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9화
아나스타샤에게 준 선물의 포장지는 이틀 전 시계 매장에서 얻어 온 것이다.
꽤 고급스럽고 예쁜 포장지여서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고, 별생각 없이 사용했다.
‘이렇게 신중하지 못할 수가…….’
난 세연이 시계 선물을 받을 줄 알았고, 오늘 같은 자리에서 보게 되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모든 정보를 알고 있었는데도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것에 대해 난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
포장만 보고 연관성을 알아차린 세연의 눈썰미가 대단하기도 하지만…… 내가 너무 부주의했다.
‘어쩌지.’
이미 난 세연에게 거짓말을 해 버렸다.
일단 교수님과 말을 맞춰 두었으니 모르는 척 빠르게 넘어가고 언급하지 않으면 최소한의 거짓말만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연이 의심을 해 버린 이상 거짓말을 더 이어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난 가슴이 쿡쿡 찔리는 기분을 느끼며 일단 잡아뗐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잠시만…….}
세연은 고개를 앞으로 쭉 내밀더니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아나스타샤가 멍하니 들고 있는 선물을 살폈다.
그녀가 다시 확신을 가지는 데엔 3초도 채 필요하지 않았다.
{다시 봐도 똑같네. 내가 받았던 거랑 같아.}
잘못 본 것 아니냐고 대충 얼버무리려던 난 세연의 확신 어린 어조에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내가 고민하는 사이, 아나스타샤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뭐가?}
{아, 그게…… 어제 교수님한테서 이 시계를 선물 받았거든. 그런데 그때 포장된 포장지가 이거랑 같아서.}
{시계 예쁘네. 포장지는 그냥 비슷한 것 아니야?}
{그런데 이 문양이…….}
세연은 자신의 확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이야기하려 했지만 지금 바로 비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선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세연을 바라보았다.
지금 포장지 같은 게 대체 왜 중요한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지금 뭐가 문제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세연은 그녀가 선물을 열어 보기 전에 가로막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우물쭈물하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어…… 그냥 신기해서 물어본 거야.}
그녀도 지금 자신이 받은 것과 같은 포장지란 확신만 있을 뿐, 그것을 그녀가 모르는 상황과 곧장 연결시키진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나와 교수님이 미리 만났다는 것 정도는 쉽게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세연이 그쪽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우연이네요. 저도 다른 분에게 부탁해서 구했다 보니…….}
실제로 기욤 로슈포르 씨가 얻어 준 것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 자기합리화를 빙빙 돌리면서 더 거짓말을 이어 나가려던 난 어느 순간 생각이 뚝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도저히 못 하겠어.’
세연은 내가 얄팍한 거짓말로 멋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아이가 아니다.
굉장히 똑똑하고 예리하니 분명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세연은 아마 진실 자체보다는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실망할 것 같았다.
난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난 변명도 포기하고 침묵했다.
세연은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더니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연인 것 같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설령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냥 무조건 믿어 주겠다는 목소리였다. 난 사실대로 이야기하겠다고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연, 제 말을 다 믿으시는 건 아니죠?}
{무슨 말이야?}
{저 거짓말했어요.}
세연은 전혀 놀라지도 않고 다시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거짓말?}
{제가 먼저 세연의 교수님과 만났었어요.}
뭔가 이상한 말을 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길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적어도 세연은 기분 나빠 할 테니까.
{……그랬었구나.}
하지만 세연의 반응은 생각보다 침착했다.
마치 일부러 자신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그렇게 감정도 혼란도 배제한 어조로 그녀가 말을 이어 나갔다.
{어쩐지 그런 것 같았어. 교수님이 나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오실 분은 아니지. 분명 내가 타우지히의 곡을 연주하는 걸 보고 네게 물어볼 것이 있으셨을 거야. 맞지?}
너무 정확한 물음이라서 달리 길게 대답할 수조차 없었다.
{……예.}
{그래, 그랬었구나. 그런데…….}
세연은 중얼중얼거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난 연주 끝나고 교수님에게 제일 먼저 전화드렸는데…… 교수님은 널 먼저 만났네. 아, 우울해.}
{세연, 그게…….}
{너무하지! 응? 아나스타샤.}
이어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고 갑자기 목소리를 확 끌어 올리더니 양손을 바동거리며 빠르게 말했다.
