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4화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난 필요에 의해서만 쇼팽을 연주한다고 두 번이나 말했고, 세연 앞에서 쇼팽을 연주한 건 그녀가 내 조건에 맞다는 걸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난 세연이 바란다면 무엇이든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세연은 스스로의 바람으로 내게 도움을 구하고 자신의 숙제로 삼았다.
그 교묘한 합의는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암묵적 약속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세연을 보는 내 마음엔 짙은 죄책감이 깔려 있었지만, 결국 그녀의 바람과 내 욕심이 일치한다는 것에 내가 약간의 환희를 느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세연이 괜찮다고 하니까…… 조금 더 욕심을 내도 되겠지. 그렇게 안이한 생각으로 그녀를 대했던 것이다.
‘모두 지켜보고 계셨던 거야.’
그 모든 관계를 교수님은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아마 처음부터였겠지. 교수님은 내 존재를 알고 있었고, 세연은 나와 만나자마자 적극적으로 친해지려 했었으니까.
분명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 내 이름도 몇 번 올랐으리라.
그런 대화 속에서 세연이 내게 어떠한 영향을 받고 있는지 교수님이 알아차리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별 말씀 없으셨기에 선만 안 넘으면 되리라 생각했는데…… 이번엔 확실히 선을 넘은 것 같다.
때문에 교수님은 곧장 이곳으로 날아오신 것이다.
제자인 세연의 상태를 살피고, 그 옆에 있는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교수님이 보시기엔 분명 그럴 테니까…….’
난 세연과 어릴 때 같은 콩쿠르에 참가한 인연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연주자 친구다.
함께 음악을 교류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건 어느 연주자들에게나 필요한 좋은 환경이자 기회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런 교류가 항상 올바른 건 아니다.
그 방향성을 바로잡는 건 교수님의 일이었다. 그런데 난 그런 교수님의 영역도 일부 침범 중이었다.
내 위치는 그냥 이상한 참견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 정도가 적당한 위치라고 판단하면서도,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불순하고 비이성적인 감정이 자꾸 내 등을 떠밀려고 한다.
‘지금 이대로 넘겨야 해.’
난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 애쓰며 냉정하게 상황을 직시했다.
어차피 이제 와 세연에게 간섭하거나 가르치려 한 적 없다는 말을 해 봐야 소용없다.
교수님은 음악에 대해선 무척 예리하신 분이니 이미 세연에게 내 영향이 얼마나 미쳤는지 다 아실 것이다.
당장 떠오르는 수많은 단어와 문장들 속에서 말해선 안 될 부분들을 걸러 내고, 교수님을 납득시킬 수 있도록 정돈했다.
충동과 감정이 날 방해했지만 그간 그런 것에 휘둘려 왔으면 난 진작 망가졌을 것이다. 지금 난 충분히 스스로를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있었다.
잘해야만 했다.
교수님은 아직까지 자신의 판단을 단정 짓지 않고 약간의 궁금증과 불쾌함 등으로 날 바라보고 계시는 것 같지만…… 지금 내가 말을 잘못한다면 정말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그 아이가 먼저 말했어요.}
{?}
{쇼팽의 독주곡을 연주해 달라고…… 저에게 그렇게 부탁하길래 혹시 힌트나 도움이 필요하다면 조금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뿐이에요.}
열심히 고른 말은 무책임한 변명으로만 들렸다.
있었던 사실 그대로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교수님이 절대 납득하지 않으실 것 같았다. 난 할 수만 있다면 머리를 감싸고 울고 싶었다.
곧 날아들 꾸짖음을 예상하며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데, 예상 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세연이가 쇼팽의 독주곡을 연주해 달라고 먼저 요청했다고요? 정확하게 그렇습니까?}
{예? 예…….}
{아…….}
교수님은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다시 반복하며 확인하더니 탄식했다. 그러고는 한풀 꺾인 목소리로 내게 사과하셨다.
{미안합니다. 제가 오해를 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요……?}
너무 예리하셔서 무서울 지경인데 오해라니?
어리둥절해진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교수님은 이어 설명해 주셨다.
{당신의 쇼팽 독주곡을 들어 보고 싶다고 했던 건 제가 한 말입니다. 그걸 세연이가 기억해 뒀다가 그대로 부탁한 것 같군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세연이 갑자기 내게 쇼팽을 요청했을 때, 난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그녀가 혼자서 생각한 끝에 요청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때문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모르던 퍼즐 조각이 하나 있었다.
지금까지 교수님은 일관적으로 내 음악에, 특히 쇼팽에 관심을 보이시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자 앞에서 다른 또래 연주자의 음악을 들어 보고 싶다고 하시다니…….
‘너무하셔.’
워낙 음악에 대해선 타협이 없으신 분이고 세연은 긍정적인 성격이라 그걸 좋게 받아들인 것 같지만, 내가 그런 입장이었다면 정말로 상처받았을 것 같다.
아무리 내가 자격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은 한마디 해도 될지 고민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먼저 혀를 차며 말했다.
{숙제란 말도 그래서 했던 것이었군……. 나 원 참, 나이를 먹다 보니 스스로 한 말도 까먹고……. 죽을 일만 남았군.}
{그런 말씀 마세요!!}
난 고민 따윈 순식간에 날려 버리고 소리 질렀다.
다른 테이블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놀란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교수님도 놀란 표정으로 날 보고 계셨다. 농담으로 한 말을 이렇게 진지하게 받을 줄은 모르셨던 것 같다.
