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32화 (1,132/1,277)

##  1132화

저녁 9시쯤이 되면 연습을 멈춘다.

랑스 부부는 내게 더 늦게까지 해도 괜찮다고 허락해 주었지만, 남의 집에 신세를 지면서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음량에 신경 쓰면서 피아노를 쳐 봐야 제대로 된 연습이 될 리가 없었고, 내가 준비한 6곡은 이제 와서 급하게 무언가 더 덧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검증된 악보를 가지고 오랜 시간 연구하여 최적화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에 도달했다.

이 너머로 가려면 또 상당한 연구가 필요할 터. 지금은 이 음악을 검증받을 때였다.

시간 예술가인 우리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무언가 하는 것에 익숙하다.

음악을 준비하고 선보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나 그랬고, 난 언제나 잘해 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난 피아노라는 망치를 쥐고 음악을 찾아 헤매는 망령이다.

길 위에서 양팔을 활짝 벌린 사람을 만날 때도, 그 사람과 포옹할 때도 난 결코 손에 쥔 망치를 놓은 적이 없었다.

너무 오래전부터 쥐고 있었던 탓에 놓으려 해도 어떻게 놓아야 할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교수님은 이렇게 손에 붙어 버린 망치를 저주라고 판단하시는 것 같았고, 나 또한 그 판단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손과 망치의 경계가 희미해질 정도의 저주는 평범한 나도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해 주었다.

피아노를 수족처럼 다룰 수 있게 되면서 난 마치 처음부터 피아노와 하나로 이어져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손을 움직이는 데에 복잡한 과정이 필요 없듯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데에도 중간의 과정은 생략되었다.

생각만으로도 곧바로 망치가 달려 나가 현을 때린다. 다른 무엇보다 난 현을 때리는 것을 제일 잘했다.

‘이것만큼은 잘했었어.’

자만하진 않는다. 난 한계를 여러 번 극복해 냈지만, 여전히 현실의 내 손은 작고 약하다.

피아노와의 체결력이 조금이라도 떨어진다면 곧바로 이겨 낸 줄 알았던 한계들이 들이닥쳐서 모든 것을 마치 거짓말처럼 무너뜨리겠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이렇게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한, 난 인간으로선 글러 먹었어도 연주자로선 오롯할 수 있었다.

증명해야만 했다.

“그 아이가 얻지 못할 음악의 모습을…….”

연주일을 하루 앞두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던 난 스스로 한 중얼거림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내 목소리엔 교수님과 세연을 향한 어두운 감정이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예민한 내 귀는 들은 것을 착각하지 않았다.

“미쳐도 곱게 미쳐, 타티아나.”

난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밝고 솔직한 세연과 그런 그녀 덕분에 회복하신 교수님을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스멀거리는 감정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면 정말 광인밖에 남지 않게 된다. 난 불순하고 부적절한 감정들을 용납하지 않고 모조리 으깨어 없앴다.

실패로 규정되어 부정당하고, 혹여나 옮겨 갈까 우려되는 저주로 여겨진다고 하더라도 난 교수님과 세연을 성원할 의무가 있었다.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다. 최소한 사람이고 싶다면 지켜야 할 의무다.

“…….”

난 일어나선 전등을 껐다. 지금까지 시야를 밝혀 주던 전등을 꺼도 한 번에 눈앞이 캄캄해지진 않았다.

이 방의 구조를 기억하는 내 기억력과 희미한 달빛이 내게 앞으로 나아갈 근거가 되어 주었다.

내가 결심한 바는 바뀌지 않는다. 해야 할 일 역시 같다. 머릿속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음악들은 언제라도 내 손을 타고 뻗어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시 의자에 앉은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천천히 명상하며 오늘을 마치고 내일을 준비했다.

***

아마 모든 연주자에게 무대에 서기 전날 가장 원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푹 잠드는 것이란 대답이 많을 것이다.

그만큼 긴장 속에서 준비하고 대기하는 연주자들에겐 불면증도 상시 따라붙곤 했다.

다행히 난 잠도 잘 잤고, 악몽도 꾸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선 놀라지 않는다.

