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9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심사 위원 로버트 터너는 아나스타샤 이즈마일로바라는 러시아 참가자의 프로그램을 결정하던 때를 떠올렸다.
아나스타샤가 제출한 고전곡과 자유곡 그리고 4곡의 에튀드를 확인하면서 심사 위원들 사이에선 의견이 분분했다.
그녀가 고른 곡들은 하나같이 난곡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어린 참가자가 가장 어려운 곡들을 자신 있게 내밀고 있으니 당황스러움도 있었다.
그래서 몇몇 심사 위원들은 그녀의 에튀드 2곡을 쉽게 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편의를 봐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연주자들과 형평성을 맞춰야 한다고 판단해야 할 정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시간 관계상 에튀드 한 곡은 짧게 빼더라도 리스트의 초절 기교 에튀드는 무조건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이 아이를 알지…….’
작년, 미국 포트워스 청소년 콩쿠르에 로버트는 자신의 제자를 참가시켰다.
그럭저럭 실력도 괜찮았기에 청소년 콩쿠르를 슬슬 큰 무대로 발돋움할 발판으로 삼을 셈이었다.
하지만 그 콩쿠르를 제대로 써먹은 건 느닷없이 러시아와 한국에서 온 참가자들이었다.
각각 1등과 2등을 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특출한 모습을 보여 주어서 언론의 조명까지 모조리 가져가 버린 게 문제였다.
제자가 실력 미달이었음을 증명당하긴 했지만 당연히 로버트가 앙심 같은 걸 품는 일은 없었다. 더더욱 관심이 생겼을 뿐이었다.
아나스타샤가 포트워스에서 우승했을 당시 그녀가 알캉의 솔로 피아노 심포니를 연주했었던 것을 로버트는 잊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벨기에 브뤼셀에서 아나스타샤는 한 번 더 알캉을 준비해 왔다.
‘다시 보여 봐라, 이즈마일로바.’
자유곡으로 알캉을 준비했다는 건 아나스타샤가 이 첫 번째 라운드에서 실력을 아낄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로버트 역시 그녀의 각오에 응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가지고 온 곡 중 가장 어려운 에튀드들을 통보했다.
다른 심사 위원들은 너무한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지만 로버트는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였다.
그렇게 고른 에튀드 중 하나가 라우타바라의 에튀드였고, 로버트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느꼈다.
{…….}
단 50초의 연주에 13명의 심사 위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로버트는 옆을 돌아보았다.
가장 까탈스러웠던 심사 위원의 펜조차 평가 시트 위를 빙빙 돌고 있을 뿐이었다.
더 빠르거나 현란했던 건 아니다. 아나스타샤가 사용한 템포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이 정도 템포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이곳에 많다.
하지만 그녀만 한 테크닉을 갖춘 피아니스트는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같은 시간 내에 같은 건반을 연타해도 거기에 들어가는 리듬의 균질성은 그야말로 피아니스트로서의 격을 말해 준다.
거기에 더해지는 음의 깊이와 정합성 역시 무척이나 도저했다.
짧고 맥락 없는 현대곡이라는 편견을 모조리 깨 버리는 듯한 연주였다.
로버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평가 시트 첫 번째 란에 최고점을 체크했다.
그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번이었다.
‘고전 소나타조차 어렵게 골랐군.’
베토벤이 죽기 5년 전 작곡한 마지막 소나타. 그야말로 그 대담한 거장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곡이었다.
로버트는 지금까지 수많은 학생이 이 소나타를 연주하는 것을 봐 왔다. 그리고 느낀 것은 어린 학생들에게 이 곡은 너무 버겁다는 것이었다.
20세기 들어 급속도로 발전한 피아니즘의 흐름에 맞추어 테크닉 수준은 모두 엄청나게 상승했다.
덕분에 빠른 테크닉을 요구하는 곡들은 점점 더 많이 들리게 되었다.
