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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27화 (1,127/1,277)

##  1127화

무서운 고함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하지만 난 움찔거리지도 않고 고개를 치켜들고 앞을 쳐다보았다.

눈앞엔 조금 더 어리고 분노한 루슬란 오빠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오빠는 내가 한 모욕적인 말들을 취소하고 사과하길 바라고 있었다. 난 그 말을 듣지 않고 더더욱 비웃었다.

‘꿈이구나.’

검은 새가 기억을 건네주고 간 뒤로 난 과거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알 수 있었다.

이런 기억은 검은 새도 후회로 인식하고 있는 기억인데, 전부 내게 주었다는 건 그만큼 그녀가 날 믿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기억들은 내게 아픔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지금도 난 오빠나 아버지의 얼굴을 볼 때면 책임감뿐만 아니라 미안함도 느끼곤 하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옛 기억들이 꿈까지 침범하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짐작하건대 검은 새의 배려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잠자리에 들 때마다 무방비로 두 개의 기억에서 오는 악몽을 번갈아 가며 받아들여야 했다면 제아무리 강인하게 버텨 보려고 했어도 결국 언젠가 미쳐 버렸겠지.

그런데 왜 지금은 이런 악몽이 날 덮친 걸까.

‘왜긴 왜겠어…….’

스스로 한 질문에 조소했다.

어제 있었던 일은 내 정신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때문에 정신적으로 무척 약해진 상태에서 검은 새의 일까지 떠올리게 된 것 같았다.

검은 새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동질감을 느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예전 일 때문에 오빠와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약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으니까. 나를 볼 때면 조심스러워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는 최대한 줄이려고 한다.

과거 이야기를 완전히 묻어 두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 역시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지독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나도 검은 새도 인간으로서 글러 먹었다.

‘왜 이렇게 한심할까.’

꿈을 자각하고 있는 난 검은 새의 기억으로부터 동조를 얻으려는 얄팍하고 야비한 내가 너무나 한심했다.

자괴감에 휩싸여 서 있자 앞에 있는 루슬란 오빠가 더더욱 거세게 날 힐난했다. 꿈이지만 내 행동에 반응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정말 선명했다.

지금의 다정한 오빠와 비교하면 완전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난 그게 오빠가 혼자서 바뀐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화해로 관계를 바로잡고 트라우마를 회복하기 위한 내 여러 노력이 있었던 덕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수님과의 일은 더 엉망진창이었다. 왜냐하면 회복할 기회도 없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었는데…….’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격이 없다고 수천 번 되새겼다.

그런데도 난 어쩌면 모든 걸 조금이라도 좋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세연과 조금씩 거리를 좁혀 갔다.

음악가로서 갚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전제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내 음악은 옮아 가면 안 되는 거였어.’

염치없이 음악의 계승을 바라거나 대속을 바라면 안 된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저 단순하게, 내 음악과 태도는 사람을 망치게 되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난 신실한 음악의 신자다. 실존이자 기적인 음악의 가치를 그 무엇보다 위에 놓고 그것으로 세상을 재단해 왔다.

그건 타인은 물론이고 나 자신의 가치를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내 기준이 광신에 가깝다는 건 잘 안다. 그리고 광신자는 전도 같은 걸 하면 안 된다. 때문에 난 단지 음악의 좋은 효용만을 널리 선도하고자 했다.

세연에게도 그렇게 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난 그녀가 나와 닮은 것 같다고 생각해서 결국 이쪽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녀를 완성시키고자 했다.

여기서 문제는 세연이 정말 나와 비슷한 깊이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었고, 교수님은 그걸 알고도 세연을 들여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가르치려고 하셨다는 점이었다.

교수님이 그리하신 이유는 명확했다. 내가 틀렸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아무리 음악의 충실한 신자가 되더라도 사람으로서 실패했다면 의미가 없음을 확고히 하셨다. 한 번의 실패로 분명하게 깨달으신 것이다.

그런데 난 왜 세연에게 똑같은 짓을 하려고 했지?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야…….’

나도 깨달은 바가 없진 않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되고 싶었다. 그리고 세연을 대속의 도구로 본 적도 없다. 난 그녀가 좋았고, 진짜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행동을 다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지금, 난 스스로를 설명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분명히 좋은 의도를 가지고 열심히 생각해서 최선을 다했다. 난 잘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은 이렇게 또다시 제자리다.

세연은 내 방식에 조금씩 물들어 가고 있었고, 그것은 교수님에게 강한 트라우마를 불러일으켰다.

어제 울었던 건 나였지만 사실 훨씬 더 위태로웠던 건 교수님이었으리라.

대체 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뿐만이 아니지…….’

날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에 대해서도 난 못 할 짓을 너무 많이 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죄책감이 있음에도 여전히 난 음악을 더 우선시하고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을 대체 왜 좋아해 주는 걸까.

‘난 내가…….’

내 앞에 성큼 다가온 루슬란 오빠 앞에서 무어라 입을 열려던 나는 순간적으로 다음 말을 뱉으면 안 된다고 강하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꿈을 의식하고 있었던 덕분인지 난 바로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헉…… 헉…….”

숨이 잘 안 쉬어진다. 무언가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난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선 깊게 심호흡했다.

조금 진정된 다음에 눈을 뜨니 아직 새벽이었다.

근래 1년 넘게 꿈을 꾸는 일 자체가 굉장히 드물었고, 항상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었는데……. 그런 좋은 컨디션도 이제 끝장인가 보다.

자면서도 생각을 너무 많이 한 탓인지 머리가 맑지 않았다. 무겁게 찾아오는 우울함 역시 끔찍했다. 너무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난 거의 버릇처럼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컨디션이 망가진 상태에서도 난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해 왔다. 그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나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는 건 좋은 걸까.”

