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1화
심장은 거칠게 뛰는데 피가 혈관을 따라 돌지 않고 그대로 중력에 이끌려 흘러내리는 기분이 든다.
차갑게 식은 피가 발치에 고여 끈적한 웅덩이를 이룬다.
난 스스로가 차분해질 때까지 충분하게 기다렸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지금 교수님과 마주한다고 하더라도 별문제는 없다. 내가 앞장서서 이야기할 것도 없었고, 만약 하더라도 세연의 이야기만 중점적으로 하면 된다.
그사이 난 세연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게 되었으므로 충분히 교수님의 흥미를 세연 쪽으로 돌릴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조금 더 여유가 생겼다.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교수님을 마주하면서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자 옆에 서 있던 로슈포르가 날 불렀다.
{베르체노바 양?}
{아…… 예.}
{말씀이 없으셔서……. 혹시 많이 놀랐습니까?}
당황한 기색이 새어 나가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래도 지금은 그걸 수습할 정도의 정신은 챙길 수 있었다.
{놀라긴 했어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이 먼 해외에서 친구의 교수님을 만나다니. 일반적으론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브뤼셀이 한창 뜨거운 시점이고, 음악가들의 관계는 무척 좁아서 몇몇 조건을 상정하면 만남의 확률이 엄청나게 올라간다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날 붙잡아서 그 기적을 이룬 로슈포르는 가볍게 웃었다.
{하하하, 미안합니다. 하지만 저기 박 교수는 한국에서 무척 유명한 피아니스트입니다. 타티아나의 팬이라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는 뭔가 약간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다. 내 신뢰를 얻기 위해 명함을 주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난 이미 로슈포르를 믿고 있었다.
그는 내가 해외에선 대부분 영어로 소통한다는 것도 알아서 영어로 말을 걸어왔으며, 더군다나 교수님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는 아는 사실 한 가지를 더했다.
{그리고 아마 베르체노바 양과는 약간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관계……요?}
{베르체노바 양의 친구분인 임 양의 담당 교수가 바로 저분입니다.}
관계란 말에 조금 당황했던 난 이어진 말에 안도했다.
그리고 그건 로슈포르가 적어도 현재 이어져 있는 나와 세연 그리고 교수님의 관계를 제대로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세연과 내가 친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예상컨대 교수님에게서 전해 들었으리라. 그걸 알게 된 로슈포르는 오늘 우연히 만난 날 그냥 보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한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 그런 관계요…….}
{알고 계셨습니까?}
{예.}
짧게 대답하자 로슈포르는 의아해했다.
그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파악한 나는 어디까지 말해도 좋을지 가늠하다가 적당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작년에 뵙고 인사드리기도 했어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주회를 했을 때 뵈었거든요.}
{엇, 그렇습니까? 전 직접 만난 적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이미 인사까지 했을 줄이야.}
{우연히 그런 기회가 있었네요.}
{두 분 다 워낙 이 세계에서 유명하니 말입니다. 하하.}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 눈은 교수님 쪽을 향하고 있었다. 교수님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인사만 하고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연의 현재 수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기도 했다.
무작정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난 스스로 꽤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리 편한 상태가 아니란 걸 명심해야만 했다.
저번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난 공황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연주에 문제를 일으켜 오케스트라 연습을 통째로 망친 적도 있었다.
망치려고 망친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었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란 법은 없다.
들끓는 마음과 흐트러지는 신경을 바로잡으며 난 똑바로 서려고 노력했다.
이내 다가온 교수님은 프랑스어로 말문을 열었다.
『로슈포르, □□□ □□ □□□□□.』
그 발음은 무척 유창해서 현지인과 비교해도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고 나서 교수님은 이어 날 바라보시더니 러시아어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오랜만이에요.”
그 이상 대화가 이어지진 않았다. 교수님이 할 줄 아는 러시아어는 딱 여기까지였다.
로슈포르가 다시 중재자처럼 나서선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박 □□□. □□□ □□□ □□□□□□?』
『□□ □□□ 세연□ □□□□□□.』
잘 모르겠지만 아마 저번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던 일을 놓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난 그냥 조용히 기다렸다.
교수님과 이야기를 마친 로슈포르는 애석하다는 듯 말했다.
{이것 참……. 타티아나는 영어를 이렇게 잘하고, 박 교수는 프랑스어와 독일어에 능통한데도 통역이 있어야 대화가 성립하다니. 너무나 아쉽군요.}
그런데 그때였다.
{복잡한 이야기만 안 하면 괜찮지.}
교수님이 영어로 말씀하셨다. 프랑스어만큼 유창하진 않지만 알아듣기엔 충분한 수준이었다.
굳이 어색한 언어를 써 가면서까지 나와 대화를 하려고 하실 필요는 없다.
세연이 사이에 없다면 사실 나와 교수님의 관계랄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작년에 세 명이 만났을 땐 거의 모든 대화를 세연을 통해서 했었다.
하지만 작년 연주회 일 때문인지 교수님은 내게 흥미를 가지고 계셨다.
지금 영어를 발음하는 교수님의 목소리와 눈빛엔 뚜렷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난 그 의지를 외면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간단한 이야기만 오갈 것이란 점이었다. 피상적으로 흘러나가는 이야기 정도라면 할 수 있었다.
