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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34화 (1,134/1,277)

##  1134화

마누엘 베르니케는 플라지 빌딩 근처의 연습실에 갔다가 자리가 꽉 찼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휴게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다른 연습실로 옮겨도 되지만 더 이상 움직이기 귀찮았다. 마누엘은 구석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아선 스마트폰을 들었다.

잠깐 안 본 사이에 메시지들이 잔뜩 와 있었다. 그중 몇 개는 어머니가 보낸 것이었다.

마누엘은 내용을 읽어 보고는 대충 답장했다.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아들의 무대가 걱정되니 신경 써 주는 건 고맙다. 하지만 그가 저녁 세션 순서인데도 이렇게 일찍 나와 있는 건 사실 가족들 때문이었다.

그가 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이곳 벨기에 브뤼셀까진 300km 정도 거리다.

그래서 마누엘은 가족과 상의 끝에 티켓과 호스트 패밀리를 반려하고 가족들과 함께 차량으로 이곳에 와서 호텔에 묵고 있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오랜만에 벨기에 여행으로 모두들 들떠 보였고.

하지만 콩쿠르가 시작되고 나니 너무 과할 정도로 모든 것이 마누엘에게 집중되니 부담스러웠다.

마누엘은 그냥 가족들이 신경 쓰지 말고 관광이나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자식이 아무리 자라 봐야 부모 눈에는 어린애라지만…… 스물두 살이나 먹었는데 열 살짜리 애처럼 걱정하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담배나 피우고 올까.’

마누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중에 어른다운 건 담배를 피우는 것뿐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그렇게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

문을 막 열고 들어선 한 여자가 마누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키는 160cm 정도 될까. 황금빛 머리칼과 또렷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이었다.

캐주얼한 셔츠에 바지 차림인데도 보통 사람이 아닐 것 같다는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온다.

마누엘은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타티아나 베르체노바? 어째서 여기에?’

현시대 가장 주목받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 그리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참가자로선 오늘 저녁 세션에서 마누엘 다음 마지막 순서인 피아니스트다.

타티아나의 실물을 처음 본 마누엘은 놀란 나머지 뚫어져라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꽤 실례라는 건 뒤늦게 깨달았다.

“……?”

시선을 느낀 타티아나가 마누엘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과 마주한 마누엘은 순간 굳어 버렸다.

한눈에 반했다든가 하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순간, 마누엘은 그녀가 무서웠다.

‘뭐지?’

눈으로 보는 타티아나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게 생겼다. 몸도 가늘고, 인상을 쓰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마누엘의 직감은 그녀를 어딘가 섬뜩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러시아 거대 재벌의 영애라고 듣긴 했지만, 그 배경만으로 이렇게 보자마자 바로 압력 같은 걸 느낄 수도 있는 건가?

마누엘은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을 애써 무시하면서 어색하게 러시아어로 인사했다.

“안녕.”

“……안녕하세요.”

타티아나는 작은 목소리로 인사에 답했다.

그녀가 그냥 무시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마누엘은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인사를 받아 준 걸 보니 기분이 나쁘진 않은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마누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처음 보자마자 이렇게 눈치부터 살피게 된 건지 모르겠다.

스스로를 조금 한심하게 느낀 마누엘이 고개를 떨구자 타티아나는 차분한 걸음으로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카운터 직원은 짧은 영어로 타티아나에게 남는 부스가 없음을 알렸다.

금요일 오후부터 이렇게 부스가 꽉 찰 줄은 상상도 못 했을 테니 당황할 만도 한데, 타티아나는 전혀 놀란 기색 없이 그럼 기다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이야기를 마친 타티아나는 이내 마누엘의 옆으로 다가왔다. 걸음걸이에서도 기품이 느껴졌다.

지금 그에게 용무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옆에서 기다리려는 것뿐이라는 걸 아는데도 마누엘은 당황했다.

결국 그는 타티아나와 교대하듯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카운터에 가선 괜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얼마나 걸린다고 했죠?』

『음…… 10분 정도면 한 자리는 나올 거예요.』

『알겠습니다.』

쓸데없이 물어본 다음 괜히 시계를 살피는 척하다가 다시 휴게실 쪽을 바라보니 타티아나는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고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쪽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마누엘은 저 여자가 왜 이렇게 대하기 어렵게 느껴지는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작정 불편하다고 피해 버리기엔 타티아나와의 만남은 너무나 아까운 기회였다.

작금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피아니스트와 친분을 쌓을 기회다.

물론 몇 시간 후면 경쟁자로서 무대에 서야 하지만, 경쟁 또한 스포츠맨십에 근거하여 더더욱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주기도 한다.

