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5화
부자들은 평소에 뭘 먹고 살까.
평범한 독일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마누엘은 영화나 드라마 같은 편향된 지식으로만 부자들의 삶을 이해하고 있었다.
점심은 캐비어, 저녁은 푸아그라…….
그래서 마누엘은 고민이 많았다.
타티아나에게 차를 권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그냥 근처 아무 카페에나 들어갔다간 평생 그런 싸구려 공간에 가 본 적이 없는 타티아나가 기겁할지도 모르니까.
타티아나가 갈 법한 특급 럭셔리 카페를 떠올려 보던 마누엘은 옆에서 걷는 타티아나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캐주얼한 차림으로 연습실에 혼자 찾아왔다. 그녀가 딱히 럭셔리함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저번에 봐 둔 곳이 있긴 한데…….’
일단 지금 목적엔 가장 부합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미지수였다. 마누엘은 괜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 불안감이 발걸음에도 묻어 나왔는지, 아니면 단순히 궁금해졌는지 타티아나가 물었다.
{멀리 있나요?}
{어?}
{가고자 하시는 카페요.}
마누엘은 확실하게 지도를 보여 줄까 하다가 그냥 손가락으로 길 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바로 요 앞이긴 한데…… 거기가 베르체노바 양의 마음에 들련지 모르겠네.}
{시끄럽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시끄럽진 않아. 그리고 그 카페에선 며칠 전부터 텔레비전으로 계속 콩쿠르 영상을 틀어 놓더라고. 사람들도 전부 그거 듣고 보느라 조용한 편이었어.}
며칠 전 마누엘이 갔을 때도 콩쿠르 영상을 틀어 놓았으니 아마 오늘도 마찬가지이리라. 만약 안 틀어 놨다면 부탁할 생각이었다.
작은 스마트폰으로 보는 게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다는 말에 타티아나는 즉각 반응했다.
{최고의 조건인데요? 어서 가죠.}
{그런데 막상 차가 좀 대충…….}
{상관없어요. 저희 지금 콩쿠르 중계 보러 가는 거 아니었나요?}
타티아나에게 한 제안은 차를 마시자는 것이었지만 본 목적이 그것이 아니라는 건 두 사람 다 알았다.
오늘 처음 본 사이지만, 아까의 암묵적 합의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마누엘과 타티아나는 여러모로 다른 점이 굉장히 많았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피아니스트라는 공통점이 있는 한 그런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타티아나는 그렇게 마누엘을 대해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누엘 역시 그 대우에 응해야 했다. 마누엘은 쓸데없는 정보 등은 떠올리지 말고 타티아나를 피아니스트만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피아니스트라고 해서 만만한 건 아니지만…….’
타티아나는 걸음걸이만으로도 품위가 넘쳤다. 마누엘은 그녀의 꼿꼿한 연주 자세를 알고 있었다.
평소에도 저렇게 걸으니 마치 피아니스트로서 언제라도 준비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이도 어린데 프로페셔널한 마인드가 굉장히 탄탄했다. 괜히 그 나이에 유명해진 것이 아닌 듯했다.
전 세계의 엄격한 음악가들이 타티아나를 인정한 건 그녀가 여러 면에서 굉장히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이다.
그 옆에서 흐느적거리며 걸을 순 없었다. 마누엘은 일부러 걸음에 신경 쓰고 허리를 펴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이 경도되어 변화하게 하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연습실에서 카페까지의 거리는 5분 남짓. 잠시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으니 기분도 좋았다.
{역시 틀어 놨네.}
카페 안을 슬쩍 보니 텔레비전에선 콩쿠르 관련 방송이 나오고 있었고, 다행히 자리도 있었다. 심지어 텔레비전이 잘 보이는 좋은 위치였다.
두 사람이 테이블에 앉자 점원이 와서 메뉴판을 주었다.
{뭐 마실까?}
{물이 좋지만…… 그래도 무언가 시켜야겠죠?}
{난 홍차로 하려고.}
{저는 그럼 캐모마일 차로 주문해 주세요.}
『저희 결정했어요. 홍차랑 캐모마일 차 한 잔씩 주세요.』
점원이 고개를 까딱이곤 돌아갔다. 마누엘이 주문을 하는 사이 타티아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타티아나를 보던 마누엘은 순간적으로 방금 점원에게 이 관계가 어떻게 보였을지 생각하고 말았다.
막상 이렇게 카페에 앉아서 마실 것들을 주문하고 나니 이건 어떻게 봐도 데이트였다.
‘어라…….’
피아니스트로서 만났으니 피아니스트로 대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순간적으로 진로를 잘못 든 생각은 한번 실수하고 나니 멋대로 빈틈을 파고들고는 이리저리 퍼져 나갔다.
들뜨기 시작하는 마음이 더더욱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그는 어느새 멍하니 타티아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상은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자마자 깨졌다.
