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19화 (1,119/1,277)

##  1119화

예전에 에르네스트도 스위스 연주회 일정 때문에 생일을 넘겼던 적이 있다.

물론 그다음에 다시 작게나마 파티를 해 주긴 했지만. 지금 아나스타샤 역시 에르네스트와 마찬가지로 콩쿠르를 우선시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일단 연주자의 입장을 존중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난 거기에 반대하지 않는다. 생일은 매년 있지만 콩쿠르는 그렇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밥은 먹어야 하고, 잠도 자야 한다. 그럼 밥 먹는 시간 정도는 같이해도 괜찮지 않냐는 게 내 생각이다.

20분이면 해결될 식사 시간을 1시간 넘게 끌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이 이상 나도 할 말이 없지만, 컨디션 관리 측면이나 정신적인 부분을 놓고 보면 생일날 친구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 건 손해 볼 일이 아니다.

아나스타샤도 그 정도는 이해했는지 잠시 생각하더니 빠르게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선 알려 주었다.

-{알았어 그럼 그날 점심 같이 먹자. 어떠니?}

{좋아요.}

-{일정은…… 내가 준비한 다음에 다시 알려 주도록 할게.}

결정을 내리고 나자 이야기 진행은 빨랐다.

임시적으로나마 이렇게 초대를 받고 나니 나 역시 여러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일단 지금 전화를 끊고 나면 세연과 함께 아나스타샤의 생일 선물이라도 사러 같이 나가자고 제안해 볼까 싶었다.

그런데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아나스타샤가 딱 잘라 말했다.

-{아, 대신 선물 같은 건 절대 가지고 오지 마. 진짜 밥만 먹을 거니까.}

{생일 파티에 선물이 빠지면 되나요?}

-{파티라고 할 정도로 하지 않을 거라니까? 그리고 갑자기 이런 외지에서 물건을 구한다고 해도 기념품 같은 게 전부일 텐데……. 됐어. 그러지 마.}

아나스타샤의 절충안은 쿨했다.

내가 생일을 축하해 줄 자리를 바라고 있으니 밥은 같이 먹되, 그 이상으로 시간을 쓰거나 고민할 힘은 아끼라는 의미였다.

{음…….}

-{그대로 세연 임한테도 전해 줘. 안 전하면 전부 없던 걸로 할 거야.}

{아무리 그래도 아쉬운데요.}

-{그냥 하지 말…….}

{아뇨! 알겠어요!}

지금 내가 살짝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면 아나스타샤가 바로 모든 걸 취소해 버릴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본인이 원치 않는 생일 파티를 내가 억지로 여는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조건에 맞춰 주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세연에게도 그대로 알렸더니 그녀 역시 아쉬워했다.

{빈손으로 가서 밥만 같이 먹는 거야?}

{아마 그런 걸 바라는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15일에 무대에 서야 하는 나와 달리 세연은 이미 자신의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러니 시간을 조금 더 내서 아나스타샤의 생일 선물을 고르더라도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나와 세연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딱히 말로 서로의 생각을 전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무슨 생각인지 뻔히 느껴졌다.

서프라이즈 선물이 그리 이상한 건 아닐 테니까. 세연은 분명히 무언가 준비해 올 작정이었다.

난 모른 척하며 다시 전화를 잡았다.

{세연에게도 말했어요. 그럼…… 저희 셋만 보는 건가요?}

-{그게 낫지 않겠니?}

레티시아나 이연주, 양지은과 같이 저번에 새로 사귄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엔 짧게 점심 식사로 프라이빗한 생일 축하를 겸할 예정이니 친한 사람들만 초대하려는 모양이다.

아마 내가 아나스타샤의 입장이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 같아서 그 부분은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알겠어요.}

-{그럼…… 나중에 또 연락할게.}

아나스타샤는 슬슬 용건이 정리되었다는 듯 전화를 끊으려고 하다가 문득 생각났는지 덧붙였다.

