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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28화 (1,128/1,277)

##  1128화

신호에 걸려 차가 잠깐 멈춰 선 사이 빅토르가 물었다.

“아나스타샤 아가씨 생일엔 세 분만 모이신다고요?”

“예.”

생각 같아선 이곳에서 친해진 레티시아나 이연주, 양지은도 모두 초대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점심에 나와 세연만 초대해 만나기로 했다. 이건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다.

“점심 식사만 함께하려고요.”

“내일이 중요한 날이니…… 이해는 가지만 조금 아쉬우시겠군요.”

시간을 길게 쓸 수 없는 상황이니 점심은 친구들끼리 먹고, 저녁엔 샤르베가의 사람들이 다시 한번 그녀를 축하해 줄 예정이라 들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아쉽긴 하지만 괜찮아요. 전 직접 보고 축하해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요.”

“기쁘십니까?”

“만약 저나 아나스타샤 둘 중 한 명만 이곳에 왔다면 직접 축하해 주진 못했을 테니까요.”

“그것도 그렇군요.”

전화로 축하해 주는 것엔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선물도 제대로 줄 수 없고.

우편이나 소포도 늦을 테니 즉각적으로 가능한 건 돈을 보내는 것 정도뿐이다.

만약 그녀의 계좌로 돈을 송금하면 뭐라고 할까? 아마 엄청 화내지 않을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실실 웃고 있자 신호등이 바뀌었다. 빅토르는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키며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난 상당히 기분이 들쑥날쑥했지만, 그래도 하루 여유를 가진 덕분에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뚜렷한 목표와 지켜야 할 친구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힘들 틈도 없었다.

물론 나 혼자 잘나서 버텨 낸 건 아니다.

“그건 빅토르 덕분이기도 해요.”

“예?”

이렇게 말하자면 조금 부끄럽지만…… 그는 내가 힘들어 했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라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해 봤자 소용없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똑바로 전하기로 했다.

“기운 많이 났어요. 정말로요.”

“……그러십니까.”

빅토르는 이 이상 날 위로하거나 챙기려 하지 않았다. 말을 더 길게 하면 나를 아이 취급하는 것에 가까워진다는 걸 아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에서도 빅토르의 깊은 배려심이 느껴져서 좋았다.

히죽거리며 웃자 그는 갑자기 태도를 싹 바꾸더니 얄밉게 물었다.

“오늘도 감자튀김 두 개만 드시는 건 아니겠죠?“

“사람이 그것만 먹고 어떻게 사나요?”

“그럼 세 개?”

“지금 저 다이어트 하라고 압박이라도 주시는 거예요?”

“아, 아닙니다.”

평소 하듯 빅토르와 농담을 주고받는 건 즐거웠다. 그런데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그가 난처해했다.

먼저 놀자고 했으면서 갑자기 치사하게 이러는 게 어디 있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빅토르가 진지하게 말했다.

“아가씨. 지금 거기서 1kg이라도 빠지면 유리 님이 절 죽일 겁니다.”

“그건 아버지가 너무하신 것 같은데요…….”

“농담 아닙니다.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정말요?”

멀리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니 빅토르에게 부탁할 일도 많았을 테고, 그중엔 내 건강 관리도 있었겠지만…… 더 마르게 않게 신경 쓰란 말도 하신 모양이다.

점심엔 할 수 있는 한 양껏 먹고 테이블을 사진 찍어 아버지에게 보내 드리기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내일 무대에서 잘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도 좋겠지만, 아버지는 내가 피아노 연주자로서 잘하는 것보다는 잘 먹고 잘 지내는 모습을 확인하시는 걸로 안심하실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기분이 든다. 아버지는 내가 연주자라서 관심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아마 내가 미술을 하거나 아니면 그냥 공부를 했더라도 열심히 하고 행복해만 한다면 기뻐하셨겠지.

멍하니 생각하던 난 순간 깨달았다. 바로 이런 부분을 인지하는 것이 일단 사람으로서 제대로 된다는 의미라는 걸.

‘세연은 이미 그런 사람이겠지…….’

세연은 정말 중요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따르는 평범한 아이다. 그런 그녀를 내가 비틀어 놓으려 하다니. 교수님이 기함하실 만도 하다.

쓴웃음을 지으며 난 뒤로 기대었다.

이틀 동안 깊게 생각해 봐도 명백했다. 교수님이 옳고 내가 틀렸다. 다시 그것을 확고하게 새기며 난 차분하게 마음을 정돈했다.

“슬슬 다 왔습니다, 아가씨.”

빅토르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웃고 농담하길 30분 정도. 아나스타샤가 메시지로 보내 준 주소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레스토랑이었다. 이런 곳을 생일 파티장으로 예약하다니.

아나스타샤가 정말 깔끔하게 식사만으로 끝낼 생각이란 것이 느껴졌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웨이터가 다가왔다.

