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20화 (1,120/1,277)

##  1120화

외출하겠다고 빅토르에게 전화를 해 놓고 나갈 채비를 하면서 양지은의 연주를 틀어 놓았다.

그녀가 선택한 고전 소나타는 베토벤의 소나타 6번. 특별한 부제 없이 만들어진 초기 소나타로서 콩쿠르 측에서 요구하는 실력을 선보이기에 좋은 곡이었다.

따뜻하면서도 명랑한 분위기가 듣기에 무척 편안했다. 양지은 역시 내가 아는 음악보다 훨씬 더 발전한 좋은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예전엔 고전에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 같은데…… 적당히 자신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콩쿠르에서 유리할 수 있도록 연구를 많이 해 온 것 같았다.

이어진 에튀드는 프로코피예프의 에튀드 1번.

프로코피예프가 남긴 4곡의 에튀드 중에서 1번은 프렐류드의 성격을 띠고 있으면서도 굉장히 연주하기에 어려운 곡이었다.

그야말로 피아노를 타악기로 여겼던 프로코피예프가 자신이 구상한 다양한 테크닉을 모두 총집합시켜 놓은 듯한 느낌이다.

자연스럽게 올라가기 어려운 옥타브 상승과 2도 아르페지오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연주자에게 엄청난 피로도를 요구하는 곡이었으나 양지은은 조금도 박자를 놓치거나 힘을 빼는 일 없이 깔끔하게 연주했다.

‘요 근래 들어 더 대단해졌어…….’

양지은뿐만 아니라 한국 연주자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음을 느낀다.

원래도 기술적으로 대단한 연주자들이 많았지만 거기에 깊이까지 더해지자 굉장히 강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참가자는 13명. 그중 몇 명이나 다음 준결승에 올라갈 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멀리서 듣고 판단하긴 어려웠지만 사흘간 들어 본 사람들 중에서 임세연과 이연주, 김진우 그리고 지금 연주 중인 양지은은 상당히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

그렇게 옷을 갈아입다 말고 참가자들의 진출 가능성 여부를 생각하고 있던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들고 있던 블라우스를 마저 입었다.

지금 다른 참가자들의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며칠 후면 나도 아나스타샤도 무대에 올라야 한다.

물론 제대로 잘 해낼 자신은 충분히 있지만, 다른 연주를 들으면서 괜히 수준을 가늠하다가 자칫 내게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

하지만 자꾸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일부러 내 귀에 들리지 않도록 꺼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난 스마트폰으로 틀어 놓았던 콩쿠르 실황 중계 창을 껐다. 화면 속 양지은은 막 라우타바라의 에튀드 op.42의 1번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갔다 올까.”

준비를 마치고 나니 오후 5시경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선물 같은 건 사지 말라고 했지만, 세연이 준비했다면 내가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서프라이즈로 선물을 건네준다면 아나스타샤도 결국 어쩔 수 없이 받고 말겠지.

물론 그렇게 하려면 적당히 설득력 있을 만한 선물이어야만 했다. 내 정성이 너무 많이 들어간 느낌이 난다면 아나스타샤도 부담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때문에 난 빨리 나갔다 올 생각이었다. 지금 시간은 꽤 애매했지만 만약 내일로 미룬다면 나도 모르게 더 시간을 본격적으로 쓰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같이 돌아다닐 친구도 없고, 나가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다니면서 아나스타샤의 생일 선물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았다.

편하게 입기에 좋은 긴 스커트와 블라우스 그리고 요즘 자주 입는 카디건을 걸쳤다.

브뤼셀에 오자마자 아나스타샤와 함께 나가서 쇼핑을 했지만 그럼에도 가지고 있는 옷이 한계가 있다 보니 특히 아우터는 몇 종류만 계속 돌려//추가 입는 느낌이었다.

앞으로의 일도 생각하면 나가서 내 옷을 조금 더 사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머, 어디 나가니?”

방 밖으로 나오니 데보라 아주머니가 내 모습을 보고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나스타샤의 생일이 모레라서요. 선물을 사 오려고 해요.”

“생일이 콩쿠르 일정과 겹쳤구나? 파티를 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떻게 하기로 했니?”

“점심 식사만 같이하기로 했어요.”

현실적으로 그 정도가 적당한 절충안이었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잘 결정했다며 웃으며 말씀해 주셨다.

“그것도 제가 이야기하고 나서 정해진 약속이에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더라고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아무것도 안 하면 섭섭하지.”

“맞아요! 제가 여기 없으면 모를까, 이렇게 바로 닿을 곳에 같이 있잖아요?”