하지만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가 가지는 어려움과 깊이는 전혀 파훼되지 않았다. 정말 준비된 몇 명에게만 소리를 내어 주는 곡이다.
20대에 이르러 성숙해서도 이 곡의 크기와 무거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악보만 간신히 따라 치는 피아니스트들도 많을 정도였다.
그런데 아나스타샤가 연주를 시작함과 동시에 로버트는 그녀가 이 곡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러시아에선 베토벤을 어떻게 가르치길래…….’
기본적으로 러시아의 음악학교들은 음악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지식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고 들었다.
그 덕분일까. 아나스타샤의 음악적 이해도는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다단조로 시작한 음악은 마치 베토벤의 음성과 닮아 있는 듯했다.
청력을 완전히 잃고 건강도 좋지 않았던 괴팍한 52세의 독일 남성의 목소리를 로버트는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마치 직접 들어 본 것처럼 피아노로 그것을 옮겨 내고 있었고, 로버트는 그녀의 해석과 표현력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피아노가 단호하고 탁한 고함을 지른다. 그러고는 곧 숨이 찬 듯 사그라들었다. 스스로의 상태를 돌아보고 진정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제시된 주제는 곧 살짝 변주되었다가 그보다 더 깊은 감정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깔끔하군.’
트릴과 옥타브, 스케일, 아르페지오 그 어떤 부분도 테크닉적으론 절대 흠 잡을 곳이 없었다.
가볍게 천천히 연주할 때도, 무겁고 빠르게 연주할 때도 아나스타샤의 손가락은 완벽한 속도와 위치를 계산한 듯 피아노 건반을 터치했다.
그녀의 주법은 굉장히 깔끔하면서도 음량 조절도 완벽해서 그야말로 피아노 테크닉의 교과서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물론 그 테크닉은 베토벤 소나타 연주의 필수 요건에 불과했다. 훨씬 더 중요한 이해와 집중력까지 아나스타샤는 여실히 보여 주었다.
어느새 그녀의 연주는 한층 더 성숙해져선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겉으로 드러나는 노호와 그 속의 감정, 심지어는 그 감정의 근원이 되는 무언가에 이르기까지 아나스타샤의 심도 깊은 연주는 끝을 모르고 강해지고 있었다.
세계에서 베토벤을 가장 잘 연주하는 열일곱 살들의 대회를 연다면 아마 아나스타샤가 지금 당장 1등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평가 시트에 아무 체크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감상만 하는 사이 9분 남짓의 베토벤 소나타 32번의 1악장이 끝났다.
‘2악장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이렇게 분위기와 기대감을 고조시켜 놓고 막상 그것을 해소할 2악장을 연주하지 않는 건 음악계에 대한 배신, 베토벤을 모욕하는 일처럼 느껴질 정도다.
로버트는 억지를 써서라도 아나스타샤에게 2악장을 리퀘스트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콩쿠르 심사 위원에게 그럴 권한은 없었다. 그저 미리 고지했던 대로 고전 소나타의 1악장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평가할 뿐이다.
분한 마음마저 느끼며 로버트는 평가 시트에 다시 체크했다. 다른 심사 위원들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지 영 표정이 석연치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잠시 쉬면서 준비하는가 싶던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연주를 재개했다.
‘놀라서 소리를 낼 뻔했네.’
음악가들에겐 소리 없는 고요도 음악의 일부고, 거기엔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었다.
한 음악이 끝나고 다음 음악으로 이어질 때도 마찬가지다.
정확하게 몇 초 후에 이어 연주하라고 정해 놓진 않았지만 거기엔 거의 모든 연주자들이 동의할 만한 적절한 순간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미묘하게 앞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그 타이밍을 무너뜨렸다. 다음 곡으로 가져올 효과를 더욱 증폭시키기 위함이었다.
‘상당히 영리한데.’
일단 우연적으로 튀어 나간 타이밍은 절대 아니다.
