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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14화 (1,114/1,277)

##  1114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시작되었고, 난 오프닝에 얼굴을 잠깐 비춘 덕분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전화와 메시지 등을 받았다.

아직 무대에 오른 것도 아닌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격한 반응들이었다.

덕분에 내 연습도 하면서 중간중간 콩쿠르 진행 상황도 보고, 메시지에 답장도 하느라 바빴다.

바쁘게 오후 시간을 보내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한 숨 돌릴 시점에 류보비에게서도 전화가 걸려 왔다.

-아까 콩쿠르 오프닝 봤는데 언니 진짜 최고였어요!

“고마워요.”

난 류보비의 전화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모스크바에 있을 땐 사소한 일들도 메시지나 전화로 재잘거리기 좋아하던 그녀였지만, 내가 브뤼셀에 오고 나선 뭔가 연락이 굉장히 뜸해졌었기 때문이다.

물론 날 배려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난 류보비가 자주 연락해 주는 것이 좋았다.

간만이라는 기분을 느끼며 류보비와 즐겁게 통화했다. 그런데 그녀가 한참이나 오프닝 영상에 대한 칭찬을 하더니 갑자기 넌지시 물어 왔다.

-그런데 있잖아요…… 옆에 있던 남자는 누구예요?

말투가 약간 이상했다. 정말로 알레한드로에게 흥미가 있어서 이렇게 묻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묘한 경계심이 느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난 작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나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라서 되도록 건조하게 대답하려 애쓰며 답했다.

“아르헨티나의 연주자인 알레한드로 페테르손 씨예요.”

-친하세요?

“친하다기보다는…… 이곳에서 처음 만났네요.”

-아, 정말요?

“왜 그러시나요?”

전화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로 류보비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조용히 기다리자 이윽고 그녀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냥요. 뭔가 되게 친해 보여서……. 제가 간섭할 일은 아니지만요!

뭔가 가슴 한편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든다.

이쯤에서 그냥 대화를 정리해도 되겠지. 그러는 편이 내겐 차라리 편하다.

하지만 지금 류보비를 그렇게 대하면 앞으로도 그녀는 내게 간섭하길 어렵게 느낄 것 같았다.

난 이럴 땐 대놓고 허락하는 편이 낫다는 걸 알기에 시원하게 말해 버렸다.

“간섭 좀 하셔도 괜찮은데요? 왜요?”

-하…… 저기…… 에르네스트 오빠는 아직도 연락 안 돼요?

내가 대놓고 말하자 류보비 역시 자신의 생각을 슬쩍 드러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명료하게 보였다.

류보비가 알레한드로를 경계하며 에르네스트를 찾는 이유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알면서도 왜 지금 그 이야기를 하냐고 묻는 건 예의가 아니다. 나만 우스운 꼴이 되기도 하고.

간섭을 받으면서도 난 그것이 그리 거슬리지 않았다. 되레 누군가 이렇게 물어봐 주길 바랐던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일단은 그 기분을 목소리에 섞어서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안 되네요.”

-에휴.

“괘씸하죠?”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을 순 없었다.

지금 콩쿠르 오프닝을 보고 연락해 온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에르네스트는 보긴 했는지 모르겠다.

전파가 안 닿으니 텔레비전도 안 나오려나? 그럼 최소한 오늘 시작했다는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나?

류보비는 당혹스러워하더니 갑자기 에르네스트의 편을 들고 나섰다.

-예? 괘, 괘씸까진 아니고요! 일이 바쁜 거겠죠. 그럴 수도 있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한데요.”

-으아…….

류보비의 반응이 귀여워서 조금 더 놀려 주었더니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이제 내게 간섭을 할 정도로 자라고 가까워졌지만 그래도 아직 어리고 순진했다.

너무 장난을 많이 치는 건 안 좋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지금 난 콩쿠르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중이니까…… 어떻게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할까 생각하는데 류보비가 작전을 바꾸었는지 다른 말을 꺼냈다.

-그…… 간섭해도 된다니까 그러는데요…… 페테르손 씨가 뭔가 잘못한 점은 없어요? 뭔가 느낌이…….

“잘못한 점이요? 많죠.”

-많다고요?

여러 가지 생각이 나긴 하는데…… 괜히 류보비가 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길 바라진 않았다.

“생각해 보니 별것 아니긴 했네요.”

