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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17화 (1,117/1,277)

##  1117화

대기실로 돌아온 세연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가슴을 부여잡고 잠시 서 있었다.

옆에 있던 직원이 걱정하며 괜찮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세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무대를 망쳤다면 되레 담담했을 것 같다. 아마 냉철하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분석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 세연의 머릿속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환한 조명과 카메라 렌즈들, 청중들의 환호성과 박수…….

그 엄청난 에너지가 집중되는 한가운데에 바로 세연이 있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는 건 너무 흥분해서였다.

‘마지막에 실수할 뻔했어…….’

연주가 끝나기 30초 정도 전부터 세연은 스스로를 컨트롤하기 어려워짐을 느꼈다. 이 무대의 끝이 어떻게 될지 예상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까스로 감정을 다스리며 연주를 마치고 난 뒤, 지금은 그저 만족스러운 기분뿐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세연은 500ml짜리 물통 절반을 비워 버리고는 고개를 들고 직원에게 이제 괜찮아졌다고 알렸다.

그리고 안내에 따라 소지품들을 챙기고는 복도로 나왔다.

「…….」

복도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이 시간에 플라지 빌딩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 다 콩쿠르 청중들이었고, 다들 홀 안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혼자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여전히 세연은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지금 이 기분을 다른 누군가에게 마구 이야기하고 싶은데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변을 돌아보던 세연은 반쯤 습관적으로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찾아서 전원을 켰다.

스마트폰을 켜자마자 메시지가 마구 날아들었다.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다.

특히 한국에서 온 메시지들은 새벽 3시까지 기다린 사람들이니 정말 고마웠다. 그중에서도 몇몇 사람은 세연에게 아주 특별했다.

그녀는 메시지 목록을 쭉 훑다가 그중 하나를 눌러 곧장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자마자 바로 상대가 전화를 받았고, 세연은 그야말로 참고 있던 모든 감정을 쏟아 내듯 소리쳤다.

「교수님!!!」

-「하하하하, 세연아.」

인자한 웃음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조금 더 충족시켜 주었다. 세연은 기쁜 마음으로 말했다.

「지금 교수님에게 제일 먼저 전화드리는 거예요!」

왜 많은 사람 중 박 교수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세연은 설명하려 했다.

물론 기본적인 이유는 박 교수가 그녀의 음악 선생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 세연은 그런 관계성에 얽매여서 전화를 한 것이 아니었다.

「저, 저 진짜로…….」

-「차분히 천천히 말해 보련? 다 들어 줄 테니.」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요!」

미칠 것 같이 흥분되는 마음을 왜 박 교수에게 납득시키려고 하는지 설명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가뜩이나 머리가 어지러워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이,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말 이게 현실인지 믿기지가 않는…….」

-「계속 연습하면서 머릿속으로만 해 왔던 상상이 현실이 된 기분이니?」

「!!!」

마치 마음속을 읽은 것 같은 말에 세연은 그 자리에서 그야말로 펄쩍 뛰며 동의했다.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하하. 그래, 그랬었구나.」

「아…… 교수님에게 먼저 연락드리길 정말 잘했어요. 교수님이라면 지금 제 기분을 이해해 주실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말로 정리가 되고 나서야 세연은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 등을 자각할 수 있었다.

동시에 조금 더 마음이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세연은 박 교수에게 너무 들뜬 모습을 보여 준 것이 살짝 부끄럽긴 했지만, 조금 더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무대에 나갈 때 어떻게 걸을지, 인사는 어떻게 할지, 연주는 어떻게 할지…… 엄청나게 생각하고 상상했어요. 그런데 머릿속 상상보다 현실은 훨씬 더 선명하고 만족스러웠어요.」

그전에 섰던 무대들에선 상상대로 되면 그나마 다행이었기 때문에 세연은 지금 같은 기분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는데, 지금까지 이 정도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항상 아쉽고, 후회되고……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훨씬 많았거든요.」

-「그래. 그리고 난 네게 그런 감정을 원동력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가르쳤었지.」

「그런데 이번엔 전혀 아쉽지 않았어요.」

마음 같아선 이게 당분간 마지막 무대여도 상관없을 것 같을 정도였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던 세연은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이제 겨우 첫 무대가 끝났을 뿐인데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너무 오만방자한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후회가 없으면 발전도 없을지도 모른다. 덜컥 겁이 난 세연은 박 교수에게 물었다.

