나스타샤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괜히 신경 쓰이는 부분은 이미 많아서요.}

{예?}

{그리고 바꿀 수 없다고 해서 안 본다고 쳐요. 그런다 한들 이미 머리에 박힌 생각이 사라지나요?}

카메라 세팅을 확인하겠다는 생각이 든 시점에서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확인을 하고 마음에 든다면 상관없겠지만, 아예 확인도 안 하고 외면한 채로 무대에 오른다면 결국 그 게으름이 연주 한복판에서 가시를 드러낼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럴 바엔 그냥 제가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지 확인하고 마음을 내려놓는 게 낫죠.}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옆머리를 툭툭 치더니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연주는 그녀의 말에 굉장히 공감할 수 있었다. 문제는 책임자로 보이는 가브리엘이 어떻게 생각하냐인데, 다행히 그의 표정도 조금 변해 있었다.

{일리 있군요.}

씩 웃으며 아나스타샤의 이유를 받아들인 그가 일어나 악수를 청하며 물었다.

{성함이?}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입니다.}

{전 스튜디오4의 영상 엔지니어 가브리엘 레조트입니다.}

이어 이연주와 김진우도 가브리엘과 인사를 마쳤지만, 그의 관심은 아나스타샤에게만 향해 있었다.

그는 아나스타샤를 그저 이 스튜디오4를 앞서 지나친 많은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과거에도 이곳에 올라오는 참가자들이 종종 있었죠. 하지만 대부분은 불안에 쫓기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빈틈없는 모습을 가장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 홀에 처음 들어서서 무대를 둘러싼 수많은 카메라를 보고 있으면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든다.

전 세계로 송출되고 앞으로도 영원히 기록될 영상에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가브리엘은 그런 당연함을 마주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는 아나스타샤만이 달랐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이즈마일로바 씨는 자신을 인정하고 있군요.}

아나스타샤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방금 한 말 잊으셨나요? 어떻게 보일지 불안해하는 건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그걸 인정하고 계시잖습니까.}

{…….}

{인정하고 받아들인 불안을 곧 행동력으로 바꾸어선 이렇게 직접 올라오기까지 하셨고요.}

그제야 이연주는 가브리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이곳에 앉아 수많은 연주자를 봐 왔을 그는 연주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유심히 지켜본 관찰자였다.

스스로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강해지려고 해 봐야 한계가 있다. 그것이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이었다.

가브리엘은 피식 웃으며 말을 맺었다.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닙니다.}

확실히 아나스타샤의 행동은 당당하고 멋졌다. 그러니 칭찬받을 만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거기에 가볍게 대응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 태도는 약간 의아했다.

겨우 가브리엘이 협조해 줄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아나스타샤는 기뻐하기보다는 자기 생각에 잠겨 버렸다.

옆에서 살짝 당황한 이연주가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고 있자 가브리엘이 먼저 나서 주었다.

{아무튼 저희 영상이 궁금하다고 하시니 보여 드려야겠죠.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의 손짓에 따라 몇 걸음 더 다가가니 컨트롤 룸의 시스템이 조금 더 자세히 보였다.

책상 위에 놓인 장치들에선 불빛이 번쩍이고 그 위엔 모니터와 노트북들이 놓여 있었다. 밝게 빛나는 화면만 열 개는 되었다.

이 모두가 이 스튜디오4의 모든 환경을 컨트롤하기 위한 장비들이었다.

유리창 너머로는 무대의 전경이 보인다.

이연주는 몇 번이나 콩쿠르에 참가했음에도 이런 곳에서 무대를 보는 건 생소한 일이라 신기해했다.

{자, 이쪽이 스튜디오 왼쪽에서 비추는 카메라 그리고 이게 정면…….}

가브리엘은 노트북을 조작하더니 카메라가 찍고 있는 화면을 띄우며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딱히 전문적인 용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해하긴 쉬웠지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피아노만 여러 각도에서 봐선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바가 모호했다.

이연주와 김진우가 멍하니 모니터 화면만 보고 있자 가브리엘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연주자가 없으니 이렇게만 봐선 실감이 안 나는군요. 음, 한 분이 지금 바로 리허설하시겠습니까?}

그 순간 세 명이 서로 눈치를 봤다.

‘내가 나가야 하나……?’

이연주는 마음속으로 깊이 고민했다.

카메라를 확인하자고 먼저 제안한 건 아나스타샤니까 그녀를 무대로 보낼 순 없다.

그렇다고 해서 김진우를 보내자니 반바지 차림인 그가 모니터에 비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남은 건 자신뿐이었다.

이연주도 첫 번째로 나서긴 싫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아나스타샤에게 도움이 되려는 마음으로 손을 들려고 할 때였다.

마르텐이 슬쩍 끼어들더니 제안했다.

{그러지 말고 가브리엘, 전에 녹화해 놨던 것을 보여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샘플로 완벽한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렇긴 하죠.}

가브리엘은 다시 노트북 화면에 다른 창을 몇 개 띄웠다. 각도는 같았지만 이번엔 빈 피아노가 아니라 피아니스트가 앉아 있었다.

그 영상을 보자마자 이연주는 깜짝 놀라며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타티아나잖아!? 그렇지?}

{그렇네요…….}

아나스타샤도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그녀도 갑자기 친한 친구의 리허설을 보게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영상에 찍힌 타티아나는 저번에 봤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나저나 정말 이걸 봐도 되는 걸까?

물론 지금 세 명이 공동 리허설을 할 예정이기도 하니까 다른 참가자의 리허설을 본다고 해서 문제가 되진 않지만……

만약 타티아나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불쾌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 따위는 피아니스트로서의 호기심이 단번에 눌러 버렸다.

타티아나는 과연 먼저 이곳에 와서 5분간 어떤 연주를 했을까.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확인하고 싶었다.

무언의 합의가 오가고, 가브리엘은 영상을 재생시켰다.

영상 프로그램들은 모두 연동되어 있는지 가브리엘이 키 하나만 눌렀는데도 여러 영상이 한꺼번에 재생되었다.

다양한 각도에서 찍힌 여러 타티아나가 동시에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가 건반을 눌렀다.

‘이게 뭐지?’

이연주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건반을 확인하는 것이라면 익숙한 곡을 하나쯤 연주해 보면 될 일이고, 스케일이나 아르페지오 연습을 해 봐도 된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고개를 똑바로 든 채 손가락 하나만 사용해서 건반을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테크닉 좋기로 유명한 타티아나의 리허설을 볼 생각에 기대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기대에서 빗나간 영상이었다.

{피아노가 이상한가……?}

차마 타티아나가 이상하다고 하진 못하고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아나스타샤가 대답해 주었다.

{저 애는 정말 진심으로 리허설에 임하고 있어요.}

{응?}

{저게 저 애의 평소 연습 방식이에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의 표정은 굉장히 진지했다.

잠시 후, 무언가 변하기 시작했다.

「……어?」

명확하게 콕 집어 말하긴 어려웠다. 아무래도 스피커로 들려오는 소리는 현장에서 듣는 것과는 다르니까.

하지만 곧 소리가 조금 더 깊어졌고, 홀 전체에서 울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이 음향 설정을 건든 것이 아니라면 이건 타티아나가 피아노로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말이었다.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이연주는 김진우에게 물었다.

「진우야…… 지금 이거, 아까랑 다르지?」

「…….」

그러나 그 질문에 김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리허설 영상을 보고 있었다.

까불거리며 농담하기 좋아하던 김진우가 피아니스트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것에 기뻐해야 하나 생각하던 이연주는 지금 타티아나가 단지 건반을 몇 번 누른 것만으로 이런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걸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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