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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10화 (1,110/1,277)

##  1110화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데보라 아주머니와 텔레비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난 부엌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파스칼 아저씨가 심각한 표정으로 차를 끓이고 있었다.

평소엔 아주머니가 차를 준비해 주시곤 했는데, 오늘은 아저씨가 회사에서 얻어 온 차를 끓여 주시겠다고 하셔서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무슨 차인지는 모르겠지만 얌전히 기다리자 잠시 후 아저씨가 주전자와 찻잔들을 가지고 거실로 오셨다.

아주머니가 프랑스어로 무언가 묻더니 내게 설명해 주셨다.

“카페인 없는 것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하니까 괜찮을 거야. 그러니 한번 마셔 보겠니?”

“감사합니다.”

“혹시 모르니까 조금씩 마시렴.”

곧 내 앞에 놓인 찻잔에 연녹색 차가 차올랐다. 언뜻 봐선 녹차처럼 보이는데 그 향은 완전히 달랐다.

난 차 이름을 묻지 않고 일단 찻잔을 들고는 파스칼 아저씨와 살짝 눈을 마주쳤다.

무슨 차인지 몰라도 아저씨가 가지고 와 주신 것이니 믿고 마시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지체 없이 난 첫 모금을 목으로 넘겼다.

“…….”

“어떻니?”

“매……워요.”

생강차 종류인가? 뭔가 알싸한 맛이 입안을 간질였다. 혀가 예민해서 매운 걸 잘 못 먹는 내게 이 차는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살짝 시간도 벌 겸 아주머니에게 여쭈어 보았다.

“무슨 차인가요?”

“아…… 모링가 차라고. 인도에서 온 차라고 하더라고.”

“들어 본 적은 있어요.”

“나도 처음 마셔 봤는데 먹기 편한 맛은 아니구나.”

아주머니는 살짝 난감해하셨다.

분위기를 망칠 생각이 없었기에 난 다시 모링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다시 한번 마셔 보니 견딜 만했다.

일단 카페인만 안 들어 있다면 단기적인 고통은 참을 수 있으니 괜찮았다.

내가 불평 없이 홀짝거리며 차를 마시자 전전긍긍하던 부부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그렇게까지 눈치를 보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여전히 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 대접은 식사는 물론 생활 전반에 걸쳐 있었고, 때론 의식주를 넘어서서 조금 더 깊은 부분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

스마트폰으로 모링가 차에 대해 찾아보던 난 이 차가 고대 인도의 마우리아 제국 전사들이 전투에 나가기 전에 마시는 차였다는 것을 보고는 하마터면 웃어 버릴 뻔했다.

파스칼 아저씨가 회사에서 어떻게 이 차를 얻어 오셨는진 모르겠지만, 아마 이 전쟁과 관련된 일화가 아마 내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 분들이 계셨던 것 같다.

콩쿠르가 그렇게 전쟁 같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게 기대를 걸고 있는 어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진 알 것 같아서 난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차 너무 좋네요. 힘이 솟는 기분이에요.}

{그래?}

파스칼 아저씨가 만족한 듯 웃으셨고, 데보라 아주머니 역시 기분 좋게 티타임 토크를 이어 나가셨다.

랑스가 가족들과 보내는 이런 시간은 정말 힐링이 되는 순간이었다.

서서히 콩쿠르 일정이 다가오면서 난 알게 모르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절대적으로 내 편이 되어 줄 믿을 수 있는 어른들이 가까이에 있다는 건 이렇게 존재만으로도 마음의 안심이 되어 주었다.

만약 혼자서 호텔에서 지냈다면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으리라.

물론 내 편은 브뤼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를 마시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모스크바에 있는 루슬란 오빠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항상 이 시간이 되면 오빠는 짧게나마 전화로 내 안부를 묻곤 했다. 세상에 이렇게 착한 오빠가 어디 있나 싶다.

-이틀 남았지?

“예. 그런데 전 마지막 날이 순서라서 일주일 정도 남았어요.”

-일주일? 운 좋네, 타티아나.

“뭐가요?”

-뭐긴 뭐야. 남들보다 더 연습할 수 있는 거 아니야? 패널티라도 줘야겠는데.

괜히 놀리는 듯 장난을 치곤 했지만 그마저도 애정이 느껴져서 좋았다.

난 기분 좋게 웃으며 오빠와 농담을 주고받다가 내쪽에서도 안부를 물었다.