타티아나의 단정한 얼굴에선 전혀 연애적 공감대 같은 걸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 보자마자 무섭다고 느꼈던 감각이 다시금 섬뜩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이 강제로 마누엘을 냉정하게 되돌려 주었다.
‘저 애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타티아나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지금 그녀가 100% 피아니스트로서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마누엘을 전혀 남자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방적으로 데이트 같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어도 굉장한 실례다.
혹시라도 타티아나가 알게 된다면 불쾌해할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같이 오게 된 건 같은 저녁 세션 참가자로서 일찍 만났기 때문이니까.
정신을 차린 마누엘은 조금 더 차분하게 그녀에 대해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그녀에겐 이미 애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기까지 했다.
문제는 최근에 큰 사고를 당한 뒤에 소식이 잠잠하다는 점이었다. 상황이 어떤지, 타티아나가 어떤 기분일지 마누엘은 섣불리 생각할 수 없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제안에 응해 준 타티아나에게 미안함을 느낀 마누엘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타티아나는 조용히 있는 마누엘이 의아한지 가만히 보더니 슬쩍 텔레비전 쪽을 돌아보며 대화 주제로 삼았다.
{정말 틀어 놓았네요.}
간신히 마누엘은 정신을 차리고 주제에 합류했다.
{가게 주인이 현명한 거지. 지금 브뤼셀에서 제일 주목받는 대회를 틀어 놓은 거니까.}
어차피 카페엔 음악을 틀어 놓기 마련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곡이라고 할 수 있었다.
콩쿠르 시작이 임박했다. 시간을 본 마누엘이 말했다.
{넉넉하게 1시간 정도 차 마시면 되겠네. 그렇지?}
지금 아예 시간을 정해 놓으면 차라리 깔끔할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나면 갈 생각으로 보인다.
마누엘은 그녀에게 이다음에 뭘 할 거냐고 묻고 싶었으나 극한의 인내력으로 참아 냈다.
잠시 후 화면이 바뀌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오프닝이 시작되었다. 콩쿠르가 열리는 곳과 참가자들의 모습 등이 지나갔다.
지금까지 여섯 번이나 본 오프닝이었지만 마누엘은 스쳐 지나가는 한 장면을 똑똑히 확인했다.
바로 타티아나와 알레한드로가 같이 대화하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흥미가 있다고 했었구나…….’
무슨 대화를 나누었기에 흥미가 생긴 걸까. 아마 피아니스트로서의 흥미겠지만 마누엘은 그녀의 생각이 궁금했다.
오프닝에 쓸 영상 촬영에 협조해 주었으면 한다는 말은 마누엘도 들었다.
하지만 73명이나 되는 참가자들 중 마누엘 말고도 할 사람이 많다는 말에 그는 그 제안을 거절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약간 후회되었다.
{시작이네요.}
타티아나가 작게 말했다. 마침 타이밍 좋게 점원이 홍차와 캐모마일 차를 각자 앞에 가져다주었다. 두 사람은 차를 홀짝이며 텔레비전 화면에 집중했다.
화면이 다시 스튜디오4로 바뀌었다. 거대한 홀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사회자가 나와서 인사 멘트를 하고는 첫 번째 참가자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알레한드로는 두 번째 순서였으니까…….}
{일단은 지금 연주하는 분에게 집중하도록 하죠.}
사실 첫 번째 참가자에겐 두 사람 다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점은 마누엘은 곧장 다른 생각을 한 반면 타티아나는 그래도 지금 보이는 참가자에게 집중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아마 상당히 성실한 성격인 것 같았다.
‘나도 잘 봐야겠네.’
그녀에게 감화된 마누엘은 찻잔을 기울이며 텔레비전 쪽으로 신경을 함께 기울였다.
박수와 함께 무대 위로 올라온 참가자는 체코 출신의 아담 마테유. 이전에도 몇 번 활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 앞에 앉아 손수건으로 손을 닦은 뒤, 아담은 가볍게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첫 곡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3번이었다.
‘무난하네.’
콩쿠르에서 요구하는 고전 소나타 1악장은 참가자의 기본기를 알아보는 목적이 크다. 그러니 괜히 어깨에 힘을 주고 화려하게 연주하려 할 필요 없었다.
되레 트레몰로를 깔끔하게 이어 나가고 피아니시모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편이 점수 따기에 좋다.
아무래도 콩쿠르이다 보니 점수나 평가 같은 것을 기준으로 둘 수밖에 없었다. 마누엘은 나름대로의 분석을 하면서 연주를 지켜보았다.
모차르트는 꽤 좋았다. 실수도 딱히 없는 정석적인 연주였다.
{방금 괜찮았지?}
{괜찮긴 한데…… 조금 더 들어 봐야 알 것 같아요.}
타티아나의 평가는 생각보다 냉정했다. 경쟁자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진지한 평가였다.
