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5화
언제부터였더라. 내가 음악에 목숨을 걸게 된 게.
어린 검은 새의 기억이 더 다채롭게 느껴질 정도로 내 기억엔 오로지 피아노밖에 없었다.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사랑받길 좋아하는 다른 연주자들이 긍정적인 동기로 피아노 앞에 앉을 때, 난 피아노를 무기와 갑옷으로 삼았다.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흰 건반과 검은 건반 그리고 흰 악보와 검은 음표. 흑백으로만 모든 것이 구성되어 있는 세계에서 난 그것들로 어떻게든 색깔을 만들어 보려 애썼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그 미친 짓이 다른 연주자들과 나 사이에 차이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별로 다르진 않지…….’
난 요즘도 피아노로 할 법한 미친 짓이라면 앞장서서 무엇이든 시도해 보려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연습을 살짝 보여 주었을 때, 목소리를 기준으로 손을 튜닝하자 모두들 기겁했었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기초 중의 기초에 불과하다.
혼자서 연습할 때 내가 시도하는 것들 중엔 누군가에게 보여 주지도 못할 정도로 기이한 것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도전적으로 피아노를 마주하면서도 내 마음은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지금은 흑백에서 색을 뽑아내는 것보다는 기존에 있는 색들의 가치를 아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덕분에 난 미친 짓들을 하면서도 완전히 미치지는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용히 내 과거와 음악을 돌이켜 보고 있자 교수님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어 말했다.
{당신의 수준을 문제 삼는 게 아닙니다. 그 나이에 심원한 음악성과 실력을 지니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들어 보면 알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당신은 세연이에게 좋은 라이벌이자 좋은 레퍼런스가 되어 주기까지 했고.}
{……예.}
{세연이에게 있어서 당신의 존재는 정말 천운과도 같습니다. 만약 내가 혼자 가르쳤다면 세연이는 절대로 지금 이곳까지 못 왔겠죠.}
교수님은 날 정말 높게 평가하고 계셨다. 단순히 세연과 교류하는 친구가 아니라…… 어쩌면 선배 같은 것으로 보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런 관점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해일처럼 밀려오는 죄악감이 그 모든 것을 싸늘하게 덮어 버렸다.
난 그런 입장을 바라선 안 된다. 그 부분만큼은 지켜야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두근거리는 욕심을 느낀다.
새카만 죄의 바다가 발목을 적시는 걸 느끼면서도 난 입을 열어 교수님의 발언을 막거나 하지 못했다.
교수님은 확고한 관점으로 나와 세연을 평가하셨다.
{세연이는 지금 일반적인 학습과 성장을 명백하게 뛰어넘고 있죠. 피아노에 깊게 몰두하는 당신을 따르면서…….}
하지만 그 끝의 결론은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좀 위험합니다.}
심장이 멈춰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난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을 것이란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내 욕심을 우선하며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란 사람은 괴로움 끝에 간신히 있을 자리를 찾았지만 세연이라면 아마 문제 없이 잘 해낼 것이라고 믿으며.
그러나 그 괴로움을 맛본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교수님은 매우 신중한 태도로 세연의 상태를 진단했다.
그리고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날 무척이나 고평가하지만, 이대로 세연이 나 같은 연주자가 되는 건 반대하시는 것이다.
난 교수님을 안심시켜 드릴 수 없었다.
{…….}
그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죄와 후회를 온몸으로 견디고 있자니 교수님이 이어 말씀하셨다. 약간 의아해하시는 모습이었다.
{내가 지금 이상한 소리를 했는데도 대체 뭐가 위험하냐고 묻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난 내가 일반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이하고 극한의 상황을 겪으며 죽지 못해서 강해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운명론자가 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던 난 지금도 존재의 이유를 찾아 움직이고 있다.
나름대로 적당한 균형을 찾아서 지금은 괜찮지만, 이렇게 되기까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제가 피아노를 대하는 방식은 무척 편협해요. 깊고 맹목적이죠. 전 후배들에게 이야기할 때도 절 닮으면 안 된다고 매번 이야기해 왔어요.}
{스스로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알고 있었다. 난 누군가의 모범이 되거나 가르칠 사람이 못 된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에게 가끔 피아노를 가르쳐 주어야 할 일이 있어도 기술적인 부분만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세연은 특별했다.
