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0화
세연은 활기차게 웃고 떠들며 생일 파티를 겸한 식사 자리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한번 생긴 의혹은 계속 머릿속에 떠다니고 있었다.
‘그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어?’
타티아나는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갔다가 우연히 교수님과 만났다고 말했다. 세연은 그녀의 말을 믿었다.
자존심이 강한 타티아나는 거짓말을 할 때도 양심의 가책을 심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맹세까지 하면서 한 말을 의심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교수님의 상황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어떻게 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교수님이 브뤼셀에 도착하시자마자 어떻게 타티아나가 있는 곳을 파악하고 우연을 가장해 만날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해 세연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같이 있었다는 동행이 무언가 도왔을 수도 있고, 세상엔 세연이 모르는 방법들이 많을 터였다.
심증은 강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타이밍에 브뤼셀로 왔다는 것 자체가 가장 강한 증거였다.
‘내 곡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고 했고…….’
타티아나는 세연이 연주한 카를 타우지히의 곡을 가지고 박 교수와 이야기했음을 인정했다.
아마 우연히 만난 김에 세연의 일도 물어봤으리라 생각하는 듯했지만, 세연의 생각은 달랐다.
‘아마 교수님은 내가 아닌 타티아나에게 용건이 있어서 이곳에 왔을 거야.‘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느끼면서 세연은 거의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정말 맛있다! 비싸지 않아?}
{가격은 신경 쓰지 마.}
일단 밝게 이야기하고 아나스타샤의 대답을 들으며 다시 분위기에 적응하니 살짝 기분이 나아졌다.
세연은 절대 흥분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교수님이 타티아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건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득한 실력을 갖추어야만 간신히 보이는 무언가에 대한 흥미라는 것도 안다.
타티아나 역시 교수님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 교수님을 대할 때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훨씬 더 조심스럽고 묘한 눈빛으로 교수님을 보곤 했다.
세연은 두 사람 모두 굉장히 좋아한다. 하지만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은연중에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간다 생각하면……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한 살만 더 많았으면 술도 한잔하는 건데. 그치?}
{콩쿠르 중에 술을 마시면 어떡하니……?}
{저번에 웰컴 파티 땐 마시는 사람 많던데?}
세연은 일부러 더 활기차게 떠들었지만 나빠진 기분은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억지로 방울 토마토를 하나 입에 넣고 씹으면서 세연은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단정한 얼굴과 태도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저렇게 완벽한데 피아노 실력까지 신기에 가깝다. 세상에 저런 사람이 있어도 되는가 싶을 정도다.
음악에 평생을 바친 교수님이 흥미를 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세연은 자신이 질투한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쿨해지고 싶었다.
두 천재가 음악적으로 가깝다면 그걸 방해하거나 떼어 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럴 자격도 없고.
적어도 교수님이 먼저 자신을 만나고 솔직하게 타티아나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밝혔다면 지금 이 정도로 속상하진 않았겠지.
세연은 적극적으로 두 사람의 자리를 주선할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완전히 비밀로 타티아나를 먼저 만났다.
세연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질투를 넘어 배신감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안 돼…….’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두 사람에게 향한다. 교수님에게 따지고 싶고, 타티아나에게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두 사람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게 될지 모른다.
세연은 박 교수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안다.
평소 박 교수는 세연을 정말 극진히 아꼈으니까. 단지 타티아나가 절대 평범하지 않은 아이일 뿐이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세연에게 쩔쩔맨다. 그건 세연이 멋대로 느끼고 있는 바가 아니었다. 정말로 타티아나는 세연의 말에 꼼짝 못 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냥 타티아나가 사람이 좋아서 그렇다기엔…… 처음에 타티아나는 세연에게도 얼음처럼 차갑게 굴었다.
그리고 지금도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냉담한 면이 있었다. 며칠 전 웰컴 파티 때 타티아나는 남자들 틈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할 말을 다 했었다.
타티아나의 배경이나 능력을 생각하면, 만약 그녀가 정말 냉정하게 세연을 무시해 버린다면 세연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평소 적극적으로 달라붙는 건 세연 쪽이었지만, 막상 그런 세연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 쓰며 조심스레 대하는 건 타티아나 쪽이었다.
‘여전히 의문이긴 해…….’
한참 전부터 세연은 그런 의문을 느꼈었다. 타티아나가 친구들에게 헌신적이란 건 알지만 자신을 보는 눈빛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연은 그녀와 조금 더 격의 없는 친구 사이가 되길 바랐지만…… 타티아나가 원하는 선은 달랐다.
그래서 적당히 거리를 재 가며 위치한 곳이 바로 지금, 피아니스트 동료의 위치였다.
타티아나는 세연이 피아니스트로서 성장할 때마다 진심으로 기뻐했다.
단순히 친구에게 보이는 친애의 표시라기엔 너무 깊고 애틋한 감정이라서 세연은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기대에도 필사적으로 부응하려 애썼다.
무작정 타티아나의 음악이나 스타일을 따라하려고 들면 기분 나빠 할 테니까 완벽하게 이해하고 흡수했을 때만 보여 줄 수 있었다.
덕분에 세연의 실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수 있었다.
지금도 타티아나가 왜 이렇게 자신에게 신경 쓰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세연은 절대 그녀를 싫어할 수 없었다. 여러 방식으로 도움을 받은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었다.
‘아, 머리 아파…….’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쩌면 자신과 교수님에게 묘하게 약한 태도를 보이는 타티아나를 알아보고 교수님이 멋대로 휘두르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화가 나다가도, 정반대로 타티아나가 제게 쏟는 관심 중 일부가 단지 교수님에게 옮겨 간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다.
