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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22화 (1,122/1,277)

##  1122화

갑작스레 만난 두 분의 신원이 각각 왈롱 음악 협회의 부협회장님과 한국에서 온 음대 교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빅토르는 경계를 풀었다.

심지어 빅토르는 괜한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겠다며 내 근접 경호를 그만하고 평소 하듯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그가 내 옆에 붙어 있으면 사람들이 날 연주자보다는 베르체노프가의 사람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니 그런 그의 배려는 이해할 만하지만……

솔직히 지금 가장 믿음직스러운 내 편이라고 할 수 있는 빅토르가 멀어지니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하지만 날 믿고 피해 준 빅토르를 다시 부르는 건 그에게 불안함을 토로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이젠 그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걱정을 끼치고 응석을 부렸던 일로 충분하다.

‘그때와는 달라…….’

난 이겨 냈고, 납득했다. 지금은 잘할 수 있다.

같은 생각을 계속 되뇌며 움직이는 것은 무대에 설 때와 같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을 이끌고 백화점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 선물 찾기 작전에선 내게 많은 것이 맡겨져 있었다. 난 아나스타샤의 선물을 찾을 때와 비슷한 조건을 상정하고 설명을 해 드렸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콩쿠르에 참가한 연주자라는 입장은 같으니까.

기욤도 교수님도 내 이야기를 잘 듣고는 꽤 진지하게 고민하셨다.

그중 조금 더 제안을 많이 하는 건 기욤이었다.

그는 음악 협회 부협회장이란 직위를 가지고도 해외에서 온 교수님을 직접 마중해 안내할 정도로 상당히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작은 피아노 모양의 액세서리는 어떻습니까?}

하지만 교수님의 반응은 냉담했다.

{온종일 피아노만 보느라 질렸을 애한테?}

{……교수님이 그런 말씀 하셔도 됩니까?}

{그럼 여기 심사 위원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박 교수님은 날 심사 위원jury이라고 불렀다. 이 선물 찾기에 대한 심사를 맡기겠다는 의미겠지만…… 콩쿠르 참가자인 내가 그렇게 불리니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그 명칭을 바꿀 필요성까지 느끼진 못해서 난 내게 맡겨진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 저도 그건 좀…….}

피아노에 관련된 액세서리들은 귀여운 것이 많긴 하지만…… 저런 걸 가방이나 스마트폰에 달고 다니면 너무 튈 것 같았다.

피아노 연주자라고 광고라도 하고 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세연의 성격에도 그런 건 별로 안 어울릴 것 같아서 난 다른 의견을 내 봤다.

{만년필은 어떨까요?}

{만년필?}

난 슬슬 적당한 때라고 생각하며 이야기했다.

{세연의 연주를 보고 나니…… 앞으로 쓸 일이 많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예전에 에르네스트에게 만년필을 선물한 적 있었는데, 그때 그는 정말 고마워하며 그 후로도 자주 사용하곤 했다. 아마 세연도 사인 등을 할 때 잘 쓰겠지.

그런데 교수님은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1라운드 결과도 아직 안 나왔는데 그 애를 자만하게 할 만한 물건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군.}

{자만이랄 것까진…….}

너무 엄하신 것 아닌가 싶었는데, 세연이 교수님이 주실 물건에서 의미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니 조금 더 미뤄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몇 가지 의견이 더 오갔고, 그만큼 기각이 나왔다.

기욤은 허리를 쭉 펴더니 웃으며 말했다.

{이것 참……. 뭐든지 있는 백화점인데 막상 선물을 고르려고 하니 어렵군요.}

아무래도 까다로운 두 연주자의 쇼핑에 어울리려 하니 피곤한 듯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없으면 정말 곤란해진다.

내가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그가 물었다.

{베르체노바 양이라면 뭘 받았으면 좋겠습니까?}

{저요?}

{만약 베르체노바 양이 박 교수님의 제자라면 연주를 보자마자 16시간을 날아온 교수님에게 뭘 받으면 가장 기쁘겠습니까?}

돌고 돌아 근본으로 향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난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말문이 턱 막혔다.

절대로 그런 걸 바라면 안 된다는 생각만이 새카맣게 머릿속을 꽉 채운다.

