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15화 (1,115/1,277)

##  1115화

박성재 교수의 아파트 거실. 김종혁은 켜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놀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농담을 던졌다.

「그나마 저쪽이 서머 타임이라 다행이네요. 하마터면 새벽 4시까지 기다릴 뻔했어요.」

「그러게 말일세.」

소파에 앉아 있던 박성재는 별생각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세연의 콩쿠르 무대를 보기 위해 저녁 8시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3시간 자고 일어났다는 교수를 대체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종혁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밤 11시에 종혁이 아파트 현관문을 두드렸을 때 박 교수는 직접 나와 종혁을 맞이해 주었고, 4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안부를 묻거나 지난 이야기들을 하는 건 2시간 정도로 끝났고 그 후론 각자 스마트폰을 보거나 술을 마시는 것뿐이었지만……

종혁은 이런 시간을 자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새 제자를 들인 교수는 죄책감과 외로움에선 많이 벗어난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같이 편하게 술 마실 사람이라곤 종혁이 유일무이했기 때문이다.

「한 잔 더 드릴까요?」

「그래.」

종혁은 조심스레 교수의 술잔에 소주를 채웠다.

「사모님이 혼내시겠네.」

착하신 사모님은 종혁을 볼 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분이었다.

아마 이렇게 같이 술을 마시는 것을 봐도 좋아하면 좋아하셨지 화를 내실 분은 아니었다.

어쨌든 종혁은 이렇게 존경하는 교수와 농담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이렇게 된 데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아이가 있었다. 자신의 술잔도 채운 종혁은 그녀를 생각하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할까요? 세연이의 콩쿠르 우승을 위하여.」

「우승을 위하여.」

정말 어려운 기대라는 건 알지만, 사람의 말에는 힘이 실려 있다.

때문에 농담으로라도 종혁은 세연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참가가 단지 경험을 쌓기 위해서라는 둥 가벼운 말을 하지 않았다.

당사자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옆에서 그런 소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당사자 앞에서 우승하길 바란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종혁도 교수도 세연에게 그만큼 부담을 줄 생각이 없었다. 단지 그녀가 만족할 만큼 실컷 해 보고 해답을 찾았으면 할 뿐이었다.

「시작하는군.」

새벽 3시. 브뤼셀 시간으로는 저녁 8시가 되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저녁 세션이 시작되었다.

미리 종혁이 인터넷 중계를 텔레비전에 연결해 두었기 때문에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었다.

짧게 편집된 오프닝 영상이 지나가며 세션의 시작을 알리고, 바로 무대를 비추는 카메라의 시점으로 변했다. 브뤼셀의 플라지 빌딩 스튜디오4였다.

세상의 수많은 피아니스트 중 저곳에 설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몇 안 된다.

그중 한 명이 세연이라는 것이 종혁은 무척 자랑스러웠다.

곧 안내자가 자랑스러운 후배인 세연을 소개했고, 그녀가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씩씩한 걸음걸이가 마음에 들었다.

「이야, 새빨갛게 입고 나갔네. 확실히 눈에 띄긴 띄어요?」

「눈에 띄는 것도 중요하니까.」

어떤 드레스를 입을지는 무대에 오를 사람의 자유이긴 하지만 보수적인 성향의 박 교수가 아마 어느 정도 통제를 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자유로운 불새처럼 화려한 차림을 한 피아니스트가 무대 앞에 섰다.

세연이 청중석을 바라보더니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종혁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아이구 예뻐라.」

「종혁 군. 자네도 이제 거의 삼촌 다 된 것 같군.」

「……갑자기 술맛이 확 별로네요…….」

종혁은 정색하면서 술잔을 내려놓고 항의했다.

「교수님, 저랑 세연이랑 나이 차이가 나 봤자 얼마나 난다고…….」

「조용.」

그러나 교수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한 손만 들어 종혁을 제지하고는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종혁은 한숨을 픽 내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막 피아노에 앉은 세연이 자세를 정돈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정말 크고 어려운 무대다. 피아니스트였던 적이 있었던 종혁은 저런 자리에서의 압박감이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안다.

때문에 종혁이 세연에게 바라는 건 완벽한 최고의 연주가 아니었다.

그저 실수하지 않길, 만약 실수하더라도 잘 극복하길 바랄 뿐이었다. 저런 곳에서 트라우마라도 생기면 정말 치유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니까.

「…….」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자 세연이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첫 곡은 하이든의 소나타였다. 훌륭한 테크닉과 표현력이 돋보였다. 종혁은 약간 긴가민가하던 세연에 대한 평가가 점차 안정됨을 느꼈다.

