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1화
일요일 오후 2시. 따스한 5월의 햇빛이 브뤼셀 곳곳을 비추었다. 느긋하게 차를 한 잔 마시기 딱 좋은 봄날씨였다.
프랑스에서 온 여행자인 류카는 신문을 한 손에 쥐고 찻잔을 기울였다.
커피를 마시면서도 안경 너머의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신문을 훑고 있었다.
미국의 대통령은 오늘도 극단적인 발언으로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거기에 따라 수천 억 달러는 될 자금들이 파도를 치고 있었다.
일요일임에도 비명을 지르고 있을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회사에 안식월을 선언하고 휴가를 온 류카에게 그런 건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일선에 있을 동료들에게 애도를 표하며 류카는 신문의 페이지를 넘겼다.
『드디어 시작하는군.』
예술 문화를 다루는 페이지에선 대문짝만하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개최를 알리고 있었다.
각국에서 온 참가자들의 비중이나 우승 후보들을 소개하는 페이지도 그 뒤로 한참이나 이어졌다.
띄엄띄엄 신문 헤드라인만 보던 류카는 콩쿠르 페이지를 자세하게 정독했다.
사실 벨기에는 귀한 휴가를 사용하기에 썩 좋은 곳은 아니었다.
프랑스 바로 옆에 있는 만큼 거리는 가까웠지만 가까운 곳을 원했다면 차라리 해외로 나갈 것 없이 니스로 휴양을 가는 편이 나았고, 먼 곳을 원한다면 벨기에보다 훨씬 더 이국적이고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았다.
그럼에도 류카가 한 달의 휴가를 투자하며 벨기에에 온 이유는 단지 하나뿐이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직접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어디 보자…….』
류카는 신문에서 한 연주자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 클래식을 좋아해서 종종 연주회에 가곤 했다.
그중 재작년 여름, 파리에서 봤던 한 연주회는 지금까지도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류카는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기대에 비해 시원찮았던 모차르트 협주곡, 인터미션 사이에 무대에 올라갔던 한 소녀. 그리고 그 소녀가 휘둘렀던 라흐마니노프의 에튀드.
마치 늑대의 이빨과도 같던 그 에튀드는 문자 그대로 피아노를 물어뜯었고, 그 상흔은 피아노에만 남겨진 것이 아니라 당시 현장에 있던 청중들에게도 영원한 기억으로 남겨졌다.
연주회가 끝나고, 류카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무대에 올라왔었던 소녀의 이름을 찾기 위해 애썼다.
다른 청중들과 의견을 나눠 보기도 하고, 심지어 홀 관계자나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직접 묻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소녀가 누구인지 알려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정도의 카리스마와 실력을 보여 준 소녀라면 분명 유명해야 할 텐데, 그 어디에서도 정보를 찾을 수가 없어서 류카는 한참을 고생해야만 했다.
결국 포기하게 된 것은 거의 석 달이 지나서였다. 아직 무명인 학생이라면 사실 알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분명 언젠가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릴 날이 오리라 생각하며 기억 속 깊은 곳에 묻어 두길 약 2년.
어느 날, 뉴스에 기억 속에 있던 그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은 타티아나. 류카는 마시던 커피를 뿜고는 그것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정신없이 그녀의 정보를 알아보았다.
그렇게 그녀가 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출전한다는 것까지 알게 된 류카는 그간 회사를 다니며 한 번도 쓰지 않은 안식월을 처음으로 사용하고 브뤼셀로 날아온 것이다.
‘그때 그 소리를 다시 한번 듣고 싶어.’
류카는 이미 타티아나의 음반을 구매해서 들어 봤다.
그녀의 음반은 평론가들의 압도적인 극찬을 받으며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갈 정도로 굉장한 명반이었다.
열일곱 살이란 나이와 관계없이 그녀는 이미 음악계에서 인정받는 아티스트였다.
