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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33화 (1,133/1,277)

##  1133화

우리는 청중들이 다니는 복도를 지나 홀 관계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사무실 쪽으로 향했다.

조금 걸으니 적당히 이야기하기에 좋은 조용한 휴게실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난 자판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마시고 싶은 것 있으신가요?”

“물 있니?”

평소 아나스타샤는 탄산음료나 커피를 자주 마시는 편이었는데, 무대를 앞둔 지금은 순수한 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물을 뽑아서 주자 그녀는 뚜껑을 열고 몇 모금 마시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컨디션은 어떠신가요?”

내 물음에 아나스타샤는 물병을 든 채로 손목을 빙글빙글 돌려 보더니 웃었다.

“몸 상태도 좋고 오전 리허설도 좋았고. 잠을 조금 못 자긴 했는데 영향이 있을 정도는 아니라 괜찮아. 너는?”

“저도 좋아요. 만전을 기했죠.”

오늘을 위해 난 여러 가지 결정을 내리고 왔다. 많은 생각과 고민이 필요했지만, 덕분에 난 오늘 아무렇지 않게 연주자로서 무대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씩씩하게 대답하자 아나스타샤는 마음이 놓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달리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그렇구나. 난 오늘따라 네가 조금…….”

“……?”

“엄청 준비 잘해 온 것 같아 보이네.”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만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든다.

그 눈빛은 조금 전 알레한드로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그는 날 보자마자 오늘 건드리면 안 될 것 같다고 하더니 바로 자리를 피해 주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지금 난 어떻게 보이는 걸까.

“제 얼굴이 별로 안 좋나요?”

“응?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아뇨.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어쩐지…….”

아나스타샤는 상당히 당황스러워하며 부정했다. 하지만 난 그녀가 지금 내게서 어떤 변화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했다.

난 지금 문제가 있어선 안 된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지만, 아주머니가 보시는 것과 연주자들이 보는 것엔 분명 차이가 있을 터였다.

“지금 말씀해 주세요. 더 신경 쓸게요.”

“무슨 신경을 써…….”

잘못된 것 같은 부분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말해 달라고 부탁하자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 그 남자가 그랬지, 오늘 넌 건드리면 안 될 것 같다고. 그래서 그러니?”

“약간요.”

“그건 칭찬으로 한 말이야. 평소보다 더 피아니스트답다는 뜻이니까.”

평소와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내면적으로 무장하고 있는 게 겉으로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와 친한 아나스타샤가 그런 날 예민하게 알아본 건 차치하고, 알레한드로는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다.

난 조금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부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미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어쨌든 한마디만으로 그 남자를 도망치게 한 건 진짜 쿨했어, 타티아나.”

“도망친 건 아닐 거예요.”

“아니긴 뭐가 아니니? 언제 봤다고 친한 척하고……. 레티시아가 싫어하는 이유를 알겠더라니까?”

아나스타샤는 이미 알레한드로에 대한 평가를 마쳤는지 인상을 쓰며 위협적으로 물병을 흔들었다.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는데…… 난 알레한드로의 변호를 조금 하고 싶었다. 그는 도망친 것이 아니라 날 인정했기에 배려해 준 것에 가까웠다.

난 얼마 전에 콩쿠르 오프닝을 녹화하면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분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아나스타샤와도 친해지려고 하…….”

“하…… 내가 여러 번 같은 말 해도 어차피 안 듣지만, 제발 사람 좀 가려 사귀어. 진짜 걱정되어서 그래.”

“충분히 가리는데요…….”

“아니야. 전혀 안 가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예전부터 그런 말을 많이 듣긴 했지만 솔직히 억울했다.

난 사람 보는 눈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면 경계하고 가까이하지 않는다.

알레한드로도 음악가로서 괜찮은 사람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런 부분을 모르고 있었다.

“그 남자가 진짜로 음악에 중점을 뒀다면 나 말고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훨씬 더 매력적일 텐데, 왜 나한테 집적거리는데? 이상한 사람 아니니?”

물론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아나스타샤의 반응도 이해가 간다.

알레한드로가 너무 선이 없는 사람인 게 문제였다. 난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며 차분히 말했다.

“아마 오해일 거예요. 그분은 아마 아나스타샤가 제 친구라는 걸 알고…….”

“그래, 너랑 오프닝도 같이 찍었었지. 그러니까 접근하기 쉽겠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사실 그분이 저희에게 흥미를 가진 건 훨씬 예전이에요. 에르네스트와도 친분이 있는 분이거든요.”

오래전부터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말에 아나스타샤는 순간 멈칫했다.

여전히 의구심을 느끼는 표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아…… 그래?”

“예. 러시아에서 유학하면서 7년 전에 에르네스트와 함께 찍은 사진도 가지고 있었고요.”

“그래서 러시아어를 잘했구나…….”

갑자기 친한 척을 해서 경계하긴 했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짚이는 부분이 있는지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난 이때다 싶어서 그녀가 가장 놀랄 만한 정보를 살짝 알려 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아요. 하지만 기혼자이시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기혼자면 이상한 사람 없나? 뭐…… 아무튼 알았어.”

아나스타샤는 결국 내 변호를 받아들여 주었다.

그녀도 무턱대고 사람을 싫어하진 않는다. 다만 무대를 앞두고 긴장하여 예민해져 있는 상황에서 알레한드로까지 신경에 거슬리자 짜증이 난 모양이다.

열이 식은 아나스타샤는 이윽고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 조금 긴장했던 게 너랑 이야기하다 보니까 다 풀려 버렸어.”