「헉, 피아니스트로서 이러면 안 되는 건가요?」

-「하하하, 아니.」

박 교수는 껄껄 웃더니 세연을 안심시켜 주었다.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이 곧 발전의 동력이 될 테니 그런 감정을 적당히 가지는 건 중요하겠지. 하지만 말이다 세연아.」

「네?」

-「너도 나도, 우리는 결국 사람이지 않겠니?」

그 말에 세연은 조금 당황했다. 그녀는 박 교수가 피아니스트로서 갖춰야 할 자세 등에 대하여 다시 한번 가르쳐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박 교수의 말은 세연의 예상과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 교수는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무대에서 연주를 할 때마다 항상 불만족스러운 기분만 느낀다면 무슨 재미로 피아니스트를 하겠니?」

「재, 재미요?」

-「그래.」

세연은 멍하니 박 교수가 하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 연주한 음악에 너무나 흡족해하고, 청중들의 찬사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버리는 기분도 느껴 보고, 정말 내가 한 일이 맞는가 믿기지가 않아서 거울을 보며 방방 뛰어 보기도 해야 다음에도 또 무대에 서고픈 마음이 드는 법이지.」

「방방 뛰어요? 교수님도 그러신 적이 있어요?」

-「아니……. 네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냐는 말이란다…….」

박 교수는 황당해하며 중얼거리더니 다시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지금 그 기분을 소중히 여기고 그 또한 네 에너지로 삼길 바라마. 그런 환희는 평생에 걸쳐 몇 번 느끼기 어렵단다.」

무대에서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세연은 자신에게 그런 즐거움을 느낄 재능이 허락되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박 교수의 말을 빌어 다시 생각해 보면, 세연은 조금 전 무대를 즐겼음이 분명했다.

폰을 쥔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세연은 이해했다.

「환희라는 말이 정확한 것 같아요……. 역시 교수님이세요.」

-「교수 하려면 말도 잘해야 하거든.」

「아하하하.」

다시금 가슴이 벅차오르는 행복을 느끼며 세연은 솔직하게 생각하는 바를 박 교수에게 이야기했다.

「그치만 저는요, 제가 느낀 이 기분을 단어가 되기 전에 그대로 교수님에게 제일 먼저 전해 드릴 수 있었던 것 같아서 더 기뻐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박 교수는 다시 세연에게 무어라 칭찬을 해 주려다가 머뭇거리더니 세연의 말을 받아 말했다.

-「그래, 부모님에게도 전화하려무나.」

「예! 그럴게요!」

세연은 박 교수가 쑥스러워한다고 생각하며 산뜻하게 전화를 끊었다. 이미 한국은 새벽이 깊다. 그러니 이만 주무시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친김에 세연은 집에도 전화를 걸었다.

결과는 안 나왔지만 이미 연주 자체로 너무 만족스럽다고 전하니 그녀의 어머니는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다며 기뻐해 주었다.

세연은 그 믿음 가득한 반응이 너무 좋았다.

다음은 벨기에의 엄마라고 할 수 있는 멜리아 아주머니의 차례였다. 세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청중석에서 연주를 보고 나서 세연이 끝남과 동시에 같이 나오겠다고 했으니 홀 밖에 있을 게 분명했다.

전화를 걸어 볼까 했지만 그보다는 직접 찾고 싶은 마음에 세연은 발걸음을 옮겼고, 몇 걸음 가지 않아 우뚝 멈춰섰다.

「어, 어!? 타티아나!」

그곳엔 상상도 못 했던 친구가 서 있었다.

긴 치마에 카디건을 걸친 타티아나는 마치 마법사처럼 로비로 향하는 길 옆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세연.}

세연을 발견한 타티아나가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세연은 거의 뛰듯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보러 온다는 말 없었잖아!? 메시지만 해서 난 네가 오지 않는 줄…….}

{미안하지만 홀에서 보진 못했어요.}

참가자들에겐 따로 티켓이 주어지지 않기에 홀에서 보는 건 불가능하다.

타티아나는 정말 애석하다는 듯 웃더니 한 손을 들어 눈앞에 선을 쓱 그으며 말했다.

{하지만 영상으로 보고 나서 생각해 보니…… 차로 15분이면 닿는 거리라는 게 떠오르더라고요.}

{15분? 내 무대 다 보고 차 타고 온 거야?}

{예. 그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멋진 연주를 보고도 전화나 메시지밖에 못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

세연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타티아나는 움찔했지만 물러서거나 밀쳐 내지 않고 얌전히 세연에게 안겨 주었다.

세연은 무대에서 상상이 현실이 된 것만큼이나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그녀가 칭찬을 받고 싶었던 가장 특별한 사람 중 하나였다.