하지만 류카는 그 음반조차 타티아나의 진정한 실력을 제대로 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좋은 스피커로 들어도 부족했다. 소름이 돋고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했던 소리의 부피와 무게는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 콩쿠르에서 타티아나가 피아노를 부숴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류카는 파리에서 있었던 일이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피아노 상태가 엉망이었기 때문에 타티아나는 직접 나서서 피아노를 고장 내어 교체해 버렸을 뿐이니까.
하지만 엉망인 피아노로도 그 정도 사운드를 냈던 타티아나가 제대로 된 무대에서 연주를 한다면 어느 정도 실력을 낼 수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류카는 기대감에 들뜨는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신문에도 타티아나의 이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페이지를 몇 장 더 넘겼다. 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아 찾아냈다.
‘아직은 조심스러운 평이지만…….’
기자는 아주 객관적으로 타티아나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다.
나이는 열일곱 살. 러시아 중앙음악학교에 재학중으로 미하일 볼콘스키를 사사중.
청소년 콩쿠르 수상 이력과 여러 연주회 경력, 음반 성적. 심지어 러시아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기까지 했으니 이것만으로도 타티아나의 천재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한 피아니스트 중엔 천재가 아닌 이가 없었다.
모든 참가자들의 학력과 경력, 타이틀 등을 평균 내어 본다면 타티아나는 아직 거기에 못 미칠 것이다.
그러니 아직 기사에 뚜렷하게 기대감을 싣지 않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류카는 그녀가 무대에 한 번만 오른다면 바로 많은 사람의 시선을 모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2년 전, 열다섯 살밖에 안 된 타티아나가 거의 무명이던 시절부터 확고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류카에게 있어서 이번 콩쿠르는 그야말로 증명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흠…….』
물론 첫날인 오늘은 타티아나를 볼 수 없다. 그녀의 순서는 첫 라운드 마지막 날이었다.
하지만 브뤼셀에 온 목적이 하나뿐이었던 류카는 달리 다른 곳에 갈 생각도 없었다.
『슬슬 가 볼까.』
시간이 되었다. 류카는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다 마셔 버리곤 일어섰다.
걸어서 도보로 5분도 안 되어 그는 플라지 빌딩에 도착했다.
처음이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조금 헤맸지만, 다행히 사람들을 따라서 팸플릿도 구매하고 스튜디오4라는 이름의 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리를 찾아 착석한 류카는 홀을 돌아보았다. 크기가 큰 홀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무대에 집중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무대를 둘러싼 카메라가 얼핏 봐도 열 개가 넘었다. 저기에 설 연주자들이 긴장하진 않을지 걱정이었다.
옆을 보니 마이크를 쥐고 무언가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여러 방송국에서 기자들이 취재를 온 것 같았는데 그 수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세계적인 축제란 것이 실감 났다.
흥미진진하게 홀을 구경하던 류카는 순간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자연스레 가벼운 눈인사가 오갔다.
마침 옆자리이니 인사 정도는 하자는 듯 남자가 물었다.
『누가 제일 마음에 듭니까?』
친근한 물음에 류카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타티아나 베르체노바라고…… 아십니까?』
『아, 러시아에서 온 천재 말이군요? 알다마다요. 저도 꽤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이제 클래식 음악계에서 타티아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그 정도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 불과 몇 년도 안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이미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이곳에 너무 많이 참가해 있었다.
『전 세르게이나 라파엘이 우승 후보이지 않을까 싶은데……. 음, 이번 콩쿠르는 정말 접전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류카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으론 타티아나만 한 피아니스트가 없을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현실적인 부분을 간과할 순 없기 때문이었다.
물끄러미 류카를 바라보던 남자는 말이 잘 통해 즐겁다는 듯 계속 말을 붙였다.
『그나저나 말씀을 들어 보니 이곳 분이 아니시군요. 어디서 오셨습니까?』
『프랑스에서요.』
『어쩐지, 그럴 것 같았죠. 반갑습니다. 기욤입니다.』
『아, 류카입니다.』
가볍게 인사까지 하고 나니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다.