-{내 생일 기억해 줘서 고마워, 타티아나.}

{설마 제가 잊어버리겠어요? 콩쿠르 준비로 일정 알아볼 때부터 제 스케줄엔 아나스타샤의 생일이 적혀 있었어요.}

{그게 고맙다는 거야.}

전화 너머로 밝게 웃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끊어졌다. 난 안도하며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멜리아 아주머니는 약간 관심이 있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일단 아나스타샤가 누군지부터 설명해 드려야 하나 고민해야만 했다.

***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첫날 무대가 성황리에 끝나고. 다음 날 아침, 온 매스컴에서 콩쿠르 내용을 다루었다.

첫날의 12명 모두 각자 엄청난 특색을 보이며 선전하고 있었지만 역시 내 눈에 가장 많이 들어온 건 세연의 이야기들이었다.

한국에서 온 열일곱 살의 연주자는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특히 세연은 조금 앳되어 보이는 외모인데, 바로 그녀 다음에 올라온 연주자가 스물아홉 살에 키가 190cm에 가까운 남성 연주자라서 엄청나게 대비되어 보였다.

언론은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놓고 비교당하면서도 세연은 카를 타우지히의 유령선 같은 강렬한 곡을 연주했기 때문에 더더욱 돋보일 수 있었다.

그녀의 연주 장면이 뉴스에 몇 번이나 나오는 것을 보며 난 만족감을 느꼈다.

‘누가 보더라도 좋은 연주였으니까.’

단순히 음량이 크고 화려한 연주여서 좋았던 것이 아니다. 세연은 작곡가와 음악 전반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해 왔고, 그것을 무대 위에서 자신 있게 선보였다.

그 연구가 학술적으로 완벽할 필요는 없었다.

자체적으로나마 정합성이 갖추어진 음악은 보다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들리고,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 음악가들은 비현실을 현실로 이끌어 내는 것에 능하다. 잊힌 것들을 되살리고 없어진 것들을 복구하며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충동을 깨운다.

그 근본적인 부분에서 세연은 음악가의 역할을 잘 해냈다.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만했다.

‘세연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다음으로 오늘 또 12명의 연주자가 무대에 선다. 그중엔 내가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번에 프랑스에서 만났던 루이 디아라도 있었고, 이연주도 오늘 아침 세션에서 두 번째로 무대에 서야만 했다. 김진우도 아는 이름이었다.

이 세상은 참 좁고, 명성 있는 산은 정말 몇 개 안 된다. 높은 산꼭대기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한정되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산에 오르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난 기억을 이중으로 가지고 있어서 과거 일들에 대해 약간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잘 적응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이름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사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할 뿐이었다.

“…….”

그런 기대 속에서 오전 세션을 지켜보았고, 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몇 년 사이 아무런 발전도 없었다면 아마 상당히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는 연주자들은 모두 과거 음악을 완전히 덮어씌워 버릴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음악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걸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기뻤다.

‘이런 곳에서 다시 볼 수 있다는 건 기적이겠지.’

더욱 깊은 관계성을 추구할 필요까지 느끼진 않았다. 그저 이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기적적이었고, 난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정말 많이 안정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보다 느긋한 기분으로 콩쿠르 진행 상황을 지켜보다가 스마트폰을 끄고는 피아노 건반을 짚었다.

좋은 걸 많이 봤으니 나 역시 좋은 걸 보여 주려면 마무리 연습을 잘해야만 했다.

***

콩쿠르 셋째 날.

오늘 참가자들 중에선 파이널리스트 후보로 거론되는 연주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일단 러시아에서 온 세 명의 연주자들. 세르게이, 니키타, 렌스키가 거의 세트로 묶여서 계속 언론에 비춰졌다.

세 사람 모두 이미 프로 반열에 들어 여러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엄청난 기대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 외에도 호주의 케빈 도너번, 중국의 장 레이, 한국의 박경민 그리고 양지은도 상당히 조명되었다.