{우리 교수님 항상 이런 식이라니까? 음악을 우선시하는 건 좋은데 내 마음은 하나도 몰라 줘요. 물론 지금은 타티아나가 나보다 훨씬 더 잘하니까 왜 그러시는지 이해는 하겠는데…….}
{아니에요! 세연.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세요.}
{어……?}
일단 세연이 말을 다 잇지 못하도록 막았다.
지금 그녀는 우울해하고 성내고 있지만, 그건 단지 이 상황을 너무 무겁게 끌고 가지 않으려고 일부러 적당히 지금 취할 만한 태도를 가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정도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분위기를 신경 쓰며 상황을 대충 정리하려는 건 무척이나 고맙다.
하지만 그녀의 말 곳곳에 깃들어 있는 본심을 느끼니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난 가슴에 손을 얹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신에게 맹세할게요. 교수님이 세연을 무시하고 절 먼저 만나신 게 아니에요. 우연히 마주친 것이었어요.}
난 아나스타샤의 선물을 고르러, 교수님은 세연의 선물을 고르러 백화점에 갔었던 것이다.
비슷한 연령과 성별의 선물을 고르는 동선을 따져 본다면 나와 교수님이 만난 것도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같은 백화점을 골랐다는 것 자체가 무척 희박한 확률을 극복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확률인 것도 아니었다.
그 이후에 한 이야기들을 세연에게 들려줄 순 없지만, 교수님이 세연을 제쳐 놓고 나부터 만나려 하신 건 절대로 아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오해였다. 교수님은 나 같은 것보다는 세연을 천 배는 더 소중하게 생각하실 테니까.
{같이 있던 분도 있었으니 증인도 있어요.}
{아니, 증인까지 갈 것 없어……. 네 말을 믿어, 타티아나.}
{지금까지 거짓말을 해 왔지만…… 이건 정말로 믿어 주셔야 해요.}
{진짜 믿어.}
세연은 아까 내 거짓말도 그냥 믿어 주려고 했었다. 지금도 진심으로 믿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이 와중에도 날 맹목적으로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굉장히 기쁘면서도…… 약간 어두운 감정이 들게 했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이라도 그녀를 흔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내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그리 할 일은 없다. 내 욕심과 실패를 다시 세연에게 요구하진 않겠다고 결정했으니까.
{그러면 말이야.}
대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찡그린 채 가만히 듣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움직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세연의 손목께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시계도 혹시 네가 고른 거니?}
난 거세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뇨, 전 단지 심사 위원 역할이었어요.}
{심사 위원?}
{교수님과 동행분이 선물을 고르면 그게 저희 시선에서 괜찮은지…… 심사하는 일이었죠.}
{아하하.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끌려다녔었구나?}
그제야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여자애에게 선물하려는 중년 남성들을 돕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 모습을 떠올린 듯했다.
세연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심사 대상에 뭐 있었어?}
{음…… 액세서리나…… 스카프도 고르셨었죠.}
{무슨 스카프래……?}
난감해하며 세연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다시 손목의 시계를 내려다보더니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명랑하게 물었다.
{그럼 난 네 덕분에 스카프가 아니라 시계를 받게 된 거네? 진짜 고마워, 타티아나!}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 시계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는 나로선 세연의 감사를 받고도 기분이 상당히 미묘했다.
내가 거짓말을 도중에 멈춰 준 것으로 세연은 굉장히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난 거짓말쟁이다.
하지만 무기력감을 느끼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의 생일 자리이니 다른 이야기를 길게 할 상황도 아니고, 때문에 세연은 분위기를 나쁘지 않게 만들려고 나서고 있었다.
괜히 내가 이상한 말을 더 얹을 필요는 없었다.
밝게 웃으며 세연이 이야기를 정리했다.
{요컨대 타티아나는 교수님한테 붙잡혀선 고생만 하고, 심지어 교수님이 혼자 센스 있는 선물 고른 척하시려고 비밀 지켜 달라는 요구까지 받은거네.}
{이래서 착한 애만 고생이라니까.}
{그러게.}
지금 대체 누가 착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난 점점 더 울적해졌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낼 순 없어서 그냥 웃기만 했다. 그 괴리감이 날 붙잡고 비틀고 있었다.
