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23화 (1,123/1,277)

##  1123화

교수님은 세연의 연주 직후 이곳에 오기로 결정하셨고, 그러니 당연히 제일 중요한 건 세연이었다.

아마 나와 대화하고 싶으시다는 것도 세연과 관련된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 무대에 섰을 때부터 교수님은 내게 흥미를 보이셨고, 오랫동안 지켜보셨다.

그래서 난 더더욱 언행에 신경을 썼다. 연주자로서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접점만 유지하며 내 입장을 지켜 왔다.

덕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일을 떠올려 보면 적어도 이상하다고 여기시진 않는 것 같은데…… 문제는 지금 교수님이 굉장히 진지하게 날 대하고 계시다는 점이었다.

‘기분이 좋으신 게 아니야…….’

교수님은 쉽게 화를 내시진 않지만, 때때로 굉장히 단호하신 면이 있다.

난 그 표정과 말투 그리고 분위기를 안다. 영어로 말씀하시더라도 그건 변하지 않았다.

거역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세연은 자신의 무대를 잘 마무리 지었고, 난 그런 세연의 친구다. 그러니 교수님이 날 나쁘게 대하실 이유는 전혀 없다.

그걸 알면서도 무서웠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안절부절못하자 교수님은 난처하다는 듯 말씀하셨다.

{너무 부담을 준 건가. 이런 늙은 남자와 같이 식사를 하다니 당연히 싫겠지.}

{아뇨! 그, 그런 게 아니라!}

난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농담으로 날 움직인 교수님의 눈빛은 여전히 진지했다.

{그래도 잠깐 이야기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피아니스트로서 묻고 싶은 게 있는 것뿐이니까.}

안경 너머로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보였다.

나라는 사람과 혹은 망령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하신다면 난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어쩔 수 없이 말할 때마다 죄를 쌓아 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난 피아노 연주자라는 업을 안고 이곳에 있기도 하다. 내게 질문이 있다면 그것이 죄라고 해도 피하지 않고 제대로 마주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 것도 똑바로 하지 못한다면 콩쿠르고 자시고 전부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방에 틀어박히는 편이 낫다.

다시 정신을 다잡은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세연은 아나요?}

{무엇을?}

{교수님께서 이곳에 왔다는 걸…….}

{모릅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왔으니까.}

이왕 오는 김에 콩쿠르 중간에 몰래 와서 세연을 놀라게 해 주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 그 아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신다면 지금 이러시면 안 된다.

난 차분하게 교수님을 설득했다.

{그럼 안 돼요. 그 아이는 저와 교수님이 단둘이 있는 걸 싫어해요.}

그 이유를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 약간의 질투? 아니면 소외감을 느끼기 싫어하는 마음? 귀여운 이유부터 무거운 이유까지 여러 가지 생각이 나지만, 솔직히 나도 세연이 어떤 마음으로 날 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세연이 이 상황을 알면 곧장 달려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 대화를 원하신다면 세연을 부르자고 하려던 찰나, 교수님은 예리한 목소리로 날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당신이 그걸 알고 이해한다는 게 우리가 같이 이야기를 해야 할 이유라고 보는데.}

{……!}

숨이 멎을 듯 놀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교수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세연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교수님은 꿰뚫어 보신 것이다.

일절 반박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자 교수님이 이어 설명했다.

{물론 나도 알고 있습니다.}

안경 너머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들었다. 이 와중에도 난 교수님이 세연을 생각할 때면 차분해지신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저번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봤을 때, 난 이런 식으로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죠. 그건 내 미숙한 영어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연이가 우리 가운데에 있길 원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정도로 대화가 가능하신데도 세연을 통해 말씀하셨던 거였구나.’

그건 나와 세연을 위한 배려라고 볼 수도 있었다. 당시 난 상태가 좋지 않았고, 세연은 바라는 바가 명확했었으니까.