내가 낼 수 있는 소리를 파악하고는 반사도 억누를 수 있었던 것처럼 난 보다 객관적으로 스스로에 대해 이해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고 나면 감정도 꿈도 억누를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누르고 연주자로서의 자신만 일깨운다.

“6시 59분…….”

알람이 울리기 전에 정확하게 기상한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넘겼다. 정확한 시간에 일어나서 그런지 기분이 좋았다.

아침 루틴에 따라 스트레칭으로 온몸을 활성화시키고, 모든 컨디션이 정상임을 확인하고는 욕실로 향했다.

아침에 하는 목욕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에 좋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는 손톱 관리용 도구들을 꺼냈다.

매일 잘 정돈하기에 깎을 필요는 없어서 줄로 다듬기만 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벨 소리가 들렸다. 아침부터 누구인가 싶어서 보니 오빠였다.

“여보세요.”

-일어났어? 혹시 늦잠 자나 싶어서 모닝콜했지.

일어나기야 한참 전에 일어났지만 일부러 낮게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덕분에 방금 일어났어요. 고마워요.”

-그, 그래? 어지간하면 일찍 일어나더니…… 지금까지 잤다고? 혹시 어제 늦게 잤어? 그러면 조금 더 자는 게 어때?

일어나라고 모닝콜을 했으면서 더 자라니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난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딱 좋아요. 슬슬 움직여야죠.”

-네가 나가는 세션은 저녁 8시부터이지 않아?

“맞아요. 그것도 마지막 순서죠.”

-12시간도 넘게 남았겠는데?

너무 오래 기다리다가 진 빠지는 거 아니냐는 듯 오빠가 물었다. 하지만 난 이런 기다림에 익숙했다.

어차피 그사이 연습이나 더 하면 되니까 상관없기도 하고.

“괜찮아요. 아무튼 이렇게 전화해 주셔서 고마워요.”

-응……. 아마 아버지는 나중에 전화하실 거야.

“후후, 알겠어요.”

루슬란 오빠의 존재는 내가 사람으로서 길을 잃지 않고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영영 손쓸 수 없게 되어 버린 다른 과거와 달리 다시 고치고 쇄신할 수 있는 과거도 있다는 것이 내겐 정말 큰 위안이 되어 주고 있었다.

오빠와의 사이가 좋아진 덕분에 난 사람답게 살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난 가볍게 웃으며 오빠와 잠시 잡담을 나누며 머릿속을 환기시켰다. 3분 남짓한 통화였지만 내겐 충분했다.

전화를 끊고 마저 머리를 말리고 나자 헤어드라이어 소리를 들은 데보라 아주머니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침 식사를 같이하자는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식사를 거르면 컨디션에 문제가 생긴다.

무조건 챙겨야 할 필요가 있었다. 대신 탈이 안 나도록 되도록 간편하게 하면 좋다.

이미 호스트 패밀리로서 연주자들을 많이 맡아 보신 데보라 아주머니는 무대 당일 어떤 식사가 좋은지 알고 계셨다.

난 잼을 바른 빵과 과일 주스로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잘 먹었습니다.”

“오늘은 저녁에 나갈 예정이니? 타티아나.”

“아, 스케줄은 그런데…… 3시에 움직일 생각이에요. 아나스타샤도 잠깐 만날 겸, 미리 익숙해지기도 해야 해서요.”

“그렇구나.”

데보라 아주머니는 어떻게 해도 좋은데 대신 갈 땐 자신이 꼭 데려다주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후 오전 시간은 쭉 연습으로 보냈다.

달리 더 깊게 연구하거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것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음악을 더더욱 깊게 각인하는 것으로 방향을 맞추었다.

내 음악이 완전하다는 믿음을 공고히 하는 것은 무대에서 상당한 도움이 된다.

악보를 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쉬는 시간도 없이 철저하게 실전처럼 연습을 몇 번 반복했다.

6곡을 전부 한 번씩 연주하는 데엔 20분이 조금 더 걸린다. 체력을 안배하여 적당히 휴식을 섞어 계속하면 3시간에 6번 연습이 가능했다.