“별일 없으시죠?”

-그래. 심심할 정도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너 따라갈 걸 그랬어.

“엑.”

-그렇게까지 질색할 일이야?

“당연히 질색하죠.”

-너 예전엔 같이 가 달라고 졸랐던 것 기억 안 나?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요.”

사실 그땐 내게 문제가 있던 게 아니라 오빠와 친해지고 싶어서 반 억지로 여행길에 동참시켰던 것이었다.

오빠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년이나 된 일이니 사실 이젠 그 이유가 어떻든 별 상관 없었다.

어쨌든 오빠가 말만이라도 콩쿠르에 따라갈 걸 그랬다고 해 주는 것이 난 무척 고마웠다.

사실 오빠가 따라오면 이렇게 호스트 패밀리에서 머물긴 어렵고 호텔을 잡았어야 했을 테니 지금처럼 내가 원하는 환경이 조성되기 어려웠겠지만…… 그래도 오빠가 있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즐거웠으리라.

그간 오빠와 같이 갔었던 곳도 많다. 최근에 갔던 소치 별장의 추억은 지금도 가끔 생각할 때면 웃음이 날 정도였다.

우린 추억을 공유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간간이 웃을 때마다 오빠도 따라 웃었다.

난 우리 남매가 이렇게 전화로 나눌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러나 루슬란 오빠는 정확하게 딱 자르는 기준이 확실한 사람이기도 했다.

-넌 알아서 잘하겠지. 아버지도 그러시더라. 네 걱정은 하나도 할 것 없다고.

잘못 오해하면 혼자 내버려 둬도 잘하니까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오빠의 목소리엔 냉혹함이 아닌 다정한 신뢰만이 가득했다.

내가 오해하고 상처받지 않을 것이란 걸 분명히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난 일부러 장난스레 되받아쳤다.

“그래도 걱정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렇게 말하는 녀석이 아까 같이 갈 걸 그랬다는 말엔 기겁을 해?

“그냥 멀리서 걱정만요.”

-아주 제멋대로네.

“후후후.”

난 낮게 웃으며 발을 까딱였다.

오빠는 내가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난 단순한 사람이다. 누군가 기대하면 거기에 부응하고, 도움을 바란다면 무엇이든 해내려 한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려 애쓰는 내 의지력엔 그러한 다른 사람들의 영향이 크게 미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걱정하면 난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뒤를 돌아보게 된다. 내 그림자는 무척 길게 늘어져 있다.

그 그림자를 보는 순간 난 혼자서 깊은 생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내가 잘하길 바란다면 되도록 응원만 해 주었으면 한다. 걱정을 느끼면 기쁘긴 하지만 그만큼 멈칫거리게 되니까.

다행히 오빠는 우리의 환경과 내 성격을 이해하고 있기에 내가 두리번거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었다. 그 점에서 난 정말 감사함을 느꼈다.

“전 괜찮아요. 어제도 말씀드렸죠?”

-널 맡은 가족은 좋은 분들이고, 아나스타샤도 있고, 새로운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고?

“맞아요.”

전화를 받을 때마다 오빠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들이었다. 난 다시 한번 확고하게 못 박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도록.

“제게 주어진 조건은 완벽해요. 그러니 기다려 주세요. 무대에서 보여 드릴게요.”

조용히 듣고 있던 오빠는 이내 짧고 시원하게 말했다.

-알았어.

이 이상 긴 이야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만약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정말 밤새워 할 말이 많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가 적당했다.

오빠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지 가볍게 웃었다.

-이만 끊을게. 좋은 밤 되길.

“오빠도요.”

-응.

겨우 몇 분 정도 이어진 전화였지만 난 조금 더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정서적인 안정을 찾는 데엔 따뜻한 차도 좋지만, 역시 목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과 통화하는 게 좋았다.

“…….”

잠깐 사이 조금 더 깊어진 밤의 어둠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난 한참 동안이나 연락이 안 되는 한 친구를 떠올렸다.

다시 전화를 걸어 봐도 연결은 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까지 정말로 전화 한 통화도 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

그 점이 내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안절부절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에르네스트가 떠나면서 원했던 건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건 일종의 바람이자 의지였다. 그렇다면 난 거기에 철저하게 응할 필요가 있었다.

독하게 마음을 먹고 몸을 일으켰다.

“…….”