기대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기욤이 간신히 날 다시 현실로 끌어냈다. 난 들키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무엇이든…… 좋겠죠.}

{그건 그렇겠죠.}

{하지만 이렇게 직접 오신 것에 의미가 있다면…… 연주자로서 칭찬하고 인정해 주시기 위함이겠죠? 그렇다면 그렇게 인정받았다는 증거를 가지고 싶어질 거예요.}

날뛰는 생각들을 잠재우며 지극히 일반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만약 미하일 선생님이나 구세프 선생님께서 내 연주를 듣고 뒤늦게 찾아오셨다면 그건 정말 엄청나게 의미 있는 일이었다.

나라면 이 순간을 물건으로 남기고 싶을 것 같았다.

{증거라…….}

내 말을 듣고 교수님은 턱을 만지작거리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적당한 게 있긴 하지.}

결정을 내린 교수님은 더 이상 지체할 생각이 없으셨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 도착한 곳은 시계와 귀금속 등을 취급하는 매장이었다. 교수님은 그중에서 여성용 시계를 찾아보기 시작하셨다.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기욤이 조금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시계를 선물하실 겁니까? 요즘 아이들은 시계 잘 안 차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피아니스트인데요.}

그 말대로였다. 피아니스트들은 팔과 손에 무언가 방해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때문에 시계나 팔찌, 반지 같은 것은 어지간해선 착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수님의 관점은 상당히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중요하지. 적어도 시계를 차고 있을 때만큼은 피아니스트로서 너무 깊은 곳까지 파고들지 않을 테니까.}

집중에 방해가 될 만한 물건이란 건 선물로서 굉장히 부적절하게 들린다. 하지만 난 단번에 교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연은 지금 피아노에 상당히 깊게 파고들어 있다.

행동 하나를 놓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일 없이 신경을 집중하여 컨트롤할 정도로. 그건 반사를 억누르는 일에 가깝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그녀가 연주한 날 내가 찾아갔던 건 지금 교수님이 찾아오신 이유와 상당히 닮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걸 벗어 두고 연주할 땐 집중하더라도 다시 손목에 차면 내가 줬다는 사실을 떠올릴 테고.}

{잠깐만요, 교수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별것 아닐세.}

어이없어하는 기욤에게 교수님은 이어 설명했다.

{가장 두려울 것이 없을 때야 말로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지.}

세연의 연주를 듣고 교수님은 그녀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는 걸 직감하셨음이 분명했다.

그냥 전화로 잘했다고 칭찬만 해 줘도 충분하셨을 텐데, 충분 이상의 행동을 보이신 건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기욤은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너무 엄하십니다. 그래도 제자가 예뻐서 여기까지 오신 것 아닙니까?}

{그것도 맞네.}

교수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진중한 눈으로 시계를 고르며 말씀하셨다.

{그러니 칭찬의 의미로 줘야지.}

세연은 결코 시계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지 모두 꿰뚫어 보지 못하리라. 교수님은 칭찬 이상의 의미를 절대로 설명해 주지 않으실 테니까.

하지만 세연이 몰라도 나는 안다. 알고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만 한다.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님은 마침내 시계 하나를 고르셨다. 얇고 예쁘지만 상당히 비싼 시계였다.

{어떻습니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심사 위원.}

{…….}

입을 다물고 있는 내게 교수님이 심사를 요구했다. 진심으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할 순 없었다.

단지 눈에 보이는 것과 세연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만을 생각할 뿐.

난 짧게 고개를 까딱였다.

{괜찮다고 생각해요.}

{어? 저만 지금 못 따라가고 있는 겁니까? 피아니스트들끼리 통하는 게 있어요?}

{설명하기엔 복잡해요. 세연의 일이니.}

기욤은 그냥 이해하길 포기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시계를 고른 교수님은 직원에게 프랑스어로 말을 걸었다.

『□□□ □□□□□.』

『□□ □□□□□! □□□ □□□□?』

『□□□ □□□.』

알 수 없는 언어가 오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는데, 기욤이 옆에서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베르체노바 양은 선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전…….}

난 아나스타샤에게 줄 선물을 이 백화점에서 찾지 못했다.