지금 인사하고 조금이나마 말을 섞어 보는 게 무조건 좋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마누엘은 연습생들을 위해 카운터에 비치해 둔 사탕을 몇 개 집어 들고 다시 휴게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금 서성이다가 타티아나에게 무심하게 그 사탕을 내밀었다.

“……?”

타티아나는 고개를 들어 마누엘이 내민 손을 올려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절이었다.

기껏 용기 내어 말을 걸어 보려고 했는데, 거절당하니 뻘쭘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마누엘은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괜히 휴게실을 빙빙 돌았다.

타티아나가 스마트폰이라도 보면서 이쪽을 무시하고 있다면 차라리 마누엘도 포기했을 텐데, 그녀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누엘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냥 이대로 죽어 버릴까 생각하던 때였다.

‘아.’

부스 쪽에서 피아노가 터져 나가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누엘은 그 음악을 듣자마자 바로 제목을 알 수 있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이었다.

마누엘은 우뚝 멈춰 서선 다시 타티아나를 내려다보았고, 때마침 타티아나 역시 그를 보았다.

서늘한 그녀의 눈빛이 무언가를 제안했다. 마누엘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눈빛에 이끌려 말했다.

“라흐마니노프.”

“라흐마니노프.”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이름을 말했다. 타티아나는 마치 잘했다는 듯 가벼운 미소를 띄웠다.

차갑게만 보였던 얼굴에 웃음기가 올라오니 훨씬 대하기가 편했다. 카운터에서 그녀가 영어로 대화하는 걸 보았기에 마누엘은 먼저 영어로 말했다.

{영어?}

{가능해요.}

어쨌든 말이 통하긴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마누엘은 안도했다.

{다행이네. 내가 러시아어는 인사랑 고맙다는 말밖에 몰라서.}

{그거면 충분하죠. 저도 독일어는 그 둘밖에 몰라요.}

타티아나가 발음하는 영어는 절도 있고 고풍스러웠다. 그 목소리에 감탄하려던 찰나, 마누엘은 놓치고 지나가면 안 될 정보를 깨달았다.

{어떻게 알았어? 베르체노바 양.}

{제 앞 순번 연주자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알아요, 베르니케 씨.}

설마 타티아나 쪽에서도 알아봤을 줄은 몰랐다. 이제야 마누엘은 그녀가 왜 스마트폰을 보고 있지 않았는지 이해했다. 그를 무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약간 기쁘기도 하고, 그전에 했던 바보 짓거리들이 후회되기도 해서 마누엘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참에 정식으로 인사할게. 마누엘 베르니케야.}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예요.}

{참 공교로운 일이네.}

오늘 저녁 세션 마지막 인선인 두 명이 이렇게 일찍 모여선 갈 곳이 없어 결국 근처 연습실로 오게 된 것은 어떠한 숙명적인 흐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뭐가요?}

그런데 타티아나는 묘하게 날카롭게 반응했다. 살짝 목소리 톤을 달리했을 뿐인데 싸늘한 냉기가 소름 돋게 느껴진다.

마누엘이 보기에 그녀는 지금 상당히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같았다.

겉모습은 전혀 흔들림 없이 단정하지만, 그 내면은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 것이다.

그녀를 보자마자 느꼈던 섬뜩함은 바로 그 예기에서 느껴진 것 같았다.

마누엘은 자신이 뭔가 잘못했나 생각하며 대답했다.

{숙소에 있기 거북해서 밖으로 나온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 줄은 몰랐지.}

그 대답에 타티아나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이 상황에 같이 있는 건 곧 동지라는 의미란 걸 깨달은 듯했다.

슬쩍 드러냈던 칼날을 숨기면서 타티아나가 물었다.

{호스트 패밀리가 거북하신가요?}

{난 호텔에 묵고 있어. 가족들이 같이 와 있어서……. 그런데 하나도 안 좋아.}

{좋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1시간 간격으로 별일 없냐고 물어보니 노이로제 걸릴 것 같아서. 가족들의 기대감이 무겁네.}

정말 폼 안 나는 이유였지만 타티아나 앞에선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솔직하게 다 말해 버린 마누엘은 될 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타티아나의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타티아나는 비웃지 않고 꼿꼿한 태도로 그의 이야기를 다 듣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기분인지 알 것 같네요.}

{베르체노바 양도 기대 많이 받겠지? 어때?}

{……최근엔 역할 하나를 내려놓았어요.}

마누엘이 부끄러운 이야기를 솔직하게 한 만큼 그에 대한 보답처럼 타티아나 역시 내면에 있던 이야기를 살짝 꺼내 놓았다.

하지만 역할이라고 해도 무슨 말인지 알 순 없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싶었지만 마누엘은 그녀가 그어 놓은 선을 밟고 싶지 않았다.