달리 할 일도 없으니 저녁 연습을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스마트폰 전원을 끄려고 하는데 그 순간 전화가 걸려 왔다.

저번에 교환했던 이연주의 번호였다.

‘뭐지? 이 시간에…….’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서 난 얼른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연주.}

-{아, 안녕. 좋은 저녁이야, 타티아나.}

{무슨 일이신가요?}

파티장에서 한층 친해진 이후로 난 이연주와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이연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세연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때문에 내게 있어 그녀의 존재는 무척이나 중요했고, 그녀 역시 내게 관심이 있어 보였으니 우리가 친하게 지내는 건 서로에게 유익한 일이었다.

내가 반갑게 전화를 받자 이연주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아나스타샤와 먼저 통화 안 했니?}

{아나스타샤요? 아뇨…….}

-{음…… 그렇구나.}

정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궁금해졌다. 하지만 괜히 조급하게 캐물어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가만히 기다렸다.

이연주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생각하더니 신중하게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나 오늘 아는 동생이랑 아나스타샤랑 순번 뽑고 리허설하고 왔거든.}

{아, 오늘이었나요?}

-{응.}

저번에 아나스타샤와 통화했을 때 듣기론 조만간 부를 것 같다고 했었는데, 그게 오늘이었나보다.

원래는 한 명씩 플라지 빌딩에 가게 되어 있었는데, 시간이 겹친 모양이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제 순서가 나왔다는 점이었다.

{원하시는 순서이신가요?}

-{응. 이튿날이야. 아나스타샤는 마지막 날이었고…….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순서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지?

정말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귀를 기울이자 이연주가 이어 말했다.

-{이실직고해야 할 일이 있어.}

{예? 그게 무슨…….}

-{나 네가 리허설하는 녹화 영상을 봤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하지만 그 내용이 그리 문제 될 건 없었다. 단지 궁금할 뿐이다. 어쩌다가 그걸 보게 되었는지.

{녹화하고 있을 것 같긴 했지만…… 그걸 어떻게 보게 되신 건가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연주는 상세하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와 이연주 그리고 김진우 세 사람은 공동 리허설을 하기로 결정했고, 스튜디오4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동시에 카메라가 어떻게 무대를 찍고 있는지도 확인했다.

거기서 예시가 필요해서 재생한 것이 바로 내 리허설 장면이었다.

{그런 거라면 상관없어요.}

-{괜찮니?}

{아무 문제 없는 일이에요. 서류에 사인했잖아요? 모든 연주 장면을 녹화하고 영상으로 공개하는 것에 동의한다고요.}

-{그, 그렇게 생각한다면 괜찮긴 한데…….}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도 이연주는 말끝을 흐렸다.

-{아무튼 난 너한테 이야기하지 않고 그걸 본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려서…….}

{후후, 그래서 이렇게 전화 주신 건가요?}

-{응…….}

약간 소심하고 성실한 성격이 내가 아는 이연주 그대로였다. 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간신히 추스르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렇게 전화해 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정말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보다 제가 이상하게 보이진 않았나 싶네요. 저도 카메라 확인을 해 볼 걸 그랬어요.}

-{전혀 아니야! 진짜 너무 잘 찍혀서 거기 있던 분들도 네 리허설이 최고라고 했어.}

{정말인가요?}

-{정말이고 말고. 게다가 드뷔시 연주도…… 스피커로 듣는데도 소름이 돋았던 것 있지.}

살짝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하던 이연주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덧붙였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도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잘 치더라. 그 애가 뭘 쳤는지 아니?}

{알캉인가요?}

-{너는 알고 있었구나?}

난 낮게 웃음을 흘렸다.

알캉의 곡은 퍼포먼스를 과시하기에 적합한 곡이었다.

공동 리허설을 하는 자리에서 그 곡을 꺼냈다는 건 두 사람을 이미 경쟁자로 보고 실력 발휘를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아마 예상컨대 아나스타샤가 본래 실력을 보이지 않곤 못 배길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연주를 한국의 두 연주자가 보여 주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이연주의 목소리는 조금 진지해졌을 뿐이지, 거기에 담긴 열기는 더더욱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너희 두 사람은 마지막 날이지……. 난 그 전에 치니까 너희 둘의 연주를 마음 놓고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연주는 나중에 우리가 무엇을 연주하든 먼저 자신이 준비한 것을 제대로 펼쳐 보이기만 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미 자기 음악에 대한 자신감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난 이연주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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