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6화
유령선은 밤안개 속으로 잠시 모습을 감추었고, 그사이 반짝이는 달빛이 마치 모든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고요한 수면을 비춘다.
종혁은 비로소 한숨 돌리며 소파에 몸을 뉘였다.
‘곡 자체가 복잡하진 않아.’
구성이 난해하거나 까다로운 부분은 없었다. 유령선이라는 제목에 걸맞은 또렷한 주제는 그 누구라도 들으면 알 수 있을 정도로 명료했다.
이야기의 깊이를 따지자면 스승인 프란츠 리스트의 곡이 아무래도 조금 더 깊다고 할 수 있었다.
종혁은 졸업 작품으로 연주했었던 메피스토 왈츠를 떠올렸다.
이는 과거의 음악가라면 피해 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숙명 같은 비교이기도 했다.
1860년의 리스트와 타우지히는 스승과 제자로서 그 차이가 이해되었겠지만, 그것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는 현대인들은 음악의 가치만 놓고 평가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종혁은 50세 리스트의 음악성과 18세 타우지히의 음악성을 감안하며 감상에 잠겼다.
타우지히가 50세까지 살았다면 비로소 공평하게 비교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유럽을 여행하다가 29세에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죽어 버리고 나면 결국 남겨진 음악들만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슈베르트처럼 남긴 것이 많으면 모를까, 타우지히처럼 연주에 집중한 피아니스트들은 그런 것도 없다.
조금 더 살았다면 어떤 음악을 할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정말 부질없다는 건 누구보다 종혁이 잘 알았다.
‘리스트보다 더 뛰어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의미 없지.’
괜한 우울한 생각에 잠겼던 종혁은 그를 깨우는 피아노 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적어도 18세의 타우지히는 스승에 뒤지지 않으려고 자신 있게 곡을 쓰고 연주하는 음악가였다.
‘숨길 수도 없을 정도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의 제자가 되었고, 성공 가도에 오른 열여덟 살의 음악이라…….’
그 투명하고 순수한 열의가 이 곡에 담겨 있었다.
100년이 더 지나더라도 피아니스트가 이 곡을 연주하는 한 그 화려한 시절의 빛은 영원히 살아 존재할 수 있었다.
때문에 피아니스트가 이 곡을 연주하며 끌어내야 하는 것은 단지 제목과 피상에 드러난 유령선뿐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위대한 대가의 그림자였다.
세연은 그 그림자의 편린이나마 손에 잡은 듯했다.
그녀는 타우지히의 실력과 집념을 받아들이고 그의 시점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렇게 완성된 음악은 당연히 수준이 다르다.
「…….」
다시 한번 세연의 손이 날아올랐다. 선장의 지시에 맞춰 인간 아닌 선원들이 노래를 부르고 유령선은 밤하늘로 둥실 떠오른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유령선은 더더욱 크게 보였다.
이 곡은 가장 강한 포르티시시모부터 가장 약한 피아니시시모까지 엄청난 너비의 다이나믹을 넘나들고 있었다.
그것을 다루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유령선의 이미지 역시 풍선처럼 키웠다 줄였다 하기 마련일 텐데, 세연이 그리는 이미지는 전혀 그런 변화 없이 일정했다.
종혁은 큰 움직임 없이 정갈하게 곡을 연주하는 세연의 모습을 보면서 분명히 박 교수의 제자가 틀림없음을 새삼 느꼈다.
음악에 정말 모든 신경을 쏟아부으며 심지어 무의식적인 행동마저 통제하는 극단적인 집중력, 거기에 지치지 않고 빠른 손과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는 귀까지.
분명 세연이 타고난 덕분이기도 할 테지만, 박 교수의 트레이닝은 그녀를 더더욱 완전한 피아니스트로 거듭나게 해 주었다.
밤하늘과 달빛 그리고 유령선이 그리는 장엄한 발라드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천천히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맑아졌다.
먼 바다에선 어느샌가 유령선이 여유롭게 나아 가고 있었다.
바다에도 하늘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나아 가는 유령선은 단지 소리로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신비로운 경외감을 느끼며 종혁은 세연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양손 옥타브로 행하는 아르페지오가 마지막으로 배의 모습을 그리고, 희미해지다가 빛을 발했다.