그제야 난 내 마음을 다시 조금 돌아볼 수 있었다.

지금 에르네스트와 전혀 연락이 안 되는 것만으로도 난 상당히 삐쳐 있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마저 우리가 무대를 앞두고 있다는 입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친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넘기려고 하자 약간 반발심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아나스타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놓고 나와 거리를 두려고 하기도 했다.

간신히 그 거리를 다시 좁혀 놓았을 뿐이지 사실 근본적인 해결은 아직 먼 이야기이기도 했다. 우린 서로 조심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생일 축하를 직접 해 주지 못하고 건너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심지어 난 세연의 멋진 연주를 축하해 주려고 바로 움직이기까지 했던 사람이다.

난 직접 움직여야 마땅한 사안을 놓고 미적지근하게 굴기 싫었다.

“아무튼…… 다녀올게요.”

“저녁 식사는 하고 오니?”

“아뇨, 음…… 아저씨가 7시쯤 넘어서 오시죠? 저도 그때쯤이면 올 것 같아요.”

“알겠어. 운전은 빅토르 씨가?”

“예.”

“잘 갔다 오렴.”

데보라 아주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빅토르가 미리 차량을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하자마자 나도 바로 준비해서 나온 건데, 그는 어떻게 이렇게 항상 나보다 빠른 건지 신기하기도 하다.

차에 오르자 빅토르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 시간에 혼자서 쇼핑을? 뭘 사시려고요?”

“글쎄요…….”

“……아무 생각 없이 나오신 겁니까?”

“빅토르도 같이 생각해 주세요.”

난 어이없어하는 빅토르에게 사정을 설명했고, 그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유능한 그에게도 어려운 일은 있었다.

“아나스타샤 아가씨의 생일 선물이라……. 그냥 아가씨가 선물한다면 뭐든 좋아하지 않으실까요?”

“그래도 잘 고르고 싶잖아요. 조건을 말씀드릴게요. 일단 너무 비싼 물건이거나 신경 써서 고른 티가 나는 물건이면 안 돼요. 그녀가 하지 말라고 하는 걸 멋대로 하는 거니까 선은 지켜 줘야죠. 그리고 기념품 종류도 안 되고…… 이곳에서 실용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장신구 같은 건 곤란해요. 만에 하나 무대에 차고 올랐다가 방해라도 되면 큰일이니까.”

생각했던 것들을 쭉 읊어 내리자 가만 듣던 빅토르가 피식 웃었다.

“이미 충분히 신경 쓰시는 것 같은데요.”

“당연하죠!”

“그럼 가시는 동안 생각해 보시죠. 일단 백화점으로 모시겠습니다.”

빅토르는 당장 직접적인 도움이 되진 못하지만 방해는 하지 않겠다는 듯 조용히 운전했다. 때문에 난 혼자서 창밖을 바라보며 고민해야만 했다.

세연은 뭘 준비했으려나? 멜리아 아주머니가 대신 준비해 주셨다고 했으니 아마 특별한 물건일 것 같은데……. 물어보지 않는 한 알 방법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물어보면 그녀는 바로 알려 주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당일에 같이 보는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차량은 백화점에 도착했다.

저번에 갔었던 고급 백화점인 갤러리아 인노와 달리 조금 평범해 보이는 곳이었다. 그 와중에 빅토르가 내 조건들을 신경 써 준 것 같았다.

주차장에 차량이 섰고, 내가 내리자 빅토르가 에스코트하며 따라붙었다.

다른 친구들이 있으면 모를까 나 혼자서 백화점을 방황하게 두진 않으려는 것 같았다.

난 그를 돌아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이렇게 데이트하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어허, 큰일 날 말씀을.”

“뭐 어때요.”

빅토르는 괜히 인상을 쓰며 딱 잘라 말했지만, 난 데이트에 특별한 의미를 많이 싣지 않는다면 별문제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힘들어할 때 그가 먼저 나가자고 한 적도 있었고.

작년 여름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난 무거운 직책과 갑작스런 사건이 겹쳐 정신적으로 상당히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었다. 그때도 날 케어해 주었던 건 빅토르였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참 빠르네요…….”

벌써 그게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뭔가 기이한 기분이 든다.

난 그때 세연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도 똑바로 정하지 못했었고, 교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금도 마음이 편하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 복잡한 상황에서도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정신적 한계를 또 한 번 이겨 낸 것이 그대로 내 성장으로 이어진 덕분이었다.