{그러나 그 아이를 통하면 할 수 있는 대화가 극히 제한되죠.}

하지만 지금은 그런 배려를 할 여유가 없으신지 교수님은 딱 잘라 말씀하시고는 이어 내게 물었다.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그 목소리는 상당히 딱딱하게 들렸다. 시야가 조금 더 명확해진 기분이 들었다.

교수님은 지금 날 제자의 친구로 보고 식사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시선과 이해로 세연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다시 스스로를 돌이켜 본 나는 결정을 내리고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잠시 전화 좀 할게요.}

주소록을 내리다 보니 세연의 번호가 보였다. 난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사과하며 데보라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

백화점에서 나와 향한 곳은 근처의 레스토랑이었다. 본래 교수님과 기욤이 식사하기로 했던 곳인지 미리 예약이 되어 있었다.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두 분은 이곳에서 느긋하게 식사하며 대화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난 기욤의 눈에 띄어 버렸고, 그는 자신 대신 날 이 식사 자리에 앉히는 것에 동의했다.

나 역시 깊게 생각해 봤다.

이미 한 번 만났으니 두 번 만나지 못할 것도 없고, 무작정 도망쳤다간 정말 이상하게 보일 테니 이렇게 마주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자리에 앉아서도 난 끊임없이 고뇌했다.

겁먹고 움츠러들면 작년과 다를 게 없다. 난 그렇게 바보같이 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중계해 줄 사람 없이 마주하려니 자꾸만 불안감이 턱 밑을 간질이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그 불안감을 확인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검은 새의 기억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넘겨짚지 말자…….’

죄의식에 짓눌려 옛 은사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건 가장 미련한 짓이다.

교수님의 후회와 회한 그리고 배신감 등에 대해선 알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게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조금 생각이 차분해졌다.

교수님과 어떤 대화가 오갈지 미리 예상하던 것도 모두 그만두었다.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설프게 넘겨짚으면 불필요한 소리를 할 수도 있다.

지금은 가급적 앞서 나가지 않고 내게 향하는 질문에만 잘 생각해서 대답하면 된다.

그렇게 태도를 정돈하기까지 몇 초 정도 걸렸다. 다시 고개를 들자 어느새 웨이터가 우리 옆에 와 있었다.

교수님이 메뉴판을 내게 내밀며 말했다.

{식사는 제가 사겠습니다. 아무거나 시키시죠.}

조금 상냥해진 목소리에 마음이 놓이는 내 자신을 발견하니 한숨이 나왔다. 정말 바보 같다.

난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스튜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교수님은 스테이크와 감자튀김이었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아 가자 테이블은 침묵에 휩싸였다.

교수님은 안경을 닦으며 말씀이 없었다. 난 교수님이 신중하게 한마디 하시기 전에 습관적으로 안경을 닦으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용히 기다리자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마지막 날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예?}

{연주 일자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한참이나 생각한 후에야 그게 내 연주 날을 뜻한다는 걸 알았다.

{아…… 맞아요. 마지막 날이에요.}

{가급적 청중석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욤이 티켓을 구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감사합니다…….}

이 와중에도 난 세연의 연주는 못 보셨는데 내 연주는 보셔도 되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연과 교수님 양쪽에게 얽혀 있는 나는 사실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또 대화가 끊어졌다. 교수님은 막상 날 데리고 오긴 했지만 이제 와 조금 어색해 하시는 것 같았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라…….}

테이블 옆의 꽃병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교수님은 다시 날 바라보았다.

{몇 년 전, 세연이를 처음 가르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큰 콩쿠르에 나이가 차자마자 나갈 줄은 상상도 못 했죠.}

나 역시 세연을 무척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실력 향상이 눈에 띄긴 해요.}

며칠 전 했던 세연의 무대를 놓고 이야기하자면 오늘 밤을 샐 수도 있다. 하지만 교수님이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건 세연이의 재능과 노력을 이끌어 내는 정신력이 받쳐 준 덕분이죠. 그리고 그 정신력은 바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에게서 배워 왔을 테고.}

{예……?}

{전 당신이 세연이를 이곳까지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갑작스레 내 이름이 나와서 당황했다.