그녀의 말을 듣고 마누엘은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어떤 기준으로 타티아나가 방금 그 모차르트 소나타를 미흡하게 평가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아담은 정말 정석적으로 모차르트 소나타를 대했다.
콩쿠르라면 당연히 딱딱한 평가 기준에 부합하기 위한 연주를 하는 것이 유리하니 기본은 정석에 따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연주를 다 듣고 난 지금, 마누엘에게 남은 건 그저 정석적이고 깔끔했다는 감상뿐이었다.
어떠한 인상적인 부분이 딱히 없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진 리스트의 파가니니 연습곡 3번에서 그 문제점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단점이 없는 건 좋은데 장점도 없네…….’
라 캄파넬라라는 부제로 유명한 이 곡은 굉장히 까다로운 만큼 아름답고 이해하기 쉬워서 연주자가 자신의 개성을 살려 화려하게 연주하기에 좋은 곡이다.
마누엘은 아담이 이 곡에서 진짜 실력을 제대로 선보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담의 연주는 이번에도 별다른 특색을 보여 주지 못했다.
필요에 따라 아티큘레이션을 지키고 터치를 조절하지만 자연스러운 일체감이 부족했다.
템포도 정확하고 미스도 없는데 리스트 특유의 광적인 뉘앙스를 잘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직전의 모차르트 고전 피아노 소나타에선 잘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낭만주의 에튀드로 넘어오니 여실히 드러났다.
이것이 여러 시대의 곡들을 요구하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무서움이었다.
그런데 마누엘은 콩쿠르보다는 타티아나에게 조금 더 무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모차르트의 소나타만 듣고도 아담이라는 피아니스트의 문제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관 중인 것도 아니고 멀리서 텔레비전으로 듣고 있는데…….’
심지어 카페 안이라서 소음도 섞이고 있었다. 카페 안 사람들이 모두 콩쿠르에 집중하고 있긴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타티아나는 코앞에서 본 것처럼 평가하고 있었다.
몇 시간 후면 마누엘은 타티아나의 앞 순서로 연주해야 한다. 그때도 그녀는 지금처럼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을 것 같았다.
생각만으로도 섬칫한 기분이 들었지만, 마누엘은 차라리 지금 이렇게 알게 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이어진 아담의 세 번째 에튀드는 현대곡인 파스칼 뒤사팽의 에튀드 2번이었다.
‘이건 잘 모르겠는데…….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클래식 음악가로서 마누엘이 아는 현대 음악들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이 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해 온 것들은 있었지만 그 외엔 잘 모르는 곡도 많았다.
하지만 처음 듣는 것 같은 곡이라고 하더라도 음악이 성립되기 위한 조건과 구조성은 크게 바뀌지 않고,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테크닉과 음악성 역시 그대로 존재했다.
불안하게 날뛰는 음형은 상당히 매력적이었고, 그것을 다루는 연주자도 전문가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마누엘은 완전한 감상자의 입장으로 1분 남짓한 에튀드를 들었고, 이것이 조금 전의 라 캄파넬라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곡은 세르게이 보르트키에비치sergei bortkiewicz의 모음곡 op.3의 1번이었다.
‘느낌이 확 다르네.’
카프리치오라는 이름을 가진 곡답게 격렬하면서도 즉흥적인 느낌이 중요했는데, 아담은 그것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마치 보르트키에비치의 곡이 아니라 자신의 즉흥곡을 연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묵직한 분위기의 첫 테마는 마치 러시아의 겨울밤을 연상케 했다. 춥고 고독하지만 강렬한 에너지는 결코 감출 수 없다.
이어진 두 번째 테마에선 보다 섬세한 춤을 그리고 있었고, 그다음 다시 첫 테마로 돌아오는 소나타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5분 남짓한 곡이었지만 탄탄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분석적으로도 좋았고, 감상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좋았다.
연주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거기에 동조하며 카페 안 사람들도 텔레비전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마누엘은 따라 박수를 치다가 타티아나에게 슬쩍 물었다.
{마지막 두 곡은 좋지 않았어?}
{확실히 좋았어요.}
타티아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누엘은 그녀와 의견이 맞은 것이 무척 기뻤다.
마누엘은 기분 좋게 웃으며 홍차를 홀짝였다. 오늘은 정말 운이 좋았다.
혼자 연습실 구석에 박혀서 영상이나 볼 생각이었는데, 타티아나쯤 되는 피아니스트와 같이 콩쿠르를 관람하며 의견을 교류하게 될 줄은 몰랐다.
곧 자신의 일이 될 콩쿠르였지만 마누엘은 지금 1시간 만큼은 관람에 집중하고 싶었다.
차례를 마친 아담이 박수에 답하며 인사 후 무대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사회자가 두 사람이 기다리던 피아니스트의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