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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26화 (1,126/1,277)

##  1126화

교수님은 지나가던 웨이터와 무어라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아마 주문한 요리를 취소해 달라는 요청인 것으로 보였다.

웨이터는 상당히 곤란해했지만 교수님이 지갑을 꺼내 돈을 건네자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 같아…….’

난 우울했다. 정신적으로 조금 의연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블라디보스토크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땐 리허설을 망쳤고, 이번엔 저녁 식사를 망쳤다.

여기서 더 뭔가 수습하려 해 봐야 의미가 없었다.

눈물을 보이는 바람에 교수님은 날 이제 음악가가 아니라 그냥 세연의 친구로 보고 있었다. 명칭부터가 달라졌고, 아까와는 확연하게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아마 교수님은 날 다정하게 대하려 애쓰시겠지. 결국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지 못하고 망쳐 버린 것이다.

난 스스로가 끔찍했다. 결국 피아노 연주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구나.

앞으로 교수님을 또 보게 되더라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심지어 세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들여 결정했던 내 입장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 있었다.

멍하게 서 있던 나는 레스토랑 입구 쪽으로 몇 걸음 앞서 나가다가 돌아보시는 교수님과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발을 움직일 수 있었다.

{…….}

레스토랑 밖으로 나온 교수님과 난 입구 옆에 나란히 섰다.

거리엔 사람들이 많았다. 저녁 시간인데 날이 꽤 밝아서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많은 느낌이었다.

이 많은 사람 중에 지금 나와 교수님 만큼 특수한 관계인 사람들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 같다.

그러니 누굴 잡고 묻더라도 지금 이 상황의 답을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교수님은 여전히 난처해하시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 말 없이 이대로 헤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지 조심스레 내게 말을 붙이셨다.

{이제 와서 말도 안 되는 변명 좀 하자면…… 어쩐지 당신이라면 내 생각을 잘 이해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조용히 돌아보자 교수님은 거리를 보고 있는 상태 그대로 이어 말씀하셨다.

{내가 한참이나 방황하다가 세연이를 찾아내고는 제자로 들인 것처럼…… 아마 당신도 그 아이를 보자마자 비슷한 기분을 느낀 게 아닌가 해서…….}

그 애와 내가 친구라는 걸 완전히 차치하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음악가의 시선으로 세연을 봤을 때 나와 교수님이 공통적으로 느낄 만한 부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세연이 지닌 음악적 감각 그 자체였다.

심지어 난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쇼팽의 마주르카를 연주하는 것을 듣고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울기까지 했다. 세연은 반대로 내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우린 서로 공명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걸 교수님도 모르실 리 없다.

난 그걸 길게 이야기할 상황은 아닌 것 같아서 짧게 답했다.

{제가 세연과 리듬감이 닮아 있다는 건 알아요.}

{역시 그랬군요. 음…… 그래, 이런 부분에서 말이 잘 통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런 이야기나 하려고 했는데…….}

중얼거리며 말끝을 흐리던 교수님은 후회된다는 듯 귀 부근을 긁적이셨다.

{뭔가 시작을 잘못했던 것 같군요. 그렇지 않아도 불편해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제가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아뇨…… 괜찮아요.}

나야말로 죄송스러운 마음이 컸다.

착하고 뛰어난 세연을 데리고 과거 일은 잊으려 하시는 분에게 괜한 짓을 해서 실패를 떠올리게 했다. 어떻게 사죄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지금 내 감정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난 입술을 깨물며 심적인 고통을 잊으려 애썼다.

교수님은 어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붙잡아서 이상한 소리나 하고…… 밥도 못 먹게 했군.}

교수님이 모두 자기 탓이라는 듯 말씀하시며 날 돌아보았다. 난 물고 있던 입술을 얼른 놓으며 시선을 피했다.

{방금 했던 이야기들은 그냥 잊고, 돌아가면 식사 꼭 챙겼으면 좋겠군요.}

{……예.}

{아, 그리고.}

교수님은 무척 조심스럽게 덧붙여 부탁했다.

{또 미안한 이야기인데, 오늘 만난 건 세연이에겐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럴게요.}

{이해해 줘서 고맙군요.}

사실 부탁이랄 것도 없었다. 세연이 이런 만남을 절대 좋아하지 않으리란 건 이미 아까 내가 말했던 것이었으니까.

내가 가볍게 받아들이자 교수님은 다시 할 말이 없다는 듯 정면을 바라보셨다.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한참이나 흘렀다. 그동안 나와 교수님은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거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눈치를 보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지금 생각할 것이 많을 뿐이었다.

잠시 후 교수님이 먼저 물었다.

{택시를 불러 줄까요?}

{괜찮아요. 조금만 있다가…… 제 사람을 부를게요.}

난 지금 어지러운 생각은 물론이고 감정도 추슬러야 해서 당장 빅토르를 볼 자신이 없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교수님은 이런 날 두고 먼저 갈 생각은 없다는 듯 아예 벽에 기대어 버렸다.

{그럼 저도 기다리죠.}

{먼저 가셔요.}

{아닙니다. 저도 잠깐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냥 내가 먼저 가길 기다리시는 것 같아서 그냥 지금이라도 빅토르를 부를까 했는데, 슬쩍 본 교수님의 옆얼굴엔 정말로 고뇌의 흔적이 가득했다.