-별것 아닌 잘못이 어디 있어요. 페테르손 씨가 귀찮게 집적거린 거 아니에요? 조심해요. 언니는 너무 격의 없을 때가 있어서 사람들이 착각한다고요…….

류보비는 조금 더 속내를 드러냈다. 전부 내 걱정뿐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걱정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괜찮아요. 페테르손 씨는 이미 결혼까지 한 분인데요.”

-완전 몹쓸 사람이네!

“예?”

류보비는 갑자기 무슨 착각을 했는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난 놀라서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류보비는 내 생각처럼 어리기만 하진 않은 모양이다.

더 이야기가 길어지면 뭔가 곤란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난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제 순서는 마지막 날이에요. 오늘은 제 친구 차례네요.”

-친구? 아나스타샤 언니요?

“아뇨, 세연 양이라고…… 아시나요?”

-들어 봤어요.

류보비는 가늠하기 어려운 대답을 하더니 약간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응원하시는 거죠?

“예, 그렇죠.”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요.

같은 콩쿠르에 나간 경쟁 상대인데도 상대가 무대에 설 때만큼은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다.

서로 최선을 다해 경지를 겨루어야만 명예로울 테니까.

이런 동업자 정신은 비단 피아노 연주자뿐만이 아니라 성악가인 류보비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한동안 앞으로 진행될 콩쿠르 일정 등을 이야기 하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류보비가 먼저 시간을 자각했는지 대화를 끊어 주었다.

-그럼 다음에 또 전화할게요!

“후후. 그래요, 류보비.”

전화를 끊고 나서 난 한동안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전화할 수도 있는데, 그럴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

나야말로 일단 생각하지 않기로 한 부분을 자꾸 돌이키는 것 같다.

지금 그쪽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먼저 미루어 짐작해서 답답해하거나 기분 상해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슬슬 집중해야 할 때다.

“후.”

난 태블릿 컴퓨터를 들고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이미 내 음악은 형태를 제대로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소리가 섞일 염려는 없었다.

그래서 오후 세션 때는 기본적으로 내 연습에 집중하면서도 쉴 때 간간히 다른 참가자들의 무대를 봤었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연습을 접고 콩쿠르만 보고 싶었다.

‘세연…….’

저녁 세션의 첫 연주자는 바로 세연이었다.

난 그녀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세연은 몇 년 사이 연주자로서 엄청나게 성장했고 큰 무대에서도 잘 견딜 수 있는 좋은 정신력을 지녔다.

그런 그녀라면 분명 잘 해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혀 실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순 없는 것이다. 그건 정말 피아노의 신만이 알 일이다.

때문에 난 세연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도 양손을 모아 쥐고 기도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었다.

“……”

무대에 올라온 세연은 너무 예뻤다.

붉은 드레스는 일전에 사진으로 보여 줬던 것처럼 그녀와 정말 잘 어울렸고, 당당한 태도와 예의 바른 인사도 한 번에 청중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보이는 모습은 너무나 훌륭했다. 그다음은 가장 중요한 소리였다.

‘하이든도 잘 배웠네.’

그녀가 연주하는 하이든의 소나타는 호보겐 16의 52번.

이런 고전 소나타는 연주자의 기량을 너무나 투명하게 드러낸다. 거기에 겁을 먹고 움츠리면 절대로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없다.

세연은 전혀 기죽지 않고 멋진 음색을 자아내고 있었다.

내게도 하이든의 소나타들은 굉장히 의미가 깊었다.

중앙음악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실기 시험을 쳤을 때도 쳤었고, 처음으로 독주회를 열었을 때도 첫 곡으로 하이든 소나타를 택했었기 때문이다.

만물이 깨어나는 봄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 같은 따뜻한 음색은 어떤 일을 시작하기 쉽게 해 준다.

어린 피아노 연주자가 전 세계에 보이는 대형 콩쿠르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짹짹 새가 울고, 풍경은 언덕을 지나쳐 풍차가 도는 마을 어귀로 향한다. 이 짧고 편안한 주제는 두 번 반복되면서 시간의 흐름을 보였다.

이어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원하는 그림을 보이기 정말 어려운 음악임에도 세연은 간결하면서도 화려한 연주를 해내고 있었다.

두 번째 주제까지만 들었는데도 난 아주 약간 가지고 있던 걱정마저도 완전히 떨쳐 낼 수 있었다.