「잘했어!」
종혁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장에서도 엄청난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세연에게 쏟아졌다.
그 폭발적인 열기는 적어도 오늘 있었던 다른 그 어떤 연주자에게 향했던 것보다 강렬했다.
세연은 정말 매력적인 피아니스트였다. 아마 심사 위원들도 그것을 지금 분명하게 알아보고 다음 라운드로 올릴 것이다.
종혁은 그런 확신을 가지며 기쁜 마음으로 교수에게 말했다.
「완벽하지 않았습니까, 교수님?」
「……너무 훌륭하군.」
점잖게 있던 박 교수는 짧게 박수를 보내며 세연을 칭찬했다. 정말 놀란 박 교수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임을 종혁은 알아챘다.
세연이 너무 자랑스럽고 뿌듯한 종혁은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 곡은 레슨을 그리 안 봐주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자유곡은 자유곡으로 맡기고 싶었으니까.」
직접적으로 콩쿠르 준비에 끼어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종혁은 세연이 어떻게 준비하는지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박 교수는 세연이 다른 독주곡들을 잘 준비했다는 것을 알고 협주곡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데에 많은 애를 썼다.
특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선 이 협주의 난이도가 굉장히 높다. 어설픈 피아니스트들은 그대로 무너져버릴 정도다.
때문에 박 교수는 거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노력이 무의미해질 것 같진 않았다. 세연이 독주곡을 잘 연주한 덕분이었다.
「놀랍군, 놀라워.」
「한 잔 더 하시죠?」
종혁은 기쁜 마음으로 술을 권했고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정말 취해 쓰러질 때까지 마시고 내일 하루 종일 자더라도 기분 좋을 것 같았다. 종혁은 싱글벙글 웃으며 술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괜히 이렇게 호들갑 떨어서 제대로 안 된 일도 정말 많았다는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런 불안감은 음악가들에겐 고질병이나 다름없었다.
「아, 근데 지금 이렇게 축배를 들기엔 너무 이른…….」
「그냥 따르게.」
하지만 박 교수는 단호했다. 세상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그는 짤막하게 덧붙였다.
「세연이 준결승에 간다는 것에 내 아파트를 걸지.」
「…….」
그냥 명예직을 걸거나 돈 같은 것을 거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를 걸겠다고 하니 뭔가 현실적으로 확 와닿았다.
그리고 그만큼 박 교수가 지금 세연의 실력을 인정하고 보증하는 것이 느껴졌다.
종혁은 킥킥거리며 술잔을 마저 채우곤 말했다.
「만약 세연이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면 당장 브뤼셀로 날아가서 심사 위원들 멱살이라도 잡으실 것 같은데요?」
「멱살뿐이겠나?」
그날 벨기에 뉴스에 나더라도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종혁은 웃으며 교수와 다시 건배를 나누었다.
그런데 술잔을 기울이던 교수는 갑자기 손을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고 무대를 비추는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침묵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박 교수가 술잔을 탁 내려놓으며 그를 불렀다.
「종혁 군.」
「예, 교수님.」
「브뤼셀에 가야겠네.」
「예?」
종혁은 새벽 3시 반이라는 것도 잊고 크게 소리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경악한 표정으로 종혁은 박 교수를 바라보았다.
심사를 똑바로 안 하면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한 그가 갑자기 벨기에로 가겠다고 하니 별생각이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래도 가서 직접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일세.」
「이제 와서요? 취하셨어요?」
세연에게 당장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뜬금없었다.
차라리 며칠 전에 같이 갔더라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정작 기회가 있었을 때 박 교수는 다른 제자들인 이연주와 양지은에게 세연을 부탁했을 뿐, 같이 간다는 건 아예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였었다.
그래서 보낼 때도 그렇게 담담하게 보냈으면서, 이제 와 뒤늦게 태도가 바뀐 걸 이해하기 어려웠다.
물론 거기엔 세연의 음악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취해서 고양된 기분에 제자인 세연이 큰 무대에서 성공적으로 잘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직접 가서 칭찬하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도 인정한다.