다음으로 이어진 쇼팽과 리게티의 에튀드 역시 큰 실수 없이 세연은 잘 연주해 냈다.

쇼팽은 차치하고 리게티의 에튀드는 정말 어려워서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지금 저 곡만 놓고 보면 종혁보다도 나을 정도였다.

확실히 세연은 자신의 보이싱을 피아노로 내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다.

테크닉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을 때에도 세연은 표현력이 상당히 좋은 연주자였다.

거기에 박 교수의 가르침과 독한 연습이 더해지자 세연의 천재성이 점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지금 그 빛이 무지개라는 부제의 곡을 빌려 반짝 빛났다. 아마 종혁뿐만이 아니라 이 연주를 지켜보는 모두가 그 빛을 봤을 것이다.

세연은 이 세계적 무대에 서기에 충분한 피아니스트였다.

「제가 최근엔 교수님이랑 세연이 방해하지 않으려고 피아노 치는 거 못 봐서 몰랐는데…… 어느새 저렇게 성장했습니까?」

「정말 열심히 연습했지.」

「연습만으로 저렇게 되나…….」

종혁은 중얼거리자 박 교수는 진지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 연습을 받쳐 줄 정신력도 있고.」

정신론에 대해 종혁은 그리 좋은 감정이 없었지만 지금은 박 교수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왕에 따질 것이라면 조금 더 깊게 제대로 따질 필요가 있었다.

바로 세연의 연습을 받쳐 준 정신력이 있듯 그 정신력을 받쳐 준 건 대체 무엇이냐는 점이었다.

거기에 대해서 예상되는 후보가 몇 있긴 했다.

그러나 종혁은 괜한 예단을 하는 대신 이번 콩쿠르에서 세연이 전하는 음악을 제대로 지켜보기로 했다.

기나긴 시대의 스펙트럼을 건너 다시 땅에 닿은 세연에겐 마지막 곡이 남아 있었다. 종혁은 그녀의 프로그램을 떠올리며 말했다.

「마지막은 카를 타우지히……. 대충 알고는 있지만 저도 곡은 처음이네요.」

「연구자가 아닌 피아니스트들에겐 생소할 만도 하지.」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약간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원래는 그럴 인물이 아닌데.」

잠깐 세연이 숨을 가다듬는 사이 종혁은 빠르게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카를 타우지히karl tausig.

1841년생으로 어려서부터 천재로 유명했고 열네 살에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가 되었으며 리스트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이미 당시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가 타우지히라면 자신의 기교에 다다를 수 있을 거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아무리 아끼는 제자라고 하더라도 그 자존심 강한 리스트가 그런 말을 했다는 데에 종혁은 조금 놀랐다.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이 높았던 타우지히는 작곡가로서도 그 천재성을 드러냈는데, 열여덟 살에 작곡한 첫 번째 곡이 바로 세연이 연주하려고 하는 이 곡이었다.

「……유령선das geisterschiff.」

피아노 독주를 위한 교향적 발라드 op.1c 유령선.

종혁이 그 곡명을 막 다시 읽어 냈을 때, 멀리서부터 무언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종혁은 그 움직임에 이끌려 고개를 들었다. 텔레비전을 보니 세연은 왼손으로 빠르게 건반을 트릴하고 있었다.

그 왼손으로부터 자욱하게 피어오른 안개가 귀를 막고 눈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때, 안개 너머에서 무언가 일렁거렸다.

착각인가 싶어 눈을 조금 더 크게 뜨고 지켜보자 다시 한번 안개 너머에서 무언가 어수선하게 흔들리는 형체가 느껴졌다.

착각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인식을 현실로 이루어 주겠다는 듯 먼 곳에 있던 무언가는 점점 더 그 무게와 크기를 더하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미증유의 압력에 굳어 버린 청중들 위로 갑자기 안개를 젖히고 거대한 뱃머리가 치솟아 올랐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이 그 뱃머리 끝에 걸린다. 종혁은 입을 벌리고 그 광경에 압도되었다.

‘미쳤군.’

한껏 치켜 올라갔던 뱃머리는 곧 육중하게 떨어져 내렸다.

그 어마어마한 큰 배의 무게에 짓눌리면 사람 같은 건 납작하게 되고 만다.

옆에 떨어지더라도 배가 일으키는 파도에 휩쓸려 버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세연이 안개 속에서 끌어낸 배는 청중들의 코앞에 그 선체를 낙하시키고도 물 한 방울 튀기지 않았다.

단지 유유히 뱃머리를 옆으로 돌리며 그 거대하고 흐릿한 선체를 자랑할 뿐이었다.