{그런데 세연에겐 왜 그랬을까요……. 저도 어떤 이끌림을 느꼈기 때문이겠죠. 그 아이에게…….}
{세연이가 적극적으로 배우려 했을 테고, 그걸 거절하긴 쉽지 않았을 겁니다.}
{……맞아요.}
세연의 연주에 놀랐고, 박 교수님의 제자란 사실에 인연의 무서움을 느꼈다.
처음엔 그녀에게 무언가 가르쳐 주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조심해야겠다는 마음이 훨씬 더 컸다.
그 어떤 관계도 이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적당히 피하면서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세연에게서 인연을 느낀 것처럼 그녀 역시 내게서 무언가를 느끼며 끊임없이 다가오려 했다.
결국 나도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입장 정리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지금이다.
세연이 좋은 연주자가 된다면 그게 작은 속죄라도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교수님은 과거의 후회를 떠올리셨다.
깊은 회한이 서린 목소리로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런데 난 예전에 큰 실패를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걱정이 많이 되더군요.}
구체적으로 언제 겪은 어떤 실패인지 말씀해 주시진 않았지만,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침묵했다.
‘아니야……. 달라…….’
나와 세연은 다르다. 그녀는 고독하지 않고 낙천적이다. 밝고 솔직하고 늘 적극적으로 배우려 한다.
난 세연이라면 나보다 훨씬 더 현명하게 자신의 음악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증명해야 할 국제 콩쿠르 무대에서 세연은 내 스타일을 따라 해 봤다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성격은 다르지만 음악적인 부분에서 그리고 연주자로서 나와 세연은 닮은 부분이 많다. 특정한 무언가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는 것마저도.
그 부분을 교수님은 심각하게 생각하셨다.
인격적인 성장이 부족한 상황에서 연주자로서의 정체성이 모든 걸 지배해 버리고, 혹여나 세연도 피아노에 모든 걸 바치게 될까 봐 두려워하셨다.
교수님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는 사실이 날 후려쳐서 무너뜨렸다.
‘내가…….’
죄를 갚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인연이 이어져 간다면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교수님이 세연을 보며 위안을 받길 바랐다.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얄팍한 바람이었다.
교수님은 과거를 송두리째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계셨다. 망령이 되어 버릴 정도로 지독한 연주자는 결코 옳지 않다고 판단하셨다.
그래서 세연은 그렇게 키우지 않으시려는 것이다.
울컥하는 무언가가 목을 꽉 채웠다. 떨리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감춰야만 했다. 자꾸 튀어나올 때마다 간신히 막아 냈던 감정들이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이성은 교수님의 단호한 판단이 지당하다고 생각하며 내 스스로의 목을 졸랐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시야도 흐릿해졌다. 앞이 잘 안 보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재미있어하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이런 템포는…….}
{죄송합니다.}
해선 안 될 짓이었다. 나 자신이 결코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부렸던 과한 욕심은 곧 부메랑처럼 벌이 되어 돌아왔다.
난 어깨를 덜덜 떨며 용서를 빌었다.
{제가 생각이 짧고 이기적이었어요. 죄송합니다.}
{……타티아나?}
{다, 다신 주제 넘는 짓 하지 않겠습니다…….}
울먹이며 말을 마치자 눈물이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이런 모습을 보이면 절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 깊숙이 무언가 틀어박혀 있었다.
{잠깐만요. 이봐, 진정하고…….}
교수님은 당황하며 냅킨을 뽑아 내밀었다. 하지만 난 그걸 받아 들 정신도 없었다.
{화내거나 했던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어쩔 줄 몰라 하시는 모습을 보니 더욱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난 바보같이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다시 죄송하다고 빌어야 하는데.
{화를 내고 싶으시잖아요.}
{내가 왜? 아닙니다, 전혀.}
교수님은 딱 잘라 말하고는 여전히 당혹스러움이 역력한 모습으로 빠르게 말씀하셨다.