당장 종혁도 그런 마음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박 교수는 술이 상당히 센 사람이었다. 깊은 밤이지만 취기나 졸음 그 무엇도 박 교수의 판단력을 저해하지 못했다.
「내가 취한 것처럼 보이나?」
전혀 그렇게 안 보였다. 하지만 종혁은 일단 이 상황을 농담으로 넘기고 싶었기에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그런 말씀 하는 분 치고 안 취한 사람 없어요. 교수님, 일단 주무시고 차분하게 생각하시죠.」
「허헛. 참.」
종혁의 능청스러움에 박 교수는 껄껄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어색하게 흩어져 내렸다.
현역 때와 다름없이 날카로운 시선이 종혁에게 향했다. 종혁은 약간의 PTSD를 느끼며 얼어붙었다.
박 교수는 평소 인자한 성격이지만 진지할 땐 무서운 사람이기도 했다.
「많이 컸군? 종혁 군. 날 취한 노인네 취급하기도 하고.」
「아, 아, 아뇨, 교수님 오해입니다. 제가 무슨…….」
「아무튼 난 결정했으니 그리 알게.」
도저히 다른 말이 통하지 않는다. 박 교수가 이렇게 한번 정한 일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종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연이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박 교수가 브뤼셀에 간다고 해도 세연에게 좋으면 좋았지 나쁜 일은 없을 것이다.
종혁은 자신의 스케줄도 머릿속으로 잠시 떠올려 보고는 박 교수에게 말했다.
「제가 같이 가 드릴까요?」
「보호자라도 하겠다고? 진짜 많이 컸…….」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냥 신경 끄는 게 나을 것 같다.
종혁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술잔을 홀짝거렸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사모님은 걱정스러워하실 것 같긴 했다.
대체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브뤼셀행을 결정한 것이냐고 사모님이 묻는다면 무어라 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힐끔 보니 박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세연의 차례가 끝났지만 잘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십여 분쯤 지났을 때였다.
박 교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스마트폰을 쥐고 있던 그는 그 벨이 미처 한 번 다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도 쨍쨍하게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세연이 말했다.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교수는 그간 한 번도 못 봤던 함박웃음과 함께 제자의 부름에 응했다.
「하하하하, 세연아.」
그 모습을 보던 종혁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다시 술을 따랐다.
「취하신 것 맞네 뭘…….」
하지만 취기가 올라온 건 종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 자기에게도 전화를 바꿔 달라고 해야 할지 타이밍을 재면서 종혁은 교수와 세연이 나누는 대화에 집중했다.
***
박수를 받으며 세연이 무대 뒤로 빠져나가는 것까지 바라보며 난 생각에 잠겼다.
세연이 카를 타우지히의 유령선을 자유곡으로 고른 것을 보고 난 그녀가 한번 화려하게 날뛰어 볼 작정으로 선곡했다고 짐작했다.
이 곡은 타우지히의 스승인 리스트에게 영향을 받아 퍼포먼스적인 면이 많이 드러나는 곡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연의 의도는 곡 자체에만 있지 않았다.
그저 즐기려는 의도였다면 평소 그랬던 것처럼 온몸을 이용하여 피아노에 몰입했을 것이다.
바로 직전 리게티의 에튀드를 연주할 때까지만 해도 세연은 자연스럽게 좌우로 리듬을 타며 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우지히의 곡을 연주할 때, 세연의 움직임은 굉장히 줄어들어 있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이 더 어려울 텐데 그럼에도 세연의 태도는 올곧았다.
그녀가 상당히 진지하게 타우지히를 공부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공부 방식은 내가 하는 것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
세연은 이 음악으로 세계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했고, 동시에 내겐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내 바로 뒤까지 쫓아왔다는 의미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선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대충 카디건을 집어 걸치고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빅토르.”
-예, 아가씨.
“늦은 밤 미안해요. 잠깐 움직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차량을 대기시킬까요?
“부탁드려요.”
느닷없는 전화에도 빅토르는 이유도 묻지 않았다. 난 전화를 끊고 나서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머리칼을 두어 번 빗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