오전 연습을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하는 도중 데보라 아주머니는 계속 반복되는 연주를 듣고 있자니 자신도 다 외워 버릴 것 같다면서 웃으셨다.

연주하는 난 이미 눈을 감고도 그 곡들을 연주할 수 있었다.

점심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연습을 반복하고, 2시가 조금 지나자 난 나갈 채비를 마친 후 아주머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

“짐은 그게 전부니?”

“예.”

아델리나에게 의뢰한 드레스가 든 캐리어 그리고 소지품들을 넣을 작은 가방이 내가 가지고 갈 전부였다.

플라지 빌딩에 도착하자 날 담당하는 사무국의 루트거 칼스도르프가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그에게 날 보내기 전에 웃으며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타티아나, 이따가 올게. 긴장 풀고 준비 잘하렴.”

“감사합니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여기서 계속 내 옆에 있으면 내가 움직이는 데에 방해가 되리라 생각하셨는지 서둘러 차를 몰고 떠나셨다.

내 안내를 넘겨받은 루트거는 안쪽으로 손짓했다.

“일찍 오셨군요. 들어오시죠. 캐리어는 이쪽으로 주시고.”

“보관할 곳이 있나요?”

“물론이죠.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보관하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내 무대는 밤늦게 시작된다. 지금 드레스를 갈아입었다가 혹시나 더러워지기라도 하면 큰일이기에 난 루트거에게 드레스 캐리어를 넘기고 움직였다.

사무국에 들러서 오늘 정상적으로 참가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고 몇 종류의 서류를 확인하고서 사인을 하고 나니 다시 내 차례가 오기 전까진 자유로워졌다.

벌써 플라지 빌딩 안엔 사람이 꽤 많이 보였다. 그중엔 청중들은 물론이고 콩쿠르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연주자들이 있었다.

난 그 사이에서 아나스타샤를 찾아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연주자인 알레한드로 페테르손과 함께 있었다.

낯선 사람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아나스타샤는 쌀쌀맞게 그를 대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알레한드로는 개의치 않고 옆에서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난 얼른 끼어들어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곤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나스타샤, 알레한드로.”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자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알레한드로는 깜짝 놀라더니 러시아어로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타티아나.”

“응원하러요.”

내가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알레한드로는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고 이렇게 직접 올 줄은 몰랐네. 좌석은 없을 텐데 그사이 뭐 하려고? 집에 다시 돌아갈 거야?”

“아뇨, 근처에 있을 생각이에요. 연습실이라든가…….”

“그래? 뭐…… 그거야 네 자유지만.”

알레한드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바라보더니 갑자기 이상한 말을 했다.

“오늘은 건드리면 안되겠네.”

“예?”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

“……언제든, 누구든 건드리시면 안 돼요.”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정말.

그렇지 않아도 잔뜩 귀찮은 일을 당했는지 아나스타샤는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알레한드로에게 말했다.

“원래 이런 식이에요? 경쟁자 정신 사납게 해서 흔들기?”

“푸하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타티아나의 친구라면 얼마나 잘할까 싶어서.”

“알아서 잘해요. 그러니 무대에서 보세요.”

“곡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이야기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절대 안 해요.”

아나스타샤는 딱 잘라 말했다. 난 알레한드로가 왜 그녀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며칠 전에 내가 그에게 보여 주었던 것들이 꽤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나스타샤를 붙잡고 괴롭히는 건 싫다. 난 슬쩍 아나스타샤 앞에 끼어들며 말했다.

“죄송한데 아나스타샤와 시간을 좀 보내고 싶어서요. 자리 피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음, 분부대로 하지요.”

의외로 그는 끈질기지 않게 바로 떨어져선 다른 곳으로 가 주었다.

난 한숨을 푹 내쉬며 그제야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마치 구세주를 보는 듯한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 조용한 곳으로 갈까요?”

“응.”

일찍 와서 보고 응원하겠다고 미리 전했는데도 아나스타샤는 내가 온 것이 무척 기쁜지 연신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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