그냥 초콜릿 세트 같은 것이나 선물하면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교수님이 선물을 고르시는 것을 보면서 난 아나스타샤에게 줄 선물을 그렇게 대충 정해선 안 될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선물에 의미를 담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나면 결론은 금방 나온다.

{한 바퀴 돌면서 생각해 보니 제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고르는 것이 의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물할 만한 것이 있으십니까?}

{예.}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내가 가지고 온 악보들 중에 아나스타샤가 좋아할 만한 것이 있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귀한 악보이니 희소성도 높았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그녀에게 주는 것이니 의미가 깊었다.

기욤은 내가 생각한 것을 굳이 캐묻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제안했다.

{그럼 포장지라도 사 가시죠. 그냥 줄 순 없잖습니까?}

{그건 그렇네요.}

선물은 포장을 뜯는 재미도 있는 법이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욤은 교수님 옆으로 슬쩍 다가가더니 시계를 포장 중인 직원에게 프랑스어로 무어라 요청했다.

그랬더니 곧장 직원이 깨끗한 포장지를 꺼내선 그냥 주었다. 아마 비싼 시계를 산 덕분인 것 같다.

기욤이 건네준 포장지를 받으며 감사 인사를 하고 잠시 기다리자 시계 포장도 끝났다.

그렇게 40분쯤 걸려서 나와 교수님은 각자 원하는 선물들을 정할 수 있었다.

기욤이 잘되었다는 듯 말했다.

{생각보단 일찍 골랐군요. 솔직히 오늘 저녁 먹기 전까지 못 고를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걸렸으면 미안해서 큰일 날 뻔했다. 하지만 기욤은 내가 같이 다녀 준 것에 상당히 기쁜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베르체노바 양. 덕분에 교수님도 선물을 잘 고른 것 같군요.}

{저야말로요.}

{이것도 인연인데,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혹시나 했던 제안을 기욤이 하려던 순간이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양.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합시다.}

제안보다는 조금 더 강하게 교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정중한 거절의 말을 준비하던 난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교수님이 하시는 말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내겐 부담이었다.

그렇게 내가 머뭇거리던 때였다. 갑자기 기욤이 스마트폰을 확인하더니 애석하다는 듯 말했다.

{미안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전 이만 가 봐야겠군요.}

{기욤.}

{공항에서 호텔까지 데려다드리진 못했지만 교수님은 프랑스어가 능숙하시니 이 정도면 괜찮겠죠? 호텔 위치는 제가 메시지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음악 협회 부협회장쯤 되는 사람을 지금까지 붙잡아 둔 것만으로도 이미 미안한데, 이만 가겠다는 그를 붙잡을 순 없었다.

기욤은 바쁘게 스마트폰의 화면을 터치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것 외엔…… 나중에 하죠, 나중에. 그럼 가 보겠습니다! 교수님 그리고 베르체노바 양. 다음에 또 봅시다. 즐거운 저녁 되시길.}

그리고 기욤은 짧은 인사만을 남기고 순식간에 가 버렸다.

난 그가 정말로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서 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수님과 친분이 있는 그는 교수님이 날 주시하고 있다는 걸 분명 알고 있었을 테니까.

기욤이 간 쪽을 바라보던 교수님이 중얼거리셨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군.」

아마 교수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신 것 같다.

하지만 당혹감을 느끼는 나와 달리 교수님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보였다.

진짜로 슬슬 가 봐야 할 타이밍이란 생각이 들었다.

난 정말 열심히 생각하고 움직였다. 덕분에 지금까진 잘 해낸 것이다. 하지만 그건 기욤이 중간에 있어 준 덕분이기도 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이 많아 보이는 교수님과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물론 세연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일 테고, 간단한 영어로 말이 오갈 테니 큰 문제가 있진 않겠지만…… 난 울렁거리는 내 기분을 제대로 다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세연과 같이 할 자리를 만드는 게 옳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도 분명 그걸 바랄 터였다.

나는 난처한 기색을 띠며 교수님께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도 집에서 기다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전화 하면 내가 이야기하죠.}

하지만 교수님은 강한 어조로 딱 잘라 말했다. 난 이 상황에서 도저히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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