물론 그런 유망주들이 항상 기계처럼 모든 곳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이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많이 당황한 것 같은데…….’

콩쿠르 측은 오전 세션에 무대에 오른 연주자 니키타에게 현대 에튀드 두 개를 요구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마 니키타에겐 예상외였던 것 같다.

죄르지 리게티의 에튀드 4번은 그래도 문제없이 꽤 잘 해냈는데, 그다음 올리비에 메시앙의 에튀드 1번에서 문제가 생겼다.

불협화음을 어떻게 음악으로 잘 조화시키느냐가 중요한 곡이고, 기본적으로 연주자는 자신이 일으키는 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짓말이라도 진실로 믿게 할 수 있는 자신감과 정합성을 선보여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첫 시작부터 니키타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곡의 첫 시작을 잘 잡지 못한 탓인지 멈칫거리던 음악은 곧 형태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그저 소음으로 일그러졌다.

반사적으로 움직이도록 연습한 손은 그 와중에도 계속 피아노를 연주했고, 간신히 음악을 되살리는 데에 성공하긴 했지만 겨우 2분밖에 안 되는 곡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망치고 말았다.

에튀드 한 곡을 실패한 것에 대한 여파는 다음 곡에도 미쳤다.

니키타가 고른 자유곡은 리스트의 리골레토 페러프레이즈였는데, 정말 어려운 난곡이라서 최고의 컨디션에서 연주해야만 하는 곡이었다.

그는 프로답게 정신을 가다듬고 최선을 다했지만 긴장하고 마음이 급해진 것이 건반에 그대로 묻어 나왔다.

연주가 끝나고 청중들은 그에게 박수를 보냈지만 그 박수 소리엔 감탄보다는 위로가 담겨 있었다.

니키타는 힘없이 웃으며 묵례하고는 무대 뒤로 사라졌다.

‘실수는 순식간이니까…….’

아무리 이름 있는 연주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개인 연주회가 아닌 이런 콩쿠르 무대에선 실수하기 쉬웠다.

심지어 이곳에선 연주 30분 전에 무작위로 에튀드를 골라서 통보하니까 아차 하는 순간 그대로 실수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겨우 24명을 뽑는 경합에서 경쟁자의 실수는 남은 참가자들에겐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난 니키타가 필요 이상으로 상심하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이렇게 예상 못 한 실력을 보여 준 연주자가 있는 반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잘 해낸 사람도 있었다.

내게 있어선 렌스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렌스키 로마노비치…….’

그는 예전에 같이 연주회를 하기 위해 모였다가 이상하리만치 오만한 모습으로 결국 아나스타샤와 대결 후 그만둬 버린 사람이었다.

그는 아마 메세나 협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만, 난 그런 입장을 이해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실력까지 무작정 폄하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오늘 그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연주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연주에 임하는 태도도 정말 진지하고 엄숙해서 보기 좋았다.

다시 대화해 본 적은 없어서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이 콩쿠르에 임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분명 이전과 상당히 달라져 있어서 조금 흥미가 생겼다.

만약 이후에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면 그의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다시 한번 물어볼까 싶었다.

‘다음은 양지은인가.’

보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다. 신선한 기분으로 콩쿠르 영상을 지켜보고 있는데, 세연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생일 선물은 마련했어?]

역시 그녀는 그냥 빈손으로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직요. 약소하게 준비할까 생각중이에요.]

[음…… 난 멜리아 아주머니가 대신 준비해 주신 것이 있어서 이거 가지고 가려고 하거든?]

세연은 나와 같이 생일 선물을 고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멜리아 아주머니의 성의도 무시할 순 없었을 테다.

난 웃으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답장하고는 허리를 폈다.

콩쿠르를 지켜보고 내 연습을 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 아나스타샤의 생일 선물을 준비하러 나가 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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