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1화
사실 세연은 타티아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물어야 할지 제대로 생각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냥 대충 내일 무대를 응원이나 해 주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지한 타티아나와 마주하고 있다 보면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던 말들이 흘러 나온다.
다른 친구들이랑은 아무리 길게 수다를 떨어도 진지한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영어로 대화해야만 하는 타티아나랑 이야기할 땐 왜 이렇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연은 절대 그녀에게 나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스스로의 마음을 믿고 그냥 분위기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달달한 카푸치노로 입술을 살짝 축이고 나서 세연이 말했다.
{있잖아, 솔직히 나 이대로 교수님한테 가서 따질까 생각 중이야.}
{……예?}
{왜 타티아나한테 거짓말시켰냐고.}
지금 세연이 느끼는 가장 억울한 부분은 그것이었다.
정말 우연히 타티아나와 만났다면 그랬다고 말하면 되었을 텐데, 이상하게 숨겼던 것이다.
숨겼다는 것 자체가 세연의 반응을 의식했다는 뜻이었다.
예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타티아나와 교수님이 만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배를 타고 그곳으로 간 적이 있긴 했다.
그건 상당히 꽤 충동적이고 과격한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실수를 한 건 없었다.
심지어 타티아나와 교수님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자리까지 마련했었다. 그런데 왜 또 자기만 쏙 빼놓으려고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만난 적 없는 걸로 하자고 했던 건 교수님이 먼저 말씀하셨던 거지? 내 생각에 넌 그렇게 하지 말자고 했을 것 같은데.}
타티아나도 사람이니 거짓말 정도는 하겠지. 하지만 그녀는 가볍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세연은 분명히 박 교수가 먼저 강요 비슷하게 타티아나를 설득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용히 듣던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절대로 알아선 안 되는 거였어?}
{…….}
타티아나는 말없이 잔을 들었다.
약간 당황스러웠다.
타티아나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들켜서 세연에게 사실을 실토하고 말았지만, 막상 거짓말을 하기로 박 교수와 합의했을 땐 거기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만큼 이유가 확실했다는 의미인데.
그 부분에 대해서 세연은 이미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세연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푸치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교수님 성격을 알아. 아마 네게 선물을 봐 달라고 부탁하신 건 우연히 만났던 그 순간 널 붙잡을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거야.}
{……글쎄요.}
{맞지 않아? 너랑 할 이야기가 정말 있었던 거잖아?}
의도했던 건 아닌데 말을 하다 보니 어쩐지 자꾸 취조하는 듯한 말투가 되었다. 세연은 예민해지는 스스로를 카푸치노로 달랬다.
타티아나는 특별히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제게 해야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고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속이 결코 편하지는 않을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조금 침착해진 세연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불편하다면 그냥 여기서 그만할게. 그런데 아까 그랬잖아. 내가 연주했던 카를 타우지히의 곡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었다고…….}
웅얼거리던 세연은 마음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당사자인 날 부르지 그랬어?}
이게 결정적으로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만약 세연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세연을 불렀어야 했다.
두 사람만 이야기한 것에 대해 세연은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타티아나는 물끄러미 세연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여러 감정이 솟았다가 사그라들길 반복했다.
이윽고 타티아나는 양손으로 잔을 쥐며 말했다.
{부르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죠.}
{누가? 교수님이?}
{저도 마찬가지예요.}
{……왜?}
굳이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하나뿐이었다.
조금 전 아나스타샤가 있었을 때 세연과 타티아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세연이 있으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타티아나와 박 교수가 나누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 자체에 세연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로 이해하려고 해도 가슴이 방해한다.
어쨌거나 절대로 타티아나 탓을 하지 않겠다고 다시 마음먹으며 세연은 대답을 기다렸다. 어떤 심각한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빙그레 웃으며 세연을 안심시켰다.
{세연은 분명히 잘 해냈으니까요. 아쉬운 말을 들을 필요는 없죠. 그렇지 않나요?}
어떻게 들어도 지금 자신을 일단 달래고 보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연은 투정을 부리며 보챘다.
{아쉬운 게 왜 없겠어? 난 피드백이 필요해!}
{오해하지 마세요. 절대적으로 완벽한 음악이 없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세연은 스스로 어떻게 느꼈죠?}
{…….}
{스스로 굉장히 만족하셨던 걸로 알아요. 그리고 절대적인 기준으로 봐도 훌륭했고요. 세연은 더할 나위 없이 너무 잘해 줬어요. 만약 피드백을 한다고 하더라도 콩쿠르 후에 해야겠죠.}
술술 이야기하는 타티아나는 지금 칭찬을 꾸며 내면서 억지로 세연을 기분 좋게 해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음악을 두고선 정말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었다. 세연은 그녀의 평을 신뢰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의 칭찬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자 조금 부끄러워졌다. 이러면 괜히 더더욱 칭찬해 달라고 떼를 쓴 것만 같지 않은가.
부끄러움에 세연이 이제 괜찮으니 그만해 달라고 하려는 찰나, 타티아나가 무겁게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교수님은 저에게만 할 말이 있었죠.}
세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약간 감정적으로 생각한 바가 없지 않았다.
단순히 교수님이 브뤼셀에 오자마자 타티아나를 제일 먼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그것을 자신에게 숨겼다는 사실 자체에 화가 났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세연을 쏙 빼놓고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다. 무척 심각하게 토론하고, 어쩌면 다투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세연은 이제야 타티아나가 무엇을 겪고 입을 다물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내가 너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하면서 쳤다는 걸…… 교수님이 아셨어?}
{예. 바로 알아보셨어요.}
{아까부터 계속 생각했던 건데, 설마 그래서 교수님이 너한테 뭐라고 했니?}
예상되는 바는 하나뿐이었고, 거기에 대해 교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셨을지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세연은 거칠게 말했다.