콩쿠르를 대비하여 철저하게 초 단위로 교육받은 것인지, 아니면 직감적으로 행동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나스타샤는 지금 이 순간 이 곡을 위해선 조금 빠르게 진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시작된 곡은 프란츠 리스트의 초절 기교 에튀드 s.139의 2번이었다.
{…….}
단 네 번의 소리를 울리는 것으로 가을의 풍경을 그려 낸 아나스타샤는 빠르게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양손은 피아노 중앙에 모여서 음을 겹쳐서 쏟아 내다가도 갑자기 넓어져선 크게 바뀌기도 했다.
이번에도 속도를 과시하는 일은 없었다. 아나스타샤의 연주는 굉장히 정교하고 아카데믹하면서도 테크닉에 충실했다.
가장 어려운 테크닉도 아무렇지 않게 빠르게 흘려 보내고, 쉬워 보이는 구간은 신중하게 모든 집중력을 쏟아 내 표현한다.
어린 피아니스트들이 정반대로 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나스타샤의 연주는 전혀 열일곱 살의 것 같지가 않았다.
오른손이 날아 옥타브를 연달아 연주하는 중에도 리스트 특유의 다중 선율이 뚜렷하게 들린다.
각 손가락들을 완벽하게 독립 운동하며 구현해 내는 초절 기교 에튀드는 그 수준이 굉장히 높았다.
마치 손의 크기와 손가락의 개수가 인간의 것을 초월한 것처럼 느껴진다.
베토벤에 이어 리스트까지 자신의 탄탄한 실력을 증명해 낸 아나스타샤는 이제 자유곡을 마지막으로 남겨 두고 있었다.
로버트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콩쿠르에서 알캉이라니.’
샤를 발랑탱 알캉. 쇼팽, 리스트와 완벽히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작곡가이지만 사실 지금 그의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많지 않다.
거기엔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는 같은 시대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전위곡인 곡들이 많아서 이해하기가 어렵고, 두 번째는 단순히 지독하게 높은 테크닉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는 13명의 심사 위원 중에서도 알캉의 곡을 연주해 본 사람은 손에 꼽을 것이다.
만약 연주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레퍼토리에 본격적으로 넣는 사람은 드물다. 비단 이곳의 피아니스트들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때문에 알캉의 곡을 가지고 나오더라도 그것을 보는 시선이나 평가 역시 그리 좋지 않았다.
연주하기도 무척 어려울뿐더러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만용을 부린 것에 대한 대가를 아주 강하게 치르도록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기 리사이틀에서나 자유롭게 연주할 법한 곡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라는 거대 콩쿠르의 무대에서 알캉을 택했다.
아무리 자유곡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로 자유로운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이건 전혀 만용이 아니지.’
이미 포트워스에서 아나스타샤의 알캉을 들어 본 적이 있는 로버트는 펜을 내려놓고 집중했다.
고요 속에서 아나스타샤는 이번엔 충분히 시간을 들여 기다렸다. 그리고 이번엔 로버트가 생각하는 타이밍보다 조금 늦게 음악을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청중들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시작하는 시간을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안달이 나게 하고 있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팝 스타가 할 법한 일이었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이솝의 향연…….’
알캉의 마이너 에튀드 12번. 부제는 이솝의 향연.
엄청난 속도와 기교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는 알캉의 곡들과 달리 그래도 조금은 테크닉적인 접근성이 있는 곡이었다.
그럼에도 지독하게 어렵다는 점은 전혀 바뀌지 않지만.
아나스타샤는 장난처럼 가볍게 곡의 시작을 열었다.
마치 그 뒤에 있을 악몽 같은 구간들을 전혀 모르는 듯한 몸짓과 연주였다. 천진난만하게 보이는 그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였다.
하지만 로버트는 아나스타샤가 이미 포트워스에서 보여 주었던 그 실력을 한층 더 뛰어넘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