{전 타티아나에게 고마운 마음밖에 없어요. 내가 걱정이 된다고 했던 건 세연이가 본인의 템포가 아닌 타티아나의 템포를 따르다가…… 혹시 번아웃 같은 게 올까 봐 걱정한 거고.}
{아니에요……. 그게 아니시잖아요…….}
{내가 이런 걱정을 한다는 걸 세연이가 들으면 아마 어이없어할 겁니다.}
{그게 아닌…….}
겨우 그런 것이었으면 벨기에로 직접 오시진 않았을 테고, 시계에 의미를 담아 세연에게 선물하실 이유도 없다.
난 교수님이 상당히 진지한 걱정을 하고 계시다는 걸 안다. 그 원인은 나였고.
엉망진창이다. 인연을 느끼고 세연과 가까워지더라도 음악은 그냥 놓아 두었어야 했는데. 결국 연주자로서의 본성에 휩쓸린 나는 멋대로 굴어 버렸다.
당장 이곳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세연이 엄청나게 동요할 것이다.
심지어 내가 교수님과 만나고 나서 울며 도망쳤다는 말을 들으면 세연과 교수님의 사이도 이상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무책임한 짓을 저지를 순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게다가 지금 다른 사람들이 보기라도 한다면 교수님이 곤란해진다. 하지만 좀처럼 눈물이 멎질 않았다.
「내가 너무 취조를 했나……. 왜 이렇게 겁을 먹었는지…….」
교수님은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즐겁게 식사하는 사람들이 이루는 소음 속에서 한참이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난 간신히 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이 이상 민폐나 끼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냅킨으로 눈가를 닦아 내고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다시 분명하게 말하는데, 세연이가 무턱대고 타티아나를 따른다고 해서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두 사람은 정말 잘해 왔어요.}
{하지만…….}
{그냥 들어요. 만약 내가 탐탁지 않게 여겼다면 세연이를 이 콩쿠르에 참가시켰겠습니까? 아무튼 두 사람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전혀 없고, 단지 내가 나이 많은 교수라서 기우가 심할 뿐입니다.}
교수님의 걱정이 근거 없는 것이었다면 아마 난 자신 있게 세연이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교수님의 말을 듣자마자 반론을 모두 포기해 버린 것은 오래전부터 세연에게 간섭하는 것에 대해 나 스스로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다시 돌이켜 본 지금, 난 지독한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교수님은 슬쩍 내 표정을 살피더니 이어 말했다.
{내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타티아나도 이해하고 있다는 걸 확인까지 했고……. 그럼 됐습니다. 앞으로도 잘해 나가길 바랍니다.}
절대 그냥 이렇게 마무리 지을 일이 아니다. 교수님은 단지 지금 날 달래기 위해 가볍게 이야기하고 계실 뿐이다.
속으론 얼마나 많은 고뇌와 걱정을 하고 계실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일단 약속을 해야 한다. 난 잔뜩 메인 목으로 말했다.
{제가 오만했어요. 다신 세연에게 관여하지 않을 테니…….}
{이제 와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이미 내가 어떻게 할 단계도 지났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내게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 내가 어떤 연주자인지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이셨다.
{그리고 친구 아닙니까.}
{친구…….}
{서로를 지켜봐 줄 수 있다면 괜찮을 겁니다.}
난 말없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무작정 세연과 멀어지겠다고 하더라도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세연은 날 너무 잘 파악하고 있다.
아마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난 그녀에게 져 줄 수밖에 없겠지.
그럼에도 내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 밀쳐 낸다면 그녀가 받을 충격은 예전과 비할 바가 안 될 정도로 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래 하던 대로 내 욕심을 그대로 밀어붙이면 교수님의 걱정대로 세연이 불균형한 연주자가 될지도 모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머리가 너무 복잡해져서 멍하니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있자 교수님이 물었다.
{그보다, 식사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무언가 먹을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교수님은 먼저 의자를 뒤로 밀었다.
{나가는 게 좋겠군요.}
이미 시킨 주문은요?
눈빛으로 물어도 교수님은 상관없다는 듯 일어서선 날 내려다보았다. 나는 물끄러미 그 눈빛을 마주하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