{정말 그랬던 거면 나 가만 안 있을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교수님에게 농담을 섞어 이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만약 타티아나를 붙잡아 앉혀 놓고는 원인이라며 규탄하기라도 했다면…….
세연은 진심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타티아나는 곤란하다는 듯 세연을 바라보았다.
착한 성정의 그녀는 이런 상황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그 태도엔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했던 것 같은 체념이 담겨 있기도 했다.
{어쩔 수 없어요. 세연의 교수님은 아마 제 존재 자체에 의문을 느끼실 테니까.}
{뭐……? 무슨 말이야 그게?}
{그래도 교수님에게 화내진 마세요. 전 두 분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아요. 저보다는 교수님이 중요하잖아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세연은 당혹감을 느꼈다.
타티아나는 무언가를 결정해 버린 듯한 투로 말하고 있었다.
만약 교수님과 다툰 것이라면 세연에게 억울함을 토로하거나 같이 이야기해 달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타티아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깔끔하게 자기 선에서 모든 걸 정리했다.
세연은 어렴풋하게 돌던 생각과 감정들이 점점 형태를 갖추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세연은 자신이 질투를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다.
좋아하는 친구와 존경하는 교수님 사이를 질투한다는 건 정말 추하게 보이지만, 어떻게 생각해 봐도 지금 이 상황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건 질투라는 단어로밖에 설명이 안 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했던 것이다.
교수님과 타티아나 사이를 중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두 사람을 단둘이 만나게 뒀다간 사건이 터질지도 모른다고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난 알고 있었어…….’
타티아나와 교수님이 단둘이 만나면 안 된다는 생각은 언뜻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말이 안 되는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뛰어난 음악가이자 피아니스트였고, 따라서 만나면 서로 이야기가 잘 통해서 건설적인 이야기를 했으면 했지 절대로 대립할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상식에서 오는 판단이 아닌 세연이 직접 두 사람을 겪어 보면서 느낀 여러 정보들은 분명하게 경고를 발하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그것이 분명해졌다.
세연은 계속 자신이 중간에 있는 상황에서 타티아나와 박 교수가 몇 번 만났더라면 상황이 좋아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늦어 버린 것 같지만.
{타티아나…….}
{예.}
어떻게 된 거냐고 묻기가 겁났다. 만약 타티아나가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면 그녀를 붙잡아야만 했다.
교수님은 자신의 애교에 약했고, 타티아나도 제 억지에 어지간하면 져 주는 편이니 어떻게든 중간에서 잘하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타티아나의 건조한 태도는 도무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친구로서 가까워지기 전, 타티아나가 대놓고 선을 그으며 특히 음악적으론 연관되지 않으려고 하던 때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세연은 타티아나의 이름만 부르고는 그대로 말문이 막혀선 멍하니 바라보았다.
타티아나는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으나 세연이 끝까지 말을 하지 못하자 결국 먼저 말했다.
{세연. 우리 아까 확실히 하기로 했던 것이 있었죠? 전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세연은 타티아나의 편이 되고, 타티아나는 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
친구와 그런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정말 몇 안 될 것이다.
세연은 진지한 타티아나가 거기에 응해 주었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그 우정을 울타리 삼아 선을 긋고 있다는 점은 명백했다.
그것조차 세연을 위한 일이라고 한다면, 세연은 할 말이 없었다.
{응…… 나도.}
지금 타티아나를 몰아세우면 안 된다. 결국 세연은 어쩔 수 없이 대답하고 말았다.
***
세연과 차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대로 방으로 향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엎드린 나는 거세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점심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엉망진창이었다.
아나스타샤와 세연을 같이 만나는 자리임에도 경솔하게 준비했다가 결국 눈썰미 좋은 세연에게 숨겨야 할 사실을 들켜 버렸고, 그 후에 수습도 잘하지 못했다.
아나스타샤가 있을 땐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이후에 차를 마시면서 좋은 이야기를 해 주려고 했었는데……
처음엔 괜찮았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꾸만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세연은 차라리 교수님을 의심할지언정 난 믿고 위해 줬는데, 난 그런 그녀를 모질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던 세연의 얼굴을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조금 더 잘 대해 줄 수 있었는데, 왜 못 했을까.
혹시 내가 품고 있던 억울함을 그녀에게 일부나마 풀어 버린 것 아닌가.
그런 의심의 화살이 스스로에게 향했고, 난 활시위가 당겨질 때까지도 그걸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내 귀에 발소리가 들렸다. 난 반사적으로 일어난 다음 침대맡에 앉았다.
“타티아나? 들어왔니?”
“아, 방금 왔어요.”
“정말 점심만 먹고 왔나 보네. 아나스타샤는 어땠니?”
데보라 아주머니는 오늘 생일인 그녀가 신경 쓰이는지 내게 물었다.
난 점심에 있었던 일을 아주머니에게 이야기하면서 적어도 아나스타샤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위안 삼아야 했다.
“그럼 지금부턴 연습하니?”
“예. 그러려고 해요.”
“알았어. 그럼 방해 안 할 테니…… 힘내렴.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하고. 알았지?”
그 말을 남기고 아주머니는 살며시 문을 닫고 나가셨다.
다시 홀로 남겨진 나는 침대에 다시 드러누웠다가 피아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아주머니가 이상하게 여기실 것이란 걸 깨달았다.
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내일 있을 무대를 어떻게 마주할지 이미 결정은 내렸다.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