나 스스로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다. 갑자기 소리를 친 탓인지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일단 수습을 해야 했다.
{그, 그…… 그런 말씀 하시면 세연이 슬퍼할 거예요…….}
{음, 미안합니다. 못 들은 걸로 하시죠.}
교수님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허리를 숙였다.
일단 이야기를 더 이어 가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진 않았다.
난 가까스로 머리를 짜내어 말했다.
{어찌 되었든…… 세연은 제 쇼팽을 듣고 교수님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게 있었던 것 같네요.}
{아마도.}
{그건 음반 레퍼런스를 연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세연은 그저 교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던…….}
상황을 수습하고 오해도 불식시키기 위해 말을 이어 가던 나는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상당히 오만하다는 걸 깨달았다.
{제가 그 정도 수준이 된다는 건 아니고요…….}
{그런 겸손은 접어 두시죠. 난 당신의 쇼팽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당치 않아요.}
{뭐…… 겸손만은 아닌 것 같군요. 자주 연주를 안 한다고 하니…….}
신기하다는 듯한 눈빛이 안경 너머에서 빛났다.
쇼팽의 음악들은 내게 의미가 많다.
검은 새로부터 온전하게 허락을 받고 연주자로서의 한계를 깨뜨리고 나아갈 수 있었던 건 쇼팽의 소나타 1번이 내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난 쇼팽 만큼은 그 누구와도 다른 확실한 독자성을 지녔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쇼팽은 내가 자의적으로 억누를 수 없는 곡이기도 했다. 반사적으로 나오는 뉘앙스를 제어할 수가 없다.
그건 얼마 전 알레한드로에게 설명할 때 보여 주었던 것처럼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는 음악이라 할 수 있었다.
때론 그런 음악도 나쁘지 않다. 내 한계를 체감하기 위해 가끔 해 봐야 하기도 하고. 하지만 매번 하면 목이 상한다.
때문에 난 쇼팽을 조금 더 안전하게 다룰 수 있을 때까진 잘 간직하고 있었다.
가끔 잊지 않게 연습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니 완성이란 말은 정말 멀고 먼 일이다.
진심으로 난 그렇게 생각하기에 교수님의 눈을 피하지 않을 수 있었다. 교수님은 가만히 날 보더니 허허 웃었다.
{쉽게 이야기해서 미안하지만…… 그런 프로페셔널리즘은 굉장히 드뭅니다. 교수로서 당신에게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군요.}
{영광이에요.}
{불편해하고 있는 것 압니다. 계속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은 단순히 불편하다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지금 교수님으로선 내 태도가 그렇게 보이실 수밖에 없었다.
난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살짝 저었다. 교수님은 굳이 대답을 원했던 건 아니었는지 살짝 기침을 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말이 나온 김에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괜찮아요.}
{교수인 나도 당신의 쇼팽은 굉장히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세연이가 느끼기엔 더욱 그렇겠죠.}
교수님은 안경을 고쳐 쓰며 똑바로 날 바라보았다.
{그런데 세연이가 당신에게 심취해서 그 정신력과 음악뿐만 아니라 스타일까지 배우려고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세연은 내가 보여 준 결과물들을 보고 잘 흡수해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나와 비슷한 음악성과 리듬 감각을 지니고 있는 세연은 아주 훌륭하게 자신의 경지를 개척해 나갔다.
때문에 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교수님도 세연과 내가 쇼팽으로는 교류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문제는 며칠 전 연주했던 곡이었다. 난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스타일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피차 같은 걸 느끼고 세연을 찾았던 만큼 말을 빙빙 돌려 봐야 의미가 없었다.
{카를 타우지히의 곡 말씀이신가요?}
{역시 알아봤군.}
빨리 말이 통해서 마음에 든다는 듯 교수님은 웃었다. 하지만 곧 그 미소는 다시 엄격하게 가라앉았다.
벨기에로 오신 것도, 날 만나서 붙잡으신 것도 다 그 곡 때문이었다.
세연은 평소 스타일과 달리 내가 할 법한 스타일로 타우지히의 유령선을 연주했다. 그건 세연이 직접 이실직고한 내용이니 틀림없었다.
난 그 부분이 옳다 그르다를 따질 수 없는 경계에 걸쳐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우리의 입장과 바람은 오래전부터 잘 맞아떨어지고 있었으니까. 스타일도 조금 옮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연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연주가 오롯이 세연의 머리와 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많은 오해가 있을지도 모른다. 난 차분히 말했다.
{전 그 곡을 연주해 본 적이 없어요. 그 아이가 스스로 연구한 것이에요.}
{하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연구했는지는 보면 알지 않습니까? 타우지히의 버릇도 그랬지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당신의 버릇도 그러하니까. 세연에겐 좋은 레퍼런스가 되었겠지.}
교수님은 내가 직접 한 일과 관계없다는 듯 말했다.
언뜻 들으면 마치 칭찬처럼 들린다. 하지만 교수님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점을 짚고 계셨다.
{난 그게 걱정입니다.}
{……걱정이요?}
난 멍하니 되물었다.
교수님은 그저 단순히 미숙한 내가 끼어들어서 멋대로 세연을 가르치려 들다가 잘못된 습관이라도 옮길까 봐 신경 쓰고 계신 것이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그 아이가 너무 제대로 배울까 봐 걱정 중이셨다.
난 교수님이 세연에게 줄 선물로 시계를 고르셨다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 직접 이야기하기까지 난 교수님이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