무심코 중얼거리면서 난 팔에 이어 다리도 천천히 스트레칭했다.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가 있는 건 머리였다.

멍하니 기계처럼 스트레칭을 하던 나는 머릿속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늘 하던 대로 복잡한 생각은 미뤄 놓고 당장 해야 할 일과 좋았던 일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당연히 당장 중요한 건 모레로 다가온 내 콩쿠르 무대다. 그걸 망친다면 교수님이 일말의 책임을 느끼실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안 된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일단 의욕이 생겼다. 그리고 어제 빅토르와 했던 저녁 드라이브도 내 기분을 낫게 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후후후.”

어제 저녁은 데보라 아주머니께 저녁 식사를 하고 가겠다고 전한 후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밖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할 상황이긴 했지만, 난 식욕이 전혀 없어서 그냥 굶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빅토르는 배고프다며 근처 햄버거 가게로 차를 몰고 갔다.

내가 식욕이 없다고 해서 빅토르까지 굶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빅토르는 자기 혼자 먹을 순 없다고 생각했는지 끈질기게 내게 무언가 주문하라며 압박을 주었다.

난 정 그렇다면 빅토르가 세트 메뉴를 시키면 감자튀김 두어 개만 먹겠다고 말했고, 빅토르는 절대로 세 개 이상 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우린 한참을 티격태격했지만 내가 정말로 말했던 대로 감자튀김을 두 개만 먹고 손을 놓자 빅토르는 새 모이를 줘도 이것보단 더 주겠다며 날 놀렸다.

빅토르도 유치한 장난과 농담 대신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건 전혀 묻지 않고 오로지 내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애썼다. 그런 그를 위해서라도 지금 침울해 있으면 안 된다.

“복습이나 할까.”

피아노 연습을 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그래서 난 태블릿 컴퓨터를 가지고 와선 악보를 띄워 놓고 천천히 다시 읽기 시작했다.

물론 피아노로 직접 소리를 내 보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이미 난 이 곡들을 머릿속으로 모의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익혀 둔 상태였다.

그중 가장 완성도 높다고 평가했던 음악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다시 악보와 맞춰 보다 보니 점점 세상에 있던 것들이 하나씩 지워지기 시작했다.

창밖의 달이 지워지고, 창문이 지워지며 벽장이 사라졌다. 이내 책상과 의자가 없어지고 이 방 자체가 내 인식으로부터 삭제되었다.

덮고 있던 이불과 앉은 침대까지 희미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음악에 깊게 몰두하고 있을 때 난 굉장한 희열과 기쁨을 느껴 왔다.

하지만 지금은 덜컥하고 심장 어딘가에서 강하게 찌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교수님이 하셨던 말들이 자꾸만 빙글빙글 돈다.

‘그 아이는 다른 길을 간다고 쳐……. 그러면 이미 이런 음악밖에 할 줄 모르는 나는?’

다른 방법 같은 건 모른다. 난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은 이런 날 인정하며 내가 재능과 노력으로 온전하게 이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난 이만한 실력을 갖춘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생각한다.

신체적 재능이 그리 좋지 않아 지금도 수없이 한계에 막히고 그것을 부수는 것을 반복해야만 간신히 지켜 나갈 수 있는 실력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연주자로서 진짜 바닥을 확인했을 때, 사람으로서 문제가 있는 내가 무엇을 하게 될까.

난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바닷가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껍데기를 탈피하는 한 영생하지만, 점점 단단해지는 껍데기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그것이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물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난 죽지 못하겠지만 이렇게 죽음을 이미지하며 음악에 목숨을 걸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교수님이 옳다는 방증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와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마음속으로 난 스스로를 다그쳤다.

내가 잘못되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안다. 이런 광신자는 위험하다. 누군가를 내 방식대로 설득하거나 가르치면 안 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피해 홀로 음악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내겐 좋은 친구들과 선생님들, 동료 음악가들이 있다.

이 믿음직스러운 사람들과 함께라면 이런 나라도 연주자로서 활동하며 좋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사람으로서도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막연히 그런 생각으로 이렇게 달려왔다. 그리고 실제로 나아진 부분들도 많이 있었고.

‘조금 더 조심하면 괜찮을 거야.’

지금 갑자기 세연을 멀리할 순 없다. 그랬다간 세연도 힘겹겠지만 내가 못 견딘다.

난 여전히 그 아이의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교수님은 세연을 나처럼 음악밖에 모르는 고집불통이 아니라 훨씬 균형 잡힌 음악가로 키우실 생각인 것 같다. 난 진심으로 두 사제를 응원했다.

다시 한번 스스로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난 이기심과 욕심을 내려놓았다.

“난 나대로 끝을 봐야겠지…….”

중얼거리면서 난 다시 태블릿 컴퓨터를 들었다. 그리고 악보 속으로 보이는 세계로 깊게 빠져들었다.

***

전날인 수요일은 하루 종일 음악 연습만 하면서 보냈다.

혼자서 쓸 시간이 많다 보니 생각도 조금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중요한 내 입장을 떠올렸다.

지금 난 흔들려선 안 된다. 날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세연과 아나스타샤는 내게 예민하게 반응한다.

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같이 휩쓸릴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 아이들 앞에선 의연하게 있어야만 하는데, 마침 오늘은 아나스타샤의 생일이라서 모이기로 한 날이었다.

“문제없어.”

거울을 보고 다시 한번 얼굴을 확인한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아나스타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출발할게요.]

-[세연 임도 지금 출발한다고 하네. 조심해서 와.]

어제 세연은 교수님과 만났을까. 딱히 내게 아무런 연락도 없었기에 알 수 없었지만…… 오늘 보면 알게 되겠지.

난 마음의 준비를 마친 뒤 차분히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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