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18화 (1,118/1,277)

##  1118화

세연은 솔직한 사람이었다.

같은 나이인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게 칭찬을 받고 싶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줄 알았다.

심지어 칭찬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노골적으로 드러내기까지 했다.

그 순수한 욕망과 행동력은 세연이 지닌 연주자로서의 특별함이었다.

그런 특별함은 이 세계에서 강하게 작용한다.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아마 세연같은 순수한 욕망과 마주하는 것에 굉장히 약하리라.

자신의 음악 혹은 말 한마디가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면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세연 같은 연주자는 어디서든 사랑받기 쉬웠다.

‘물론 내 입장에서 보면 더 따질 것도 없고.’

그리고 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음악가보다 더 세연에게 주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세연은 그런 내 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지낸 시간이 많아서일까, 쓸데없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 준 탓일까.

이제 세연은 내가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 많아도 그것을 캐치해서 해내면 내가 기뻐한다는 것도 안다.

이번에 카를 타우지히의 곡을 연주했던 것도 내 연주 스타일을 일부나마 그녀가 재현한다면 내가 기뻐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내가 직접 말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그녀가 어림짐작으로 한 일이기에 내 감정은 상당히 복잡했다.

‘거리가 어느 정도 될까.’

세연이 내 음악을 좋아한다는 건 안다. 바로 내가 그렇게 꼬드겼으니까. 하지만 맹목적으로 날 따르는 건 좋지 않다.

한승우의 때와 같았다. 난 그가 내 음악을 일부나마 재현한 것에 대해 정말 기뻐했지만, 그렇다고 한승우가 잊힐 음악을 계승하길 바라진 않았다. 그에겐 그의 음악이 있으니까.

세연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사사하는 교수님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미리 앞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내가 그 가르침의 실현을 직접 귀에 들려주면서 빠르게 실력을 키울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이런 이기적인 속죄가 허용된다는 것 자체에 난 또다시 죄악감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세연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면 난 만족한다. 그녀가 필요 이상으로 날 흉내 내는 건 바라지 않았다.

다행히 세연은 뛰어난 음악가고, 귀에 넣은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 능하다.

난 그걸 미리 파악했기에 방침을 정했고, 지금까진 잘되고 있으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눈으로 본 것에 현혹되기도 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아이도 자각이 없진 않은 것 같으니…….’

다행히 세연은 이번에 내 연주 태도를 모방했음을 이실직고하고는 내 반응을 살폈다. 반응을 살핀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그녀는 자신의 모방을 내가 리스펙트로 받아들이고 기뻐할 것이라 믿고 무대에 올리긴 했으나, 혹시나 날 업신여긴 것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가지고 있었다.

똑같은 행동이라도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종이 한 장 차이다. 그걸 세연이 알고 있는 한, 계속 고민하면서 자신의 음악을 돌이켜 보고 고찰할 것이다.

고민을 해 준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음악가란 그렇게 스스로를 오래 돌아볼수록 자신밖에 모르게 되는 족속들이니까. 결국 세연은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난 허락을 받았어……. 그러니 나도 허락해 줘야지.’

부드럽게 내 손목을 쥐고 있는 압력을 느끼면서 멍하니 세연을 따라갔다.

오늘 세연이 솔직했던 것만큼 나도 솔직해질 수 있었다. 정말 기뻤다. 그녀의 부름에 불려 왔다고 말한 건 내 진심이었다.

지금 내가 직접 세연을 마주 봐 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녀를 제대로 이해해 주지 못할 것이라는 일념으로 이곳에 왔다.

그리고 세연은 그런 내 생각마저도 여실히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때문에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껴안았다가 지금은 손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원래도 스킨십을 잘하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그 강도가 상당히 세다.

난 세연과 너무 친한 친구가 되길 바라지 않으므로 이런 거리는 너무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기분에 따라 주고 싶었다.

아무리 내가 세연과 상이한 입장에 서서 내 판단을 우선시하고 있다곤 하지만…… 세연을 아끼는 마음만큼은 진실이었다.

적어도 난 내 마음이 세연을 아무렇지도 않게 도구처럼 바라보지 않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자각을 느끼며 무척 안도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건 사람이 가질 만한 마음이었으니까.

{아! 멜리아 아주머니!}

얼마 가지 않아 세연은 호스트 패밀리 아주머니를 찾아냈다. 세연의 지지자인 그녀는 마치 소녀처럼 들뜬 미소와 함께 다가오더니 세연와 포옹했다.

{연주 너무 좋았어요! 세상에! 우리 집에서 파이널리스트가 나오려나?}

{에헤헤.}

애정이 듬뿍 담긴 칭찬에 세연은 기뻐했다. 저렇게 호스트 패밀리와 친밀하게 지내는 걸 보니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웃으며 지켜보고 있자니 곧 아주머니가 내게도 관심을 보내셨다.

{그건 그렇고…… 이분은…….}

{소개드릴게요.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었죠? 제 친구인 타티아나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입니다.}

세연에게 기회를 받아 인사하자 멜리아 아주머니도 반가운 미소를 지으셨다.

{환영 파티 때나 오프닝 영상에 얼굴이 보일 때마다 세연 양이 가르쳐 줘서 그런지 처음 보는 것 같지가 않네요. 반가워요, 베르체노바 양.}

{저도 세연이 호스트 패밀리에 대해 말할 때 들었어요. 너무 친절하신 분이라고 자랑까지 하던걸요.}

{어머, 정말요?}

멜리아 아주머니는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호스트 패밀리에게 있어선 맡고 있는 연주자가 편안하게 마음을 놓고 지낸다는 것만큼 좋은 말이 없는 듯했다.