가끔 너무 긴장될 땐 이렇게 무대를 잊고 한번 화르륵 표출할 수 있는 일을 떠올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 역시 알레한드로의 변호사로서 이야기하다 보니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여러 생각이 잠시 사라졌다.

아주 잠시뿐인데도 마음이 상당히 편해진 기분이 든다.

하지만 콩쿠르와 관계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것도 정말 잠시뿐이었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공유하고 있는 것이 많은 만큼 무슨 이야기를 꺼내더라도 금방 다시 깊은 이야기로 돌아오게 된다.

“그나저나 에르네스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분명 아까 내가 먼저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를 꺼냈는데도 지금 다시 아나스타샤로부터 그 이름을 듣자 나도 모르게 놀라게 된다.

그녀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긴장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리자 아나스타샤가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그 애는 우리 무대 못 볼 거야.”

“……예?”

“알고 있지 않았니?”

에르네스트는 지금 작곡 콩쿠르에 참가해서 열심히 곡을 쓰고 있는 중일 것이다. 당연히 부정의 여지가 있는 통신이나 여러 접촉은 모두 금지된다.

하지만 난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전화가 끊겨 있긴 했지만…… 방송 정도는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아무것도 못 볼 거야. 그런 계약으로 간 거니까.”

아나스타샤는 나보다 조금 더 많은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메시지 하나 주고받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정말 철저하게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나 보다.

난 약간의 기대가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침묵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고서 그를 배제하고 우리끼리 하자는 의미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 애가 볼 수 있는 곳까지 같이 올라가자. 무슨 말인지 알지?”

에르네스트는 작곡 콩쿠르를 위해 우리보다 더 빨리 떠났다.

그러니 그의 콩쿠르는 일찍 끝날 테고, 아마 우리가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몇 주 뒤의 파이널까지 가게 된다면 에르네스트도 우리가 무대에 서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는 그 최고의 무대에 서는 걸 에르네스트에게 보여 주고 싶어 했다.

피아노 연주자로서 충실한 그 태도에 난 감격하면서도 한편으론 근심했다.

‘이 아이도 설마…….’

원래 아나스타샤는 이렇지 않았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그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녀는 말보다 피아노를 앞세우기 시작했고, 여러 가치를 피아노의 잣대 위에 올렸다.

그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꼭 닮아 있었다.

연주자들 간에 교류가 깊으면 서로 닮아 가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 음악과 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험하게 느껴지는지 알게 된 지금은 그녀의 변화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제 와 그녀를 걱정한다 한들 불필요하게 흔드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알겠어요, 아나스타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와 마지막까지 함께 가는 것이다.

현명하고 재능이 넘치는 아나스타샤는 이미 음악가로서 독자적인 영역을 이루었다.

같은 지점을 노리고 가더라도 나보다 훨씬 더 잘 해내리라 믿는다.

그렇게 같이 파이널 라운드까지 가기로 약속하고 잠시 콩쿠르 순서에 대한 이야기 등을 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아, 라리사에게서 메시지가 왔어.”

“응원이 많이 왔나요?”

“응. 아까는 전화도 많이 왔는데 이젠 슬슬 메시지만 오네. 방송으로 지켜보겠다고…….”

전파의 형태로 날아온 여러 응원을 다시 보면서 아나스타샤는 희미하게 웃더니 내게도 물었다.

“너도 많이 왔지?”

“그렇긴 해요.”

“메시지 온 거 보여 줄래? 나한테 보낸 거랑 비교해 보게.”

“예? 비교요?”

“혹시 복사해서 붙여 넣기 한 걸 수도 있잖니?”

학교 친구들에게 온 메시지들이 있긴 한데…… 서로 비교해 봐서 좋을 건 없어 보인다.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왜?”

“길이가 다를 수도 있고…… 혹시 똑같은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저희 둘을 똑같이 응원하겠다는 이유일 테니 상관없잖아요.”

각각 온 메시지가 같든 다르든 아마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그걸 선의로 해석해야 했다. 가장 좋은 건 아예 비교 같은 걸 하지 않는 것이고.

아나스타샤는 조금 아쉬워하는 듯 보였지만, 내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금방 납득했다.

난 그녀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다른 연주자 이야기, 콩쿠르 이야기 등 할 말은 정말 많았다. 하지만 시간은 그만큼 많지 않았다.

잠시 후, 곧 3시의 오후 세션을 준비하는지 콩쿠르 관계자들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시간을 살피고는 말했다.

“이만 나도 준비해야겠네.”

“……예.”

“네 차례 오기 전까지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푹 쉬어 둬. 알지?”

난 웃으며 그녀와 마주하고는 짧게 포옹했다. 아나스타샤의 온기는 태양처럼 따스했다.

아나스타샤가 연주하는 음악이 찬란한 건 그녀라는 사람이 찬란하기 때문이겠지.

마지막으로 아나스타샤와 인사하고 나서 그녀는 콩쿠르 사무국 쪽으로, 난 로비 쪽으로 걸어 나왔다.

“…….”

아까보다 사람이 더 많아졌다. 슬슬 무언가가 시작되려는 조짐이 느껴진다.

하지만 난 곧 있을 연주회 티켓이 없었다. 때문에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쉬었다가 저녁에 다시 나올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리허설만 하게 될 테지만 환경을 조금 바꿔 보고 싶었다.

난 플라지 빌딩 밖으로 나와선 근처 연습실로 향했다. 이전에 찾아 두었던 곳이기 때문에 헤매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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