{자리로 안내해 드릴까요?}

{예약 있어요.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의 동행이에요.}

{아,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자 조금 더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곳곳에 점심 식사 중인 사람들이 있었고 햇볕 드는 창가 쪽에 익숙한 두 명이 한창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난 허리를 곧게 펴고 가벼운 미소와 함께 그쪽으로 향했다.

“아나스타샤, 세연.”

“어서 와.”

{타티아나! 금방 왔네?}

두 사람을 보니 내 고민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의자를 빼고 앉아선 고개를 들고 조금 더 자세히 세연과 아나스타샤를 보았다. 세연은 여느 때와 같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다.

잔뜩 들떠선 수다를 떨고 싶어 안달하는 모습이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오기 전까지 세연과 이야기하면서 즐거웠는지 느긋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좋은 곳을 예약하셨네요. 멋져요.}

{우리 집 아주머니가 추천해 주시더라고.}

세연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영어로 소통한다.

아나스타샤도 이곳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 듯 보였다.

{내 생일 파티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점심 먹으면서 재미있게 놀다가 갔으면 좋겠어.}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번 지켜야 할 부분을 확실하게 못 박았다.

아무리 분위기도 좋고 친구들과 생일을 축하하며 놀고 싶더라도 우린 오늘 하루를 잘 쪼개어 써야만 했다.

조금 아쉽다는 듯 세연이 중얼거렸다.

{너희가 순서만 조금 앞이었으면…….}

{그래도 끝난 게 아니니까 시간을 많이 빼진 못 했을 거야.}

{그건 그렇지만…….}

만약 우리 세 명이 모두 다 첫 무대를 마쳤다고 하더라도 마냥 놀긴 어려웠겠지. 여유가 있다고 한들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만이 남았을 뿐이니까.

그런데 세연은 후련한 표정으로 의자에 축 늘어지며 말했다.

{근데 어쨌건 첫 번째 무대 마치고 나니까 속 편한 건 있다? 나 첫날 연주 끝내 놓고 지금까지 연습 하나도 못 했어.}

{어라? 견제하니?}

{아니 진짜로! 그냥 온종일 집중 안 되고 산만해.}

아나스타샤의 농담에 세연은 제발 믿어 달라는 듯 테이블을 탁탁 때리기까지 했다.

만약 그 말대로라면 심각했다.

연주한 당일은 그렇다 쳐도 월화수 사흘의 시간을 유리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건 그대로 손해로 이어질 테니까. 실력 저하는 느슨한 마음가짐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그리 심각하게 듣지 않고 웃으며 한마디 했다.

{그래서 네 교수님이 정신 잡아 주려고 오셨나 보다.}

{아하하하, 그런가 봐!}

친구들을 만나서 풀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파악하기 시작했다.

마침 세연이 보다 정확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이야기 안 했지? 타티아나. 있잖아, 우리 교수님 브뤼셀에 오셨다?}

{저번에 뵈었던 분 말씀이신가요?}

{응! 기억나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수님은 제대로 세연에게 비밀을 지켰다. 나 역시 적당히 모르는 척을 할 필요가 있었다.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와 교수님이 나누었던 이야기는 단 한 조각도 세연에게 들려줄 수 없었으니까.

시치미를 뚝 떼고 묻자 아무것도 모르는 세연은 흥분하며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어제 갑자기 찾아오셨길래 진짜 깜짝 놀랐지 뭐야? 보통은 이렇게까지 하시지 않잖아? 우리 부모님도 안 오셨는데.}

{저희 선생님들도 못 오셨어요.}

{그치? 그런데 마침 벨기에에 올 일도 있으시고, 나도 만나고 싶어서 오셨다고 하더라고.}

벨기에의 일이란 건 핑계였다. 정말 거짓말도 잘 못 하시는 분이다.

하지만 세연은 이런 적당한 핑계도 믿고 있었다. 그녀가 교수님을 얼마나 좋아하고 신뢰하는지 절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역시 난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좋으셨겠어요.}

{아니야, 엄청 놀랐지. 혼나는 거 아닌가 걱정했다니까?}

{왜 혼나요?}

{그……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 전화로는 칭찬해 주셨는데 직접 보고 뭐라 하실 것 같은…… 그런 이상한 느낌이 들더라고.}

세연은 은근히 예리한 부분이 있었다.

물론 그럴 만한 요인이 있긴 했다. 보통 연주를 마치고 칭찬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레슨실에선 혼나고 피드백을 받는 일이 흔하니까.