{너무 고마워.}

{이렇게 기뻐하실 줄은 몰랐네요.}

{왜 안 기쁘겠어! 난 네 칭찬을 받고 싶었다고!}

오늘만은 괜찮겠단 생각이 든 탓인지 자기도 모르게 솔직한 말이 튀어나왔다.

{칭찬이야 당연히…….}

{마지막 곡 어땠어?}

{마지막…… 카를 타우지히의 곡 말씀이신가요?}

{응.}

앞의 세 곡은 콩쿠르에서 지정한 곡들이었으므로 기량을 보이는 데에 신경을 썼지만, 마지막 곡은 타티아나를 부르기 위한 곡이었다.

세연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출전하며 타티아나를 노리고 있다고 말했던 건 그냥 기분에 따라 농담 삼아 했던 말이 아니었다.

여전히 격차는 있다고 느끼지만, 세연은 진지하게 이 콩쿠르에서 그녀와 동등한 눈높이로 설 수 있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그걸 보증해 주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타티아나였다.

심지어 타티아나는 세연이 자기 자신을 믿는 것보다 더 믿어 주는 것 같을 때가 많았다. 그 믿음에 힘입어 세연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세연에게 안겨 있던 타티아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제가 그 곡을 연주했다면 아마 세연처럼 연주했을 거예요.}

{역시!}

{어…… 대답했으니까 이만 놔주시면 안 될까요?}

{싫어!}

세연의 부름에 타티아나가 직접 왔고, 심지어 가장 원하던 말까지 해 주었다. 세연은 이 현실을 놓고 싶지 않아서 팔에 더 힘을 주었다.

하지만 힘을 더 주면 타티아나가 아파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 조금만 욕심대로 만끽한 후에 세연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타티아나는 살짝 떨어진 곳에서 곤란하다는 듯한 미소로 세연을 바라보았다.

세연은 다시 차오르는 기묘한 충족감을 느끼며 빠르게 이야기했다.

{사실 있잖아…… 네가 먼저 말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 그 곡 연습하면서 너라면 어떻게 쳤을까 생각했었거든.}

{……그런가요.}

{아니, 들어 봐. 타우지히는 원래 연주 스타일이 담백하기로 유명했었대. 그렇게 스펙터클한 곡을 연주하면서도 말이야. 그런데 그런 일화를 들어도 실제로 어땠는진 알 수가 없잖아? 상상하기도 어렵고.}

{150년 전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비슷한 스타일의 사람이 한 명 생각나더라고.}

{아.}

타티아나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세연은 격렬한 연주에 과한 몸짓이 동반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도 할 수 있다는 걸 안 순간, 세연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설명에 타티아나는 납득한 듯 보였다. 세연은 왜 카를 타우지히를 골랐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

무표정한 얼굴의 타티아나를 보며 세연은 살짝 두려워졌다.

스타일이 생각나서 참고해 봤다는 말을 듣고 타티아나가 혹시 기분 나빠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친구이긴 하지만 사실 그렇게 깔끔하게 설명되는 사이가 아니었고, 심지어 지금은 같은 콩쿠르에 참가한 경쟁자이기도 했다.

세연은 지금 약간 선을 넘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내 타티아나는 천사처럼 웃으며 고개를 늘어뜨렸다.

{후후, 그래서 제가 그 음악에 불려 왔나 봐요.}

타티아나는 너무 잘 알아준다.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주는 신처럼, 진심으로 대하면 전부 알아준다.

{타티아나…… 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세연은 타티아나를 정말 좋아하고 존경했다. 그건 단순히 실력이 좋거나 예쁘고 착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부분에서 세연은 타티아나와 이해를 함께하는 부분이 있음을 느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진 알 수 없었다.

세연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폰이 부르르 울었다.

지금 타티아나와 대화 중에 폰 같은 걸 보고 싶진 않았지만 타티아나는 자긴 신경 쓰지 말고 메시지를 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쩔 수 없이 세연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 멜리아 아주머니다.}

{가 보세요.}

타티아나는 옅게 웃으며 카디건 앞자락을 여몄다.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세연이 가는 걸 보겠다는 자세였다.

마치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건 원치 않는다는 듯. 그녀는 쓸데없는 곳에서 묘한 고집이 있다.

하지만 세연은 그 고집을 어떻게 무너뜨려야 하는지 잘 안다.

{같이 가자!}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세연은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끌었다.

타티아나는 물끄러미 세연을 바라보더니 저항하지 않고 그 손길에 따라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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