류카는 이 콩쿠르를 보기 위해 회사에 안식월을 신청하고 나온 이야기를 해 주었고, 기욤은 그의 열정이 대단하다며 웃었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홀 안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고, 들려오는 목소리도 많아졌다.
프랑스어뿐만이 아니라 영어나 스페인어 같은 다른 언어들도 뒤섞여 들리기 시작했다.
류카가 슬쩍 분위기를 살피니 다들 옆자리 사람과 이야기를 하거나 팸플릿을 보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지만 팸플릿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조금 묘하게 보였다. 대부분이 펜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기욤, 한 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예. 뭐죠?』
『지금 다들 펜을 쥐고 팸플릿에 무언가 쓰는 것 같은데. 뭘 쓰는 겁니까?』
기욤은 고개를 쭉 빼고 주변을 보더니 짧게 웃었다.
『아, 준결승 진출 후보를 예상해 보려는 거죠.』
콩쿠르 참가자는 73명. 그중 다음 라운드로 향하는 건 선택된 24명뿐이다.
누가 선택될지 예상해 보는 건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류카는 어떠한 명확한 기준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약간 의구심이 있었다.
『전 클래식에 조예가 그리 깊지가 못해서…….』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렇게 전문가면 여기 청중석이 아니라 저 앞의 심사 위원석에 앉아야죠.』
그러나 조심스러운 류카의 태도를 기욤은 단번에 잘라 냈다.
『이 콩쿠르는 피아니스트들에겐 정말 중요한 발판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론 하나의 음악 축제입니다. 청중들은 청중대로 즐기는 방법이 있는 겁니다. 나름대로의 감상을 가지고 연주자들을 평가한다고 해서 잘못이라고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벨기에 사람들은 정말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만끽하며 즐기고 있었다. 거기엔 사회적인 특별한 자격 등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음악을 사랑하고 새로운 신예들에게 관심을 쏟을 열정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정말 좋은 문화가 정착되어 있음을 느끼며 류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정말 정열적인 청중들이군요.』
『하하, 당신이야말로 음악 축제를 위해 한 달의 휴가를 모두 투자하기로 마음먹지 않았습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을 통틀어 봐도 류카 당신처럼 의욕적인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사실 류카는 그저 타티아나를 따라왔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샌가 정신을 차려 보니 세계에서 가장 큰 음악 축제의 한가운데에서 가장 의욕적이란 말까지 듣고 있었다.
그 사실에 무척 즐거워진 류카는 한층 더 적극적으로 콩쿠르를 관람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욤이 말한 것처럼 순위를 매겨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
임세연은 멍하니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았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오프닝이 방송되고 있었고, 여러 피아니스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레티시아와 알레한드로, 양지은 그리고 타티아나. 세연이 아는 사람들도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겠다고 할 걸 그랬나…….’
오프닝 촬영에 대한 이야기는 세연에게도 들어왔었지만 그녀는 어쩐지 부끄럽기도 하고 부담스러워서 거절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왜 거절했나 싶었다.
여러모로 후회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 세연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
국제 콩쿠르 무대에 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싱숭생숭했다.
호스트 패밀리의 가족들은 세연을 극진하게 대해 주었지만 긴장 때문에 뭔가 먹고 싶지도 않았고, 열심히 고른 드레스는 괜히 이상하게 보였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필 또 순서가 첫날 저녁 세션이다 보니 어찌 할 방도도 없었다.
복잡한 기분으로 멍하니 있자니 그 기분에 잠식되는 것 같았다.
세연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어쩔 수 없지.」
세연은 씩씩하게 말하며 벌떡 일어났다.
같은 나이인 타티아나나 아나스타샤는 어른스럽고 당당하게 잘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세연도 못 할 것 없었다.
머리 아픈 일들은 일단 치워 놓고 긴장감은 적당히 유지하면서 전부 무대에서 풀면 될 일이다.
‘머리는 냉정하게…… 음악은 뜨겁게…….’
어디선가 들었던 말을 주문처럼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세연은 천천히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