단지 지금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한마디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홀가분해 보이진 않네.}

{제 역할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나니 미안하고 걱정도 되는데…… 한편으론 우울하네요.}

중얼거리던 그녀는 눈을 조금 찡그렸다. 우울하다고 말하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다.

마누엘은 속으로 웃었다. 초인처럼 활동하던 타티아나도 이런저런 고민이 있는 것이다.

{아까 내가 기대가 무겁다고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기대하지 않으면 섭섭할 것 같긴 해.}

대충 비슷하게 맞췄나? 타티아나가 생각하는 바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마누엘은 그녀가 비슷하게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슬쩍 제시했다.

타티아나는 인상을 풀고 마누엘을 보더니 옅게 웃었다.

{미안해요. 푸념을 했네요.}

{내가 먼저 했는데, 뭘. 차라리 서로 사정을 모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후후후.}

그녀가 웃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았다.

지금은 무거운 이야기를 하더라도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사이였다. 그러나 마누엘은 차차 그녀와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느꼈다.

지금 부스에 자리가 비기까지 몇 분 안 남았다. 그사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마누엘은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한 지 5초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한 부스 문이 벌컥 열리며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 한 명이 나왔다.

시간을 다 채우지 않고 일찍 그만하려는 모양이었다.

마누엘은 저 녀석을 다시 부스로 집어넣고 교육이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을 느끼면서 노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학생 쪽에서 휴게실 쪽을 슬쩍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진짜로 타티아나 베르체노바!?』

득달같이 달려온 남학생은 타티아나의 팬이었다.

타티아나는 프랑스어를 모르지만 이 상황을 이해하고는 자연스럽게 팬 서비스를 했다. 사인을 해 주고 사진까지 찍는 모습이 무척이나 능숙해 보였다.

남학생이 가고 난 뒤 마누엘이 농담조로 말했다.

{유명인이네, 역시.}

{부끄럽네요.}

{뭘 부끄러워해. 팬 서비스도 좋았고, 저 사람한테 얼마나 좋은 추억이 되었겠어.}

타티아나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마누엘도 같은 피아니스트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괘씸하게도 남학생은 마누엘에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가 버렸지만, 마누엘은 별로 아쉽지 않았다.

지금 이것이 타티아나가 누려야 하는 정확한 위상이었으니까.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이다. 이번 콩쿠르에서 마누엘은 확실하게 자신의 명성을 높일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완벽한 무대와 그 근거가 될 완벽한 준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마누엘은 타티아나를 내버려 두고 부스에 처박혔다간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카운터 쪽을 보니 직원이 이제 부스로 들어가도 좋다며 신호를 보냈다. 마누엘은 먼저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한 자리 비었네. 들어갈래?}

{베르니케 씨가 먼저 오셨잖아요.}

{어차피 들어가선 콩쿠르 영상 볼 것 같거든.}

바로 지체 없이 들어가서 피아노를 붙잡고 마지막 리허설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당장 몇 시간 열심히 해서 결과가 좋아진다면 그건 그것대로 웃긴 일이다.

그래서 마누엘은 실력 좋은 다른 피아니스트의 무대를 보는 것으로 오후 리허설을 갈음하기로 했다.

때론 좋은 걸 보는 것만으로도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 말했을 뿐인데 타티아나가 느닷없이 마누엘이 보려던 피아니스트를 맞혔다.

{알레한드로 페테르손?}

{어라? 그 사람 알아?}

{예, 조금요.}

워낙 잘하는 사람이니 주시하고 있는 건가.

마누엘은 자신의 감식안이 타티아나와 같다는 것이 기뻤다. 잘못 짚지 않았다는 확신이 강해졌다.

타티아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어 말했다.

{오후 세션은 알레한드로와 아나스타샤…… 두 분의 무대에 관심이 있어요.}

{그래?}

마누엘은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이 왔음을 느꼈다.

이대로 타티아나를 먼저 부스에 들여보내든가, 아니면 순서대로 자신이 먼저 들어가든가.

생각 같아선 같이 들어가고 싶다. 타티아나가 하는 연습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오늘 초면인데 저 좁은 부스에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간 정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마누엘은 최소한의 경우는 지키기로 했다.

{베르체노바 양. 조금 뜬금없을지 모르겠는데, 혹시 조용한 곳에서 같이 차 한 잔 안 할래?}

{……차요?}

{연습할 거면 말고.}

웃지 않는 타티아나의 눈빛은 차가웠다. 지금도 솔직히 마누엘은 그녀가 조금 무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화를 내고 있지 않다는 건 명백했다.

잠시 생각하던 타티아나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영상을 볼 예정이긴 했어요. 가죠.}

그녀는 결정을 내리자마자 일어나더니 카운터로 가선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안을 한 건 마누엘이었지만 어쩐지 그녀의 상대로 끌려가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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