그렇게 멀리서 온 연주자와 호스트 패밀리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초점이 향하자 멜리아 아주머니는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베르체노바 양의 현지 보호자분은?}

{양해를 구하고 저 혼자 왔어요.}

데보라 아주머니와 파스칼 아저씨에겐 확실히 이야기하고 왔다.

파스칼 아저씨는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하셨지만, 내 사적인 욕심에 어울려 주는 건 빅토르면 충분했다. 적어도 그에겐 내가 마음껏 보답할 수 있으니까.

내 이야기를 듣곤 멜리아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왜 그랬는지 알 것 같긴 하네요. 베르체노바 양은 생각이 깊고 상냥해서 와 준 것이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전 찬사를 보내는 것과 승부욕을 잃지 않는 것이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맞는 말이긴 하죠.}

사실 양립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균형을 맞춰야 하는 부분이었다. 좋은 연주엔 합당한 찬사가 잇따르는 게 옳다.

내 정론을 납득하면서도 아주머니는 그건 음악가들의 입장이라는 듯 웃었다.

{하지만 이미 저만 해도 꽤 몰입해서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모두 경쟁자로만 보인다니까요? 우리 집 애만 잘되었으면 좋겠고 말이죠.}

솔직하면서도 애정이 느껴지는 말이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전 그 또한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어 주세요.}

{두 사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세연이 부끄럽다는 듯 그만하라고 훼방을 놓긴 했지만 이미 난 멜리아 아주머니와 이야기가 꽤 잘 통한다는 걸 느낀 후였다.

우린 조금 더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사무실로 향하는 복도 옆의 벤치였다. 홀이 있는 방향에서부터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우린 작은 목소리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한창 이야기를 하던 중 내 스마트폰이 울렸다.

{잠시만요, 전화가……. 아나스타샤네요.}

{아, 진짜? 편하게 받아, 타티아나.}

세연은 은근한 기대를 품은 눈빛으로 내게 종용했다.

나 역시 지금 아나스타샤의 전화가 그녀나 나에 대한 용건이진 않을 거란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세연의 일이겠지.

그렇다면 타이밍이 참 좋았다. 난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아나스타샤.”

-“안녕.”

아나스타샤는 산뜻하게 인사하더니 내 상황을 물었다.

-“연습 중이니?”

“아뇨.”

-“그럼 잠깐 이야기해도 될까? 콩쿠르 첫날 감상을 지금쯤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세연의 연주를 보셨군요.”

-“응. 너도 봤지?”

“예. 그래서 지금…….”

난 옆자리에 앉은 세연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물론이고 멜리아 아주머니도 귀를 쫑긋 세우고 이쪽에 집중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 러시아어를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있는 그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 와 있어요.”

-옆에? 플라지에 갔다고?

아나스타샤는 깜짝 놀랐는지 크게 물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의 예리함과 똑똑한 부분은 곧바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너도 느끼고 간 거구나.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한 아나스타샤가 본론을 이야기했다.

혹시나 세연이라든지 피아노라든지 러시아어를 몰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경계하며 우리만 알 수 있는 대화를 이어 나간다.

“연주 말인가요?”

-응. 그 애의 그거…… 네가 직접 가르쳐 준 적은 없지?

“없어요. 전혀.”

간접적으론 연관되어 있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일단 난 한 번도 직접 세연을 가르치려 든 적은 없었다. 모두 그녀가 자신의 귀와 눈으로 가져갔을 뿐이다.

아나스타샤는 어느 정도 우리 관계를 알고 있었다. 아마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세연의 연주를 듣고 눈물을 보였을 때부터 아나스타샤는 눈치챘을 것이다.

그 후로 내가 세연에게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을 때도 아나스타샤는 단 한 번도 내게 필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나스타샤는 그저 감상만을 전했다.

-대단한 애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나스타샤가 이 타이밍에 전화를 한 이유는 뻔했다. 세연의 연주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한 것이다.

그래서 난 어려운 감정들을 숨기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세연의 연주에선 리스펙트가 보였고, 난 그걸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아나스타샤는 조금 느긋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 들어 보니 내가 더 참견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 알겠어.

“후후, 참견하려 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냥…… 걱정이 좀 되어서.

지금 내가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것에 대해 아나스타샤는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한 판단을 무시하지 않고 지지해 주었다.

그렇다면 난 기쁘게 주제를 바꿔 볼 참이었다.

“저야말로 아나스타샤가 걱정이에요.”

-나?

아나스타샤는 멈칫하더니 작게 이야기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마. 네가 그러면 안 돼. 난 알아서 잘하…….

“며칠 후에 생일이시잖아요? 그런데 무대에 서기 전날이니까…….”

-응?

난데없이 무슨 말이냐는 듯 그녀가 물었다. 나야말로 왜 황당하다는 듯한 물음이 날아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5월 14일. 맞잖아요?”

-어…… 맞아, 맞긴 한데…… 그냥 넘기기로 했던 것 아니었니?

“그냥 넘겨요? 누구 마음대로요?”

-내 생일이니까…… 내 마음대로?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이야기했을 땐 콩쿠르 자체에 집중하기 위해 중간에 끼어 있는 아나스타샤의 생일에 대해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흐지부지 넘겨 버리자는 의미는 아니었다.

성대하게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할 순 없다고 하더라도 식사를 같이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난 이참에 아예 다른 말이 나오지 않도록 확실하게 못 박아 버렸다.

{세연, 14일에 아나스타샤의 생일인데…… 그날 혹시 같이 식사라도 가능할까요?}

{어? 아, 맞아. 그랬었지?}

일부러 들으란 듯이 크게 이야기하자 전화 건너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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