기교적인 문제는 당연히 없고, 숙련도와 표현력 그 어떤 부분에서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냥 편안하게 즐겨도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 때쯤, 난 정말로 즐기면서 세연의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약간의 변주로 반복되는 하이든의 소나타 1악장은 찬란하게 빛나는 피날레로 끝났고, 임세연이라는 음악가의 기초가 얼마나 단단한지 완벽하게 증명해 주었다.

“너무 좋았어요.”

마음 같아선 이어지는 두 개의 악장도 더 듣고 싶었지만, 콩쿠르에선 1악장으로 고전 음악에 대한 역량 평가만 진행했다.

세연은 손을 놓고 숨을 고르며 잠시 피아노를 내려다보았다.

난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마음속에 있는 소리들을 바꾸고 있는 중인 것이다.

잠시 후, 세연이 다시 손을 피아노 위에 얹자 처음 들었던 고전 소나타와는 완전히 다른 진득한 소리가 넓게 퍼졌다.

‘쇼팽도 쉽지 않은 걸 골랐네.’

세연이 고른 쇼팽 연습곡은 op.25의 5번째 곡.

이 곡의 낭만적인 음형은 자연스럽게 구현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특히 페달을 잘못 쓰면 완전히 곡을 망칠 우려가 있었다.

연습실에서 혼자서 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홀에서 친다면 더더욱 그렇다.

피아노와 홀 두 개의 악기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다뤄야만 하는 곡인 것이다.

때문에 경험이 부족한 연주자들은 연습실에선 잘 쳐도 홀에서 종종 갈피를 못 잡는 경우가 있었는데, 다행히 세연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우아하게 연주해 나갔다.

직접 가서 듣지 못하는 건 무척 아쉬웠지만, 이렇게 스피커로 들어도 세연이 구사하는 음들이 엉키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구조적 실수가 없다면 표현력은 이미 훌륭하니 걱정할 것 없었다.

세연이 사사한 교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난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습득한 것들을 자신의 음악에 녹여 내 서서히 독자적인 음악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홀 안의 분위기가 살짝 바뀐 느낌이 들었다.

청중들은 분명하게 임세연이라는 피아노 연주자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난 그 사실에 너무나 고무되었다.

그 집중과 기대를 안고 이어진 다음 곡은 죄르지 리게티의 에튀드 5번이었다. 부제는 무지개arc-en-ciel.

‘이건…….’

기묘한 음형이 휘청거린다. 현대 음악 특유의 조성도 박자도 알기 어려운 형태였다.

찰흙과도 같은 이런 형태를 빚어서 무지개를 만든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애초에 리게티의 음악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구사한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레퍼런스도 없었고. 그만큼 모두가 이 곡 앞에선 평등했다.

세연이 처음 연주했던 하이든의 소나타가 기본 실력을 투명하게 입증해야 하는 곡이었다면 이번 리게티의 에튀드는 근본적인 음악성을 날것으로 드러내야 하는 곡이었다.

에튀드 선정을 콩쿠르 측에서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완벽하면서도 지독한 시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시험에 처해졌을 때의 기분을 알 것만 같아서 난 모아 쥔 두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연주를 지켜보았다.

다행히 세연은 정말 강한 연주자였다.

“…….”

약간의 부족함은 보인다. 박자도 굉장히 어렵고 테크닉도 쉽지 않은 곡인 데다가 전체적인 개연성이 약간 비틀려 있었다.

지금 보이는 불일치는 분명 세연이 이 곡을 깊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연은 자신 있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게 빛의 입자들을 끌어모은 세연은 양손으로 피아노를 내리치며 소리를 내뿜었다.

그것이 리게티가 의도한 무지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귀엔 천연색의 스펙트럼이 넓게 펼쳐지고 있었다.

난 이 음악이 세연의 무지개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잘해 주고 있어.’

고전에서 낭만 그리고 현대까지. 여러 시대를 아우르는 레퍼토리는 정말 한 연주자를 극한까지 몰아세웠다.

그저 단순히 기억하는 악보들을 손으로 옮기는 게 전부가 아니다.

세연은 지금 200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약 15분 사이에 빠르게 시간을 여행한 것에 가깝다. 그만큼 정신없고 복잡할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연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잊지 않고 정확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칭찬해 줄 만한 일이다.

그리고 세연에겐 자유곡이 남아 있었다. 힘겨운 시간 여행을 마친 그녀가 마지막으로 신나게 놀기 위한 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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