교수님이 찾으면 일단 무서워하고 보는 것은 아마 학생들의 본능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로 교수님이 그저 칭찬만을 위해 세연을 찾아오신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난 교수님의 걱정을 돌이키며 눈만 내려 세연의 손목을 살폈다. 그녀의 손목엔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저 시계를 구매하면서 교수님이 하셨던 말들이 떠오른다. 저걸 차고 있는 한 세연은 조금이나마 피아노 밖의 세상을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건 교수님이 유도하는 숨겨진 목적이니 세연은 영문도 모르고 시계를 소중하게 차겠지.

그녀가 의심하지 않고 받아 든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안타깝고 가슴이 아팠다. 왜 세연과 교수님 사이에 비밀과 제약이 있어야만 하는 걸까.

그 이유야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무기력감이 내 뒷목을 잡아챘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런데 내 다음 무대도 그냥 맡기겠다고만 하시더라. 이렇게 믿어 주셔도 되나 싶을 정도더라고.}

{세연은 잘하니까요.}

너무 잘해서 문제가 될 정도다.

죄책감과 무기력감에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난 세연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가장 좋은 건 이전과 다름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다만 음악에 대해서만 태도를 바꾸면 된다.

시계에 대해서도 일부러 알아채지 못한 척 했다. 세연이 먼저 말하기도 전에 저 시계가 특별하다는 걸 먼저 알아차리는 건 굉장히 이상하다.

어지간하면 언급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세연도 굳이 시계를 자랑할 생각은 없는지 이야기의 주제를 아나스타샤의 생일 쪽으로 다시 돌렸다.

작년엔 어땠는지, 러시아에선 보통 어떤 식으로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 등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웃으면서 그녀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 주었다.

잠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사이, 웨이터가 와서 물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그가 준 영문 메뉴판을 보며 우린 적당히 각자 먹을 요리들을 골랐다. 난 모처럼 잘 먹는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고기 요리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아 가고 나서 방금 전까지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려던 찰나, 세연이 갑자기 손바닥을 쭉 내밀더니 모든 것을 중단시켰다.

{테이블에 뭐 올라오기 전에 우리 먼저 이것부터 할까!}

세연은 자기 의자 아래에서 상자를 꺼내 테이블 중앙에 내려놓았다. 상자를 여니 작고 귀여운 케이크가 나왔다.

{짜잔.}

{이런 거 하지 말라니까…….}

아나스타샤는 생일 축하를 최소한으로 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세연의 사전에 초를 불지 않는 생일은 없는 듯했다.

세연은 미리 내게 메시지를 보내 자신이 케이크를 준비할 테니 더 준비하진 말라고 통보했다.

아마 무대를 앞둔 내가 더 신경 쓰지 않게 배려한 것이리라.

아나스타샤는 곤란해했지만 그래도 세연이 초에 불을 붙이기 시작하자 곧 기쁜 미소와 함께 눈을 빛냈다.

{생일 축하합니다!}

난 세연과 함께 노래를 불러 주었고, 아나스타샤는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초를 불어서 껐다.

우리가 노래를 하고 박수를 치자 다른 테이블에서도 축하의 말들이 날아들었다.

생각보다 큰 축하를 받은 아나스타샤는 곳곳에 감사를 보냈다.

{그럼 선물 증정이 있겠습니다! 자, 나부터.}

세연은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건넸다. 아나스타샤는 확인해 봐도 되냐며 눈빛을 보냈고,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레 포장을 풀자 초콜릿 상자가 가장 위에 보였다.

{초콜릿이랑 사탕들이야. 연습할 때라든가 하나씩 먹으면 좋더라고……. 아, 이거 내가 산 거 아니다? 멜리아 아주머니가 준비하셨던 건데 너한테 줘도 되냐고 허락받고 가져온 거야. 그럼 괜찮지?}

세연도 선물로 꽤 고민한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선물을 바라지 않았으니까 억지로 안겨 주려면 적당한 것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자 선물은 아주 적절했다.

일단 새로 산 것이 아니니 거절할 명분도 줄어들고, 무엇보다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세연은 자신이 직접 산 게 아니라고 어필하면서도 그걸 아나스타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눈치를 봤다.

다행히 아나스타샤는 기분 좋게 웃었다.

{진짜 고마워. 나 그렇지 않아도 이 쿠베르동cuberdon 사려고 했었거든. 아주머니에게도 잘 먹겠다고 전해 줄래?}

{아, 그래? 그럴 줄 알았으면 내가 더 사서 줄 걸 그랬…….}

{이게 딱 좋아. 게다가 이렇게 멋진 케이크까지 준비했잖니?}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고, 세연도 비로소 안심했는지 밝은 미소를 지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제 선물도 있어요,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가 내미는 선물도 받아 들었다.

그런데 내용물을 확인하기도 전에 세연이 눈을 크게 뜨더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 어라? 그 선물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이거 뭔지 알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 포장지…… 혹시 시계 매장에서 구했어?}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단 듯 혼란스러워하는 세연을 보며 난 정말로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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