포장지에 대한 이야기가 일단락되고 나자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선물을 열어 볼 수 있었다.
{악보네? 라흐마니노프?}
{예.}
{1899년 유르겐슨jurgenson판……? 이걸 어떻게 구했어!?}
아나스타샤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악보를 펼쳐 확인했다. 파라락 펼치면 부스러지기라도 하리라 생각하는지 굉장히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100년도 넘은 물건이니 그리 생각할 만했지만 보관을 잘했기에 상태는 좋았다.
내가 그녀에게 준 악보는 라흐마니노프의 악흥의 순간, op.16이었다.
워낙 유명한 곡들이라서 지금도 서점에 가면 악보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아마 아나스타샤도 이미 가지고 있겠지. 하지만 처음 이 곡을 출판했던 유르겐슨 판본은 지금 구하기 상당히 어렵다.
{초판본은 아니지만…….}
{그런 거면 절대 못 받아!}
1897년에 나온 초판본은 정말 구하기 어렵다.
아나스타샤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이야기하다 말고 자기 손에 들린 악보의 가치를 새삼 느꼈는지 황망해했다.
{아니, 이것도 내가 받기엔…….}
{받아 주세요. 제가 집에서 가지고 온 악보니까요.}
난 대부분의 연습용 악보들을 태블릿으로 본다.
때문에 종이로 된 악보는 몇 권 가져오지도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라흐마니노프의 악보 중에선 이것만 챙겨 오게 되었다.
콩쿠르 레퍼토리에도 없는데 왜 가지고 온 걸까. 이 악흥의 순간 6곡은 라흐마니노프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달 만에 쓴 곡들이다.
그만한 궁지에 몰려서도 결국 음악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이 정말 위대하게 느껴진다.
{예전에…… 기억하시나요?}
{응? 무슨 기억?}
{저희 처음에 만났을 때 아나스타샤의 신청곡이 있었잖아요.}
{아!}
혹시 잊었나 싶었는데, 다행히 아나스타샤는 바로 기억해 냈다.
{그게 악흥의 순간 4번이었지?}
{예,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어떻게 잊겠니.}
당시 아나스타샤는 테크닉적 슬럼프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난 그녀와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신청곡이었던 악흥의 순간 4번을 연주했고, 마치 마법처럼 모든 것이 잘 풀렸었다.
정말 힘들고 엉망이던 시절 몇 안 되는 잘 풀린 일이었다.
{제가 여기까지 그 악보를 가지고 온 건 분명 아나스타샤에게 주기 위해서라 생각해요. 그러니 가져가 주세요.}
{……정말 고마워.}
소중하게 악보를 챙겨 넣는 아나스타샤를 보니 웃음이 난다.
하지만 난 이전에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에 어둡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도 내게 강하게 영향을 받은 바 있었다.
슬럼프를 벗어나게 된 건 다행이었지만 득이 있으면 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걱정이 들어서 아나스타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는 그저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벨기에까지 와서 이런 선물들을 받다니, 상상도 못 했어.}
{우리도 너무 기뻐. 정말로 생일 축하해, 아나스타샤.}
{응.}
여기서 나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일단 세연이 잘 이해해 줘서 교수님과 있었던 이야기도 다 설명했고, 아나스타샤에게 선물도 제대로 건네주었으니 이젠 웃고 이야기하며 식사할 일만 남았다.
난 복잡한 일들은 잠깐 잊기로 했다.
요리가 나오기 전, 아나스타샤는 선물들을 정리하고 세연은 케이크를 다시 정리했다. 그런데 세연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식사하고 나면 정말로 헤어지는 거야?}
{어쩔 수 없잖니? 난 연습실 예약까지 해 놨어.}
{좀 아쉬운데……. 그럼 난 이따 가기 전에 타티아나랑 차 한 잔만 하고 가야겠다.}
지나가듯 흘린 말이었지만 세연은 이 생일 축하 자리가 끝나고 나서 따로 할 이야기가 남아 있음을 확실히 했다.
내가 한 이야기로는 불충분했던 것이다.
저번엔 교수님에게 붙잡히더니 이번엔 세연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난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