‘유령선이라…….’

이렇게 장엄한 곡에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타우지히는 리스트의 제자였던 만큼 그 테크닉도 리스트다웠고 작곡 방식 역시 리스트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닮아 있었다.

비슷한 곡이라면 리스트의 메피스토 왈츠를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3박자 음형은 피아니스트를 피로의 늪으로 끌고 내려간다.

힘이 약한 피아니스트들은 이 곡의 표현력을 절반도 채 못 끌어낼 것이다.

하지만 세연은 거대한 유령선의 선체를 조금도 작게 축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선보였다. 그녀의 기교는 간결하면서도 파워풀했다.

양손을 옥타브로 내리꽂으며 내려오는 솜씨가 가히 예술적이었다. 그 깔끔한 테크닉에 종혁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곡의 사운드는 그저 힘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내공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는데, 세연은 벌써부터 그 정도 경지에 이르러 있는 듯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보는 사이 옆으로 돌아선 유령선은 다시 안개 속으로 들어가려는 듯 멀리 움직이다가 천천히 원을 그리며 청중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령선의 모습에 놀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다른 소리가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노랫소리로 들리네.’

유령선에 타 있는 노잡이가 인간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인간만이 노래를 부르는 건 아니다. 노를 젓는 무언가가 노래를 부른다.

노는 허공을 가른다. 하지만 노랫소리는 허공에서 그저 스러지지 않고 확실하게 유령선을 앞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 곡에 사로잡힌 모든 인간들의 심상에 있는 에너지가 바로 그 추진력이었다.

어지럽게 눈앞을 휘젓고 다니던 유령선은 다시 세연의 손짓에 따라 뱃머리를 들어 올렸다가 크게 내리찍었다.

「와우.」

거대한 유령선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기 위해 세연이 부리는 기교는 정말 다양했다.

트릴, 트레몰로, 옥타브, 글리산도 등의 테크닉들을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구현해 내야만 했다.

아직 열일곱 살이란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연은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이 벅찬 기교들을 선보이면서도 세연은 팔과 손 외엔 그리 격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래 세연이 자연스럽게 몸을 흔들기도 하고 음악에 올라탄 듯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라는 걸 아는 종혁은 조금 의아해하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역할에 충실하려고?’

먼저 떠오른 건 세연의 역할이었다. 그녀는 지금 지휘자가 아니라 선장이었다.

그러니 거기에 맞게 동요 없이 단호한 선장을 가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카를 타우지히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가 바로 연주할 때 불필요한 움직임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아무리 어려운 곡을 격렬하게 연주하더라도 절대로 몸 전체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스승인 리스트가 화려한 퍼포먼스로 유명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단정하게 든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입은 다문 채 집중하는 것이 타우지히의 연주 태도였다.

실제로 본 적 없는 그 태도를 떠올리던 종혁은 순간 비슷한 태도를 근래 어디선가 본 적 있음을 느꼈다.

‘타티아나라는 아이가 그러지 않았던가……?’

최근 피아노 신의 총아로 주목받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의 연주 태도는 아주 점잖고 정교한 것으로 유명했다.

거기에 스카를라티 같은 고전에서부터 낭만, 현대에 이르르는 넓고 뛰어난 레퍼토리까지.

생각해 보니 타티아나는 타우지히와 닮은 부분이 많았다.

그제야 종혁은 세연이 왜 타우지히의 곡을 선택했고, 평소 습관과 다르게 무의식적인 퍼포먼스를 통제하면서 연주에 임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세연은 지금 자신의 한계를 시험할 수 있는 곳에 스스로를 올려놓고 보란듯이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알아볼 테고, 못 알아본다고 하더라도 세연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유령선의 선장이 된 세연은 자신의 존재감을 거대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저 애의 정신력이 어디에서 왔는지…… 확실해진 것 같은데.’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 종혁에게도 만족스러운 후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음악을 다루는 스스로가 조금 더 멋있어지길 바라는 욕심. 세연은 아주 적극적인 피아니스트였다.

그러나 그런 세연을 가장 확실하게 이끌고 있는 것은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저 멀리 있는 또래 피아니스트인 것 같았다.

‘재미있는 일이야.’

뛰어난 친구에게 자극을 받아 음악에 매진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이상한 건, 지금 세연이 타티아나에게 끌리는 이유를 종혁은 아주 분명하게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종혁이 지금 바로 타티아나를 떠올린 건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 그 역시 타티아나에게 흥미가 많았다.

‘교수님도 그러신 것 같던데.’

유령선이 우아하게 주변을 도는 사이 종혁은 교수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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