그리고 교수님의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놀라 버린 내 반응은 교수님의 판단이 옳다는 방증이나 다름없었다.

세연이 날 라이벌 이상으로 느끼고 있다는 건 안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세연은 국제 콩쿠르에 나이가 조금 더 찬 후에 참가했으리라.

내가 그녀를 강제로 참가시킨 건 아니지만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할 순 없겠지. 그리고 이 상황은 교수님이 정한 가이드라인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난 이기심에서 비롯된 속죄의 일환으로 세연이 연주자로서 성장하는 데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가 올라야 할 계단을 먼저 살짝 보여 주기도 하고, 따라올 수 있도록 길을 밝혔다.

세연은 아무런 의심 없이 날 따라 주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지켜보고만 있지 못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교수님이 테이블에 한 팔을 괴었다.

「세연이도 나도 왜 이 아이의 음악에 홀려 있는지…… 알 수가 없군.」

무심코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난 목이 멨다. 잘게 쪼개지고 바스러졌던 음악도 교수님은 놓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난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교수님은 내게 흥미를 가지고 신기하게 여기고 있다. 지금 이 정도가 딱 좋다. 쓸데없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아야 했다.

간신히 세연과 잘 지내시는 분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침묵이 이어졌다. 교수님은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툭 물었다.

{사사하는 선생님들이 미하일 표도로비치와 구세프 바실리예비치 이렇게 두 분이라고 아는데, 맞습니까?}

{예.}

{연주를 들어 봤는데 두 분은 스타일이 상당히 다르더군요. 혹시 그 전엔?}

말할 수 있다. 말해야 한다. 그런 다짐과 각오만으로 머릿속을 꽉 채웠다.

{제 정보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게 전부예요.}

비협조적인 내 말투에 교수님은 멈칫하시더니 이내 빙그레 웃었다.

{그런 활자 몇 줄이 뭘 설명할 수 있다고?}

음악가라면 음악을 들어 보지 않고선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반대로 음악만 들어 보면 정말 많은 걸 알 수 있다.

평소 교수님의 지론이었다. 나 역시 똑같이 생각하기 때문에 반박할 수 없었다.

교수님은 손가락으로 귀 부근을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전 귀에 들리는 걸 믿어야 하는 사람이라서.}

{…….}

{근래도 쇼팽은 잘 안 칩니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질문이었다. 역시 예리하신 분이다. 쇼팽에서 망령의 미련을 읽어 내신 것이다.

난 간결하게 대답했다.

{필요하다면 하죠.}

질문이 같으니 대답도 같아야 했다. 그래야 이상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교수님이 굳이 했던 질문을 또 하신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쇼팽의 녹턴 op.9 1번을 연주했었던 건 필요했기에 연주했던 겁니까?}

당혹스러움에 난 말을 잇지 못했다.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연주를 마치고 불 꺼진 홀에서 세연은 내게 쇼팽의 곡을 리퀘스트했다.

난 세연의 쇼팽에 나와 닮은 리듬감이 상당 부분 있음을 알았기에 조심스레 녹턴을 연주했었다.

교수님이 그것을 짚어 물어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당황한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교수님이 말했다.

{세연이는 그걸 숙제라고 하더군요.}

난 세연이 교수님에게 어디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는지에 대해 간과했다.

설마 또래 친구의 연주를 숙제로 삼아 공부하겠다고 말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교수님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아마 입장과 상황을 가리지 않고 뭐든지 흡수해서 피아노에 매진하는 것을 대견하게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연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셨으리라. 그리고 지금 그 마음은 날카롭게 예기를 발하며 내게 향하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 뭘 가르치고 있습니까?}

굳이 날 식사에 초대해 이야기를 하자던 본론은 바로 이것이었다.

난 역시 제일 중요한 건 세연에 관련된 것이었다는 데에 안심하면서도, 목 깊숙한 곳에서 울렁거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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