교수님과 인연이 있는 이연주나 양지은을 만나서도 한 번도 이상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의연하게 잘 대할 수 있었던 것도 과거의 모든 일들이 하나씩 모여 날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계속 내 옆에 있어 주었던 빅토르에겐 감사할 따름이다.

특히 이렇게 갑자기 나가자고 해도 아무 불평 없이 따라와 주는 건 그밖에 없었다.

이참에 그에게 감사 표시를 조금 해 볼까 싶다.

“빅토르도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고르세요. 사 드릴게요.”

“무슨……. 괜찮습니다.”

“사양하지 마시고요. 저 돈 많아요.”

아버지가 주신 카드가 아니라 진짜로 내가 쓸 수 있는 돈도 이제 상당하다.

일부러 잘난 척하며 어깨를 폈더니 빅토르는 피식 웃으며 그럼 부탁하겠다는 듯 작게 이야기했다.

“저 그러면 새로 나온 게임기를…….”

“아니…….”

이런 곳까지 와서 기껏 마음 좀 쓰려고 하는데 게임기 같은 걸 이야기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눈을 흘기며 바라보니 빅토르는 껄껄 웃기만 했다. 나도 결국 웃고 말았다. 그가 이렇게 일부러 장난을 치려고 작정했을 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일단 빅토르랑은 이따가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원래 목적인 아나스타샤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여전히 조건은 까다로웠다.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물건.

얼마 전에 아나스타샤가 드레스에 맞춘 구두가 피아노 연주에 살짝 불편하다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두를 사 줄 수는 없었다.

뭐가 좋을까 생각하며 하염없이 백화점 안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베르체노바 양. 쇼핑 중입니까?}

{……?}

갑자기 영어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처음 보는 중년 남성이었다.

일단 내 이름을 안다는 데에서 난 경계를 상당 부분 내려놓았다. 곁에 빅토르가 있기도 했고.

{예, 그런데…… 누구시죠?}

{일개 클래식 애호가입니다. 당신의 팬이기도 하죠.}

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팬이라고 해 주셔서 감사해요.}

{상당히 오래전부터 팬이었습니다. 언제쯤 직접 볼 수 있으려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보게 되어 무척 기쁘군요.}

{아…… 그런가요.}

본격적인 활동 자체를 몇 년 하지 않은 내게 오래된 팬이 있다는 건 상당히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중년 남성이 날 보는 눈빛은 일반적인 팬이 할 법한 눈빛이 아니었다.

뭔가 사진이나 사인 등을 원한다면 해 줄 수 있겠지만…… 어쩐지 그런 걸 바라는 것 같지도 않다. 난 약간 기이함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그는 주변을 휙 둘러보더니 내게 부탁했다.

{그런데 음…… 저 말고 또 멀리서 온 팬이 한 명 더 있는데, 혹시 괜찮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

{예?}

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길을 가다가도 팬들에게 붙잡혀서 서비스를 하는 건 이제 익숙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멀리서 왔다는 팬의 진심이나 기쁨을 외면하기란 어려운 법이니까.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그가 미안하다는 듯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갑자기 이렇게 붙잡으면서 이름도 밝히지 않는 건 실례이니……. 여기, 영문 명함입니다.}

이런 팬은 정말 처음이었다.

난 그가 내미는 명함을 받고는 아무 생각 없이 확인했는데, 거기엔 왈롱 음악 협회 부협회장 기욤 로슈포르라고 적혀 있었다.

얼마 전 같이 촬영했던 감독과 이름은 같았는데 그 앞의 직함이 상당히 묵직했다.

난 멍하니 그 이름을 읽었다.

{로슈포르 부협회장님……?}

{그렇게 안 불러도 됩니다. 전 그저 당신의 팬일 뿐이니까요.}

왈롱은 벨기에 남부 지역을 뜻하고, 음악 협회라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

난 여전히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는데 로슈포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괜히 시간을 많이 빼앗을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 잘못 산 물건을 반품하러 간 참이거든요. 아마 금방 올……. 아, 저기 오는군요.}

기욤은 손을 들며 내 등 뒤쪽을 바라보았다. 난 뒤돌아보고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새삼 느낀다. 이 세상은 정말 좁고 가혹하다.

지난여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었지. 그리고 미처 대비하지 못한 난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난 다르다. 내 위치를 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해 왔던 일들에 자신도 있었다.

“…….”

그런데도 웃으면서 마주할 용기는 전혀 나지 않았다.

박 교수님도 저 멀리서 날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교수님도 날 보고 웃거나 하진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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