방금 나와 나눈 이야기 그리고 내 반응 등에 상당히 곤란해하면서도 앞으로를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일단 지금 교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세연을 만나는 일이겠지.

그럼 세연은 깜짝 놀라면서도 교수님에게 어째서 여기까지 오셨냐고 물어볼 텐데, 교수님이 시계를 선물로 주면서 무작정 그녀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세연도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세연은 선의로 사람을 해석하려 할 뿐이지 눈치가 없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교수님은 그녀에 앞서 날 만나고 지금 이렇게 되어 버린 상황 때문에 상당히 자신감을 잃어버리신 것 같았다.

교수님은 초점 없이 앞을 바라보며 손으로 턱을 받치고 계셨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저렇게 고민하시는 것도 결국 나 때문이라 생각하니 그냥 모른 척하면 안될 것 같았다.

{혹시 세연을 보지 않고 그냥 돌아가실 건가요?}

{……음?}

내 물음에 교수님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셨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이다.

역시 여기까지 오시고도 그냥 가실 생각까지 하고 계셨다.

하지만 그래선 정작 진짜 제자인 세연을 만나지 못하고 나만 보고 가시게 되어 버린다. 그건 말도 안 된다.

난 절대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교수님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그러지 마세요. 직접 응원하러 왔다고 해 주시면 그 아이는 분명 무척 기뻐할 테니까요.}

교수님은 세연이 나처럼 패닉에 빠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시는 것 같은데, 그녀는 그렇게 약하지 않다.

아마 교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고, 오신 이유가 석연치 않더라도 분명 낙천적으로 받아들이며 다음 라운드에서 쓸 에너지로 삼을 것이다.

난 그녀가 잘 해내리라 믿었다.

무언가 말씀하시려던 교수님은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셨다.

{알겠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먹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세연을 만나기로 결정한 데에 변경은 없는 것 같다.

교수님과 세연이 만나는 건 콩쿠르에 참가 중인 세연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반대로 교수님에게도 큰 위안이 되리라.

지금 교수님에게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세연이었다.

난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들끊던 감정들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스마트폰을 들어 빅토르를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앞에 빅토르가 차를 몰고 왔다. 난 앞으로 한 걸음 내딛고는 살짝 몸을 돌리며 인사했다.

{먼저 갈게요.}

{오늘 미안했습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실례했습니다.}

더 많은 말은 할 수 없었다. 난 거리에 선 채 잠시 교수님을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차로 향했다.

뒷좌석에 오르자 빅토르가 룸미러로 확인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 날 바라보며 물었다.

“……아가씨? 얼굴이 왜 그렇습니까?”

“뭐가요?”

“엉망이신데. 뭡니까? 식사를 다 했을 시간도 아니고……. 저 영감이 무슨 말을 한 겁니까?”

슬슬 괜찮다고 생각해서 빅토르를 부른 건데, 그의 눈을 속일 순 없었나 보다.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부러 그는 불량스러운 어투로 내게 물었다. 문제가 있다면 무엇이든 처리해 주겠으니 말만 하라는 투였다.

물론 그가 나설 일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난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서 그냥 얼버무렸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대화를 나누다가 제가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져서…….”

“그러고 보니 저 사람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있었는데, 그때 아가씨…….”

“빅토르, 오해예요.”

그동안 전혀 말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빅토르는 박 교수님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내 상태가 안 좋았던 것에 대해서도 단순히 대체 연주자로서 예술 감독까지 맡게 되어 부담감 때문에 컨디션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파악했던 것 같다.

난 그의 예리함에 놀라면서도 당황했다. 혹시라도 빅토르가 교수님을 문제 삼으면 안 된다. 난 빠르게 말했다.

“그냥…… 아시잖아요? 저 가끔 이상한 거. 그냥 그런 거에요. 그러니까…… 저분에게서 원인을 찾으려 하지 말아 주세요. 제 문제예요.”

“…….”

여전히 제대로 된 설명은 아니었다. 빅토르는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며 날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무척 걱정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부끄럽고 미안하다. 난 가슴을 찌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최대한 태연하게 보이기 위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빅토르는 다시 선글라스를 쓰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자기 탓만 하시고. 그럼 아가씨 억울한 건 누가 풀어 줍니까?”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난 내가 조금 억울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공고히 가지고 있었기에 스스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건 날 더욱 한심하게 만들 뿐이었다.

난 입을 열어 다시 한번 스스로를 규정지었다.

“전 억울하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어이가 없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화내 줘서 고마워요.”

“아, 진짜.”

빅토르는 답답하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난 그저 웃기만 했다. 이번엔 거짓 웃음이 아니라 정말 고마움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이었다.

그걸 본 빅토르는 결국 다시 앞을 보고 핸들을 잡더니 내게 제안했다.

“지금 들어가 봤자 집주인께서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할 텐데, 그냥 드라이브나 좀 할까요?”

그가 없었으면 정말 어땠을까.

난 내 주변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도 없었더라면 지금 내가 이렇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빅토르가 없는 건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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