나도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교수님은 다짜고짜 물어보셨다.
{여기 왜 있습니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넓게 해석하자면 거의 철학적인 부분까지 파고들 수 있는 질문이었다.
약간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난 괜히 멀리까지 생각했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지금 교수님이 묻는 건 이 시간에 왜 백화점에 있느냐는 간단한 질문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건 나야말로 지금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분명 세연은 이연주 그리고 양지은과 이곳에 왔고, 교수님은 한국에 남아 있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왜 지금 브뤼셀에서 이렇게 마주하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차차 하기로 하고 일단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해 교수님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친구의 생일이라서 선물을 사려고 해요.}
{친구?}
난 모레가 아나스타샤의 생일이라고 말했고, 교수님은 이미 그녀를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나스타샤를 알고 있는 건 로슈포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풀 네임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로슈포르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이즈마일로바 양이 생일이었군요? 마음 같아선 선물이라도 보내고 싶은데, 그건 하지 않는 게 좋겠죠?}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왈롱 음악 협회 부협회장이란 직위가 얼마나 높은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가 느끼기엔 충분히 부담될 정도였다.
그리고 아무리 생일이라고 해도 이런 분이 콩쿠르 참가자에게 선물을 하는 건 좋지 않다.
아무리 콩쿠르와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만에 하나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난 교수님은 그제야 지금 이 상황이 엄청난 우연이라는 걸 아셨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그전까진 로슈포르가 날 불러온 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억지로 만든 상황이 아니라면 괜찮다는 듯 교수님은 조금 풀어진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부탁 하나 합시다.}
{예?}
{나도 선물을 사러 온 것이라서.}
조금 겸연쩍다는 듯 교수님이 사정을 설명했다.
교수님은 콩쿠르 첫날, 세연이 연주하는 모습을 새벽 3시에 지켜보고 그대로 브뤼셀행을 결정지었다고 하셨다.
난 그 말이 상당히 이상하다고 느꼈다.
세연이 더할 나위 없이 잘했다면 그대로 믿고 잘할 수 있도록 두면 될 일이고, 만약 못 했다면 다음 무대로 가지 못하고 떨어질 테니 올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사람이 그런 계산적인 판단만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교수님은 세연이 굉장히 인상적인 연주를 한 것에 어떠한 이끌림을 느끼고는 직접 만나서 봐야겠다고 판단하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행동력이 정말 대단하시다.
{그래도 거의 이틀 만에 이렇게 곧장…….}
{제가 좀 도와드렸죠. 그나저나 대단하십니다. 장시간 비행을 하고도 제자 선물부터 골라야 한다고 하시고.}
난 머릿속으로 비행시간과 시차를 계산했다.
세연이 이곳에 왔을 때 이야기해 주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브뤼셀에 오후 5시 정도에 도착하려면 한국에선 오전 8시에 출발해야 했다.
상대적 시간은 9시간 정도 소요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시차가 7시간 당겨져서 그렇게 된 것이지, 절대적인 시간은 16시간이 걸린다. 굉장히 고된 여행길이다.
그 때문인지 교수님의 얼굴에선 피곤함이 느껴졌다.
난 이렇게 교수님이 아끼는 세연이 부럽다가도 순간적으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깊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사이, 로슈포르와 교수님은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어떻게 보더라도 스카프는 좀 아니지 않습니까?}
{솔직히 난 잘 모르겠군…….}
{아마 손수건이랑 비슷한 느낌으로 구매하신 것 같은데……. 계절도 계절이고, 그런 스타일을 10대에게 사 줬다간 사 주고도 욕먹기 딱 좋습니다.}
솔직히 난 스카프를 받아도 좋을 것 같았다.
세연도 아마 교수님이 주는 것이라면 어지간해선 다 좋아하지 않을까? 하지만 로슈포르가 거의 비난을 하는 걸 보니 아마 상당히 센스 없는 선택을 하신 모양이다.
내가 없었다면 아마 두 분은 프랑스어로 대화를 했겠지. 하지만 지금 영어로 대화한다는 건 옆에 있는 나도 들으라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교수님은 거의 단답이었고, 대부분 로슈포르가 말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하……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베르체노바 양. 어차피 친구분 선물을 고르러 오셨다고 하셨으니 조금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본론이 나왔다. 난 세연과 같은 또래이니까 아마 잘 알 것이란 기대가 엿보이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난 흔쾌히 승낙하지 못했다.
우선 나는 아나스타샤의 생일 선물을 아직 고르지 못하고 고민 중인 상태였다. 세연의 것까지 같이 생각하기엔 머리가 복잡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연은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내가 교수님과 만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처음부터 그랬었다.
세연이 소개시켜 주기 전에 난 교수님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고, 그 사실을 전화로 들은 세연은 그날로 바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오기까지 했다.
그녀는 나와 교수님이 음악을 주제로 대화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묘한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론 그 사이에 세연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
나 역시 세연 없이 교수님과 필요 이상으로 길게 만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자의 무대를 보고 16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오셨으면서 선물을 어떻게 골라야 할지 몰라 곤란해하는 분을 그냥 둘 수도 없었다.
{알겠어요. 같이 찾아봐 드릴게요.}
결국 난 그렇게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결정이 실수가 아니리라 생각하며 난 신중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