두 사람 다 음악에 진심인 피아니스트들이고, 세연은 그 깊은 마음을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단지 옆에서 자신만 소외시키고 벌어지는 무언가를 느끼며 답답하고 속상할 뿐이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어? 나?}
{우리 이야기 안 듣고 있었니?}
{아…… 이거 먹는데 집중하느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현실에 집중하려다가도 순간적으로 상념에 빠지는 바람에 아나스타샤가 한 말을 듣지 못했다.
세연은 정신을 차리곤 농담을 던지며 얼른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나스타샤는 별 이상함을 느끼진 못했는지 정신을 놓을 정도로 잘 먹어 줘서 고맙다며 키득거렸다.
세연은 따라 웃으면서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건 진짜 이상해…….’
만약 갑자기 타티아나가 교수님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면서 한국으로 유학을 오더라도 전혀 잘못된 건 없었다.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낀다고 해도 상관할 바 아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정말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조금 듣고 싶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언질은 미리 해 두었다. 그러니 지금은 아나스타샤의 생일을 우선시해야 할 때였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세연은 다시 식사와 대화에 집중했다.
{아, 정말 맛있었어.}
{디저트도 훌륭하네요.}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찬사를 쏟아 냈다.
평소 같았으면 이제 본격적으로 수다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 하지만 이번 식사 약속은 딱 식사만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먼저 움직여야 상황이 정리된다는 것을 아는지 미련 없이 일어났다. 세연과 타티아나도 그녀를 따라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니 여전히 한낮이었다.
나른한 기분을 느끼며 세연이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아나스타샤는 도롯가에 다니는 차들을 살피고 있었다.
{택시 타고 갈 거야?}
{응. 너희는?}
{나도 택시. 타티아나는 빅토르 씨가 데려다주시겠지?}
타티아나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타티아나가 혼자 택시를 타면 그녀의 집안에서 난리가 날지도 모른다. 베르체노프가는 그 정도로 부잣집이었다.
새삼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다고 생각하며 세연은 웃었다. 그리고 양손에 선물과 케이크를 든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그럼 먼저 가, 아나스타샤. 너 가는 거 보고 갈게.}
도심 한복판이라 그런지 다행히 택시는 금방 잡혔다. 아나스타샤는 뒷좌석에 짐들을 밀어 넣고 올라타더니 문을 닫기 직전에 고개를 들며 말했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 얘들아.}
{잘 가. 그리고 내일 응원할게!}
마지막까지 아나스타샤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연은 떠나는 택시를 보며 안도했다. 생일도 기분 좋게 보냈으니 아마 아나스타샤의 내일 무대엔 아무 문제 없을 것 같다.
그녀는 실력도 굉장히 뛰어나니까 기대할 만한 연주를 보여 주지 않을까.
이제 남은 건 타티아나였다.
‘그냥 그만할까…….’
타티아나 역시 내일 연주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세연은 가급적 그녀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지금도 있었지만, 막상 아나스타샤를 보내고 나니 타티아나도 보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세연이 망설이는 사이 가만 서 있던 타티아나가 먼저 말했다.
{차 마시자고 했었죠, 세연.}
{어…….}
약간 당황한 세연은 어물거렸다.
{그냥 갈까? 너도 내일 무대 준비해야 하잖아? 시간 뺏기 싫어.}
{……잠깐 정도는 괜찮아요.}
이미 타티아나는 마음을 정한 듯 보였다. 거짓말을 했던 것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성실하다니까…….’
세연은 절대 타티아나를 괴롭히거나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단지 잠깐 이야기하는 것으로 타티아나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찾은 카페는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적당히 구석진 곳에 조용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세연은 카푸치노, 타티아나는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음료를 기다리면서 세연은 가볍게 이야기를 던졌다.
{아나스타샤 정말 기뻐하더라. 그렇지?}
{이렇게라도 모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악보 선물 정말로 좋았어. 만약 내가 그런 걸 받았으면 감동해서 울었을지도 몰라.}
{그래요?}
{아, 어필하는 건 아니야! 진짜로!!}
말을 하다 보니 이상하게 되어 버렸는데, 세연은 정말로 타티아나에게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
강력하게 부정한 세연은 빠르게 이야기를 슬쩍 돌렸다.
{아무튼 그 악보 백화점에서 산 건 아니라고 했지?}
{……예.}
타티아나가 진지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며 세연은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오래된 악보를 백화점에서 산 것도 아닌데 그곳에 왜 갔느냐고 취조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세연은 그럴 의도가 없었다.
그저 부득이하게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 타티아나가 이만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도록,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하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영어를 다 잊어먹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실 세연의 진심은 타티아나에게 이것저것 캐묻길 원하고 있었다.
상충하는 마음을 지켜보던 세연은 지금 가장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한 가지를 약속하기로 했다.
{타티아나. 나 이거 하나만 확실하게 하고 갈게.}
{?}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세상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난 무조건 네 편이야. 그것만큼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세연의 마음속에서 수없이 떠올랐다가 확인된 것이라서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정작 이렇게 말로 하니 굉장히 뜬금없이 들렸다. 무슨 고백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당연히 타티아나는 멍한 눈으로 세연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라서 세연은 창피함에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런데 곧 밝은 웃음소리가 세연의 귀에 들려왔다.
{후후, 후후후…….}
{내 말은…….}
{괜찮아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손을 내리고 바라보자 다정하게 웃는 타티아나가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에요. 세연이 정말 소중해요.}
단지 세연의 애정 표현에 대한 답례로 한 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진심과 무게는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세연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침 직원이 카푸치노와 레모네이드를 가져와 주지 않았다면 아마 정말로 쓰러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