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9화
가브리엘은 스튜디오4의 영상 엔지니어로서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 왔다.
그동안 그는 많은 연주자를 봐 왔고, 그중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연주자들도 있었다.
때문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영상 송출을 맡은 지금도 사실 가브리엘은 그리 큰 감흥이 없었다.
그저 매년 하는 국가적 행사이니 절대 실수가 나오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이 나이 많은 베테랑 엔지니어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콩쿠르 참가자들도 나오기 마련이었다.
‘베르체노바라…….’
그녀는 특별했다.
한 번에 보고 알 수 있었다. 실력을 보기도 전에 가브리엘은 그녀가 무대에 오르는 것을 보자마자 바로 스타성이 있음을 알아차렸고, 그건 곧바로 증명되었다.
타티아나는 5분 만에 홀 안의 모든 인원을 자신의 팬으로 만들어 버렸다.
연주가 끝난 뒤, 컨트롤 룸 안의 직원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을 정도였다.
모두들 이번 리허설 영상이 엄청난 가치를 가지게 될 것이라며 데이터 백업부터 만들어 놓자고 아우성이었다.
그 정도로 타티아나가 보여 준 능력은 압도적이었다.
‘같은 참가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려나.’
많은 연주자를 봐 온 직원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들의 반응 역시 같을지 궁금해졌다. 음악계 관계자로서의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그러나 어른으로서는 이걸 보여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콩쿠르가 시작되기도 전인데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더라도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약간의 걱정은 이 공간에서 아무 의미도 없었다.
‘결국은 서로의 호기심이 맞물린 건가.’
모니터에 타티아나의 영상을 띄우자마자 피아니스트 세 명의 표정이 바뀌었다. 호기심과 욕망이 뒤섞인 분위기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 와중에 그만두고 영상을 꺼 버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황은 주어졌다. 세 명의 피아니스트는 카메라 세팅을 확인하겠다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고, 공동 리허설을 하겠다는 대담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서로의 바람이 완벽하게 합치했으니 그만둘 이유도 없었다.
‘몇 번을 봐도 대단하단 말이지.’
가브리엘이 영상을 재생시켰다.
정지된 시간 속에 있던 타티아나가 다시 부활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서서히 이곳을 지배해 나갔다.
피아니스트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역시.’
타티아나와 친한 것으로 보이는 아나스타샤는 곧바로 이 리허설이 장난이 아니란 것을 알아차렸고, 이어 두 명의 반응도 진지해졌다.
열화된 스피커 소리로도 여실하게 느껴질 정도로 타티아나의 존재감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타티아나가 피아노의 소리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휘어잡았다고 느껴진 순간, 그녀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클로드 드뷔시의 프렐류드 북2. 12번째 곡.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처럼 화려함이 돋보이는 곡이었다.
음악적으로 훌륭한 곡을 연주하면서도 타티아나는 이 곡으로 피아노와 홀까지 살폈다.
여러 테크닉을 뒤섞어 마구 흩뿌리면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점검하고 있었다.
‘저 정도로 철저할 수 있는 건가.’
단순히 피아노를 빠르고 정확하게 치는 실력만을 놓고 대단함을 평가할 수 있진 않았다. 다른 참가자들의 실력 역시 뛰어났기 때문이다.
가브리엘은 다른 참가자들의 리허설도 봤다. 이곳에 모인 참가자들은 전 세계에서 유망주로 평가받는 젊은 피아니스트들이다.
당연히 실력은 모두 최상급이고, 클래식 피아노 전문가가 아닌 가브리엘은 미세한 실력 차를 구분할 수 없었다.
그저 누가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진정 대단한 점은 바로 태도에 있었다.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무대에 올라선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바랐던 것을 이룬다. 아주 간단한 일 같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굉장한 힘을 지니고 사람을 홀린다. 문제는 그 영향력이 음악가 본인에게도 향한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많은 음악가가 무대에서 거꾸로 음악에게 삼켜져 휘둘리기도 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모든 것을 자신의 제어 아래에 두고 있었다.
5분 남짓한 시간만 봤을 뿐이지만, 가브리엘은 그 5분이 50분이 되더라도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과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어떤 종류의 교육을 받았기에 저렇게 강할 수 있는 건지 놀라울 정도였다.
때문에 가브리엘은 다른 피아니스트들에게도 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까지입니다.}
연주가 끝나고, 타티아나가 대기실로 들어가 인사하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모습까지 보여 줄 필요는 없어서 가브리엘은 영상을 정지시켰다.
{어떻습니까?}
가브리엘은 굳이 감상을 물었다.
원래대로라면 영상 엔지니어인 그가 해야 할 물음의 초점은 무대를 바라보는 카메라들의 세팅 등에 가 있어야 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타티아나라는 피아니스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다.
팔짱을 끼고 서 있던 김진우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그 말에 이연주는 눈을 흘겼다.
{당연하지. 저 애 음반을 들어 봤을 거 아니야.}
{아니? 들어 본 적 없는데. 오늘 이렇게 볼 때까진 그냥 이름 정도만 알고 있었어.}
{그럴 리가?}
{진짜야. 구할 수도 없었는데, 뭘.}
김진우는 양손을 펼쳐 보이며 별수 없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 말대로였다. 타티아나의 음반은 엄청난 물량으로 전 세계에 풀렸지만, 그럼에도 품절되어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팔려 나갔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성공이었다.
하지만 음반을 사지 못했다고 해서 아예 들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이연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다시 잘 생각해 봐. 분명 누가 빌려주거나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들려줬을 거야. 올해 초에 그렇게 난리가 났었는데 안 들어 봤다는 건 말이 안 돼.}
{수록곡이 뭐였는데?}
{베토벤 소나타 24번이랑 슈만 교향적 연습곡,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1번.}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그걸 듣고도 기억이 안 나진 않을 것 같은데……. 글쎄, 모르겠네.}
김진우는 진지하게 조금 더 생각해 보더니 곧 팔짱을 풀었다. 지금 타티아나의 음반을 들어 봤느냐에 대한 사실 유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모니터를 내려다보더니 곧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괴물이네. 진짜로.}
짧고 강렬한 평가였다. 조금 과하긴 했지만 가브리엘은 거기에 동조했다.
피아니스트 타티아나는 확실히 일반적인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단지 나이에 비해 조금 더 잘 치는 수준이 아니라 이미 완성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독자적인 예술성을 오롯이 지니고 있는 듯했다.
그 무엇도 침해할 수 없고 비교할 필요도 없는 높은 수준의 실력이었다.
괴물이라는 평은 초인적이란 말을 조금 더 강하게 한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타티아나의 친구인 이연주는 그 단어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지 눈을 부라리며 힐난했다.
{여자애한테 괴물이라니? 말 좀 가려 가면서 해.}
{지금 여자애가 어디 있는데?}
김진우는 태연하게 이연주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그는 다시 모니터를 힐끔 바라보았다. 거기엔 연주를 마친 타티아나가 막 손을 거두고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김진우의 눈에 드러난 감정은 오로지 피아니스트로서의 흥미뿐이었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선 아예 타티아나의 프로필을 다시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미 타티아나의 정보는 인터넷에 많이 올라와 있으므로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그리고 타티아나가 겨우 몇 년 만에 이룬 것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파악하는 데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런 애가 왜 이제야 튀어나온 거야……. 아, 이제 열일곱 살이었지…….}
{맞아.}
{나올 때가 되었으니 나온 거네.}
지금까진 연령 제한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제약에 걸려 다른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이제 타티아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여기엔 열일곱 살의 신예가 한 명 더 있다.
김진우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김진우를 보고 있었다. 전혀 관심이 없음을 적나라하게 알리는 냉랭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김진우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김진우는 지금 가브리엘과 정확하게 같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저 정도인데 친구는 어떨지…….’
처음엔 아나스타샤의 당당한 태도에 호감을 느꼈고, 명료한 자기 객관화와 의지력에 감탄했다.
타티아나가 여기까지 올라와서 카메라를 확인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아나스타샤는 어떤 면에선 타티아나보다 더 철저하게 자신의 상황을 확인하려는 면이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 준비성이 연주에도 드러난다면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후.}
아나스타샤는 이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들어 김진우를 가리키더니 말했다.
{당신, 눈빛이 바뀌었네.}
{뭐?}
{일부러 반바지 입고 놀러 온 느낌이었는데.}
김진우는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더니 입을 다물었고, 이연주는 창피해 죽겠다는 듯 얼굴을 가렸다.
리허설에 정해진 복장이 없긴 하지만…… 김진우는 과하게 자유로운 스타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자유로울 뿐, 생각 없이 멋대로 구는 사람은 아니었다.
{맞아. 놀러 왔었지. 그런데 저 애가 하는 걸 보니 생각이 좀 바뀌네.}
진지하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태도 쇄신을 약속하는 듯한 그 말에 아나스타샤는 빙그레 웃었다.
이연주는 아나스타샤 옆에 가까이 다가가더니 놀랍다는 듯 말했다.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었는데, 타티아나는 5분 만에 바꿔 버렸네?}
{예전부터 그랬어. 타티아나는…… 음악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완전히 바꾸어 버리지.}
아나스타샤는 오랜 기억을 더듬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모니터 속 타티아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더니 마치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러니 내가 방해가 되어선 안 되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같은 콩쿠르 참가자로서 방해란 말은 굉장히 위험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연주의 이어지는 물음에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대답하며 웃었다.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뜻이야.}
가브리엘은 가만히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친한 친구와 같은 콩쿠르에 참가하여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적어도 그녀가 타티아나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아낀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마 친구로서 후회 없이 무대에 올라 가진 실력을 전부 보이고 내려오길 바라고, 또 자신 역시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 같았다.
가브리엘의 시선을 눈치챈 아나스타샤는 이내 그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아, 카메라는 좋았어요.}
{마음에 드셨습니까?}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손목을 들어 스트레칭을 했다.
{그럼…… 슬슬 리허설을 시작할까요?}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연주와 김진우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먼저 해도 돼?}
{아니, 내가 먼저 하고 싶은데.}
상황을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가브리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타티아나의 리허설을 보고 세 피아니스트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했었다. 세 명 모두 충격을 받은 건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런데 이렇게 더더욱 의욕적으로 나서는 건 예상 밖이었다.
세 사람은 순서를 정하자며 가위바위보를 하기 시작했다.
이 젊고 에너지 넘치는 피아니스트들의 모습을 보며 가브리엘은 유쾌한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