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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41화 (1,141/1,277)

##  1141화

음악이 멈추고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귀청을 때리고 나서야 마누엘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잠깐 사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마누엘은 이런 기분을 언제 느꼈는지를 떠올렸다. 바로 음대에서 알레한드로를 처음 봤을 때였다.

그 무시무시한 비르투오소를 마주한 순간, 마누엘은 다른 세상에 사는 괴물을 보았다.

아나스타샤의 연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프로그램 구성은 정말 허무맹랑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벅찼고, 만약 전부 연주한다고 해도 템포를 늦추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는 건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피아니스트인 마누엘은 인간의 한계가 어디쯤에 위치하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가뿐하게 그 한계에 도달했고, 심지어 슬쩍 뛰어넘기까지 했다.

마누엘은 다 비운 찻잔을 괜히 들었다 놓고는 중얼거렸다.

{나 참……. 쇼팽 콩쿠르랑 분산되어서 올해는 조금 쉬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네.}

쇼팽 콩쿠르 참가 명단에도 어마어마한 피아니스트들이 많았기에 마누엘은 내심 약간은 긴장을 놓고 있었다.

세상에 천재는 그리 많지 않다. 그중 절반이 쇼팽으로 갔다고 생각한다면 파이널 12명 안엔 어떻게 들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간과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천재들은 그의 또래에서 성숙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갑자기 밑에서 치고 올라오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지구로 떨어진 유성처럼 아나스타샤는 단번에 요주의 인물 반열에 올랐다.

물론 뛰어난 피아니스트를 확인하고 무기력해지거나 자포자기한 건 아니다.

이곳까지 온 프로들의 정신력이 그렇게 나약하진 않다. 마누엘은 보다 시야가 넓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박수를 치던 타티아나는 이때다 싶었는지 마누엘에게 물었다.

{잘하죠? 아나스타샤.}

{해낼 수 있을 거라고 했던 게 알캉이었어?}

{비단 알캉만이 아니라 전부요.}

다른 3곡은 곡 자체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지만, 연주는 특별했다. 마누엘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맞아. 전부 말도 안 될 정도로 잘 하더라.}

마누엘은 항상 독일의 피아니즘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현대 피아니즘의 계보를 따질 때 독일과 러시아의 우열은 가릴 수 없다고 많이 말하지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독일이 위에 있을 것이라 생각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테크닉과 해석력에선 분명 러시아 피아니즘 특유의 강인함이 물씬 느껴지고 있었고, 마누엘은 그것이 피아니스트로서 추구해야 할 진리에 굉장히 가깝게 있다는 직감을 느꼈다.

평생을 독일에서만 공부해 왔지만 잠깐 러시아에 가서 공부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누엘은 타티아나와 조금 더 대화를 하고 싶었다.

독일인으로서 방금 연주에 대한 감상 등을 이야기하고 그녀의 정확한 평가도 들어 보고 싶었다. 타티아나라면 솔직하게 교류해 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곳에 더 있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슬슬 일어날까요?}

{그래. 그런 약속이었지?}

타티아나는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딱 1시간만 같이 있기로 했었다. 마누엘도 그게 적절하다고 생각했고. 하지만 막상 헤어질 때가 되니 아쉬움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눈짓으로 웨이터를 부른 마누엘은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차 한 잔 정도는 내가 사도 되겠지?}

다른 아이 같았으면 넙죽 받았을 텐데, 타티아나는 이런 부분에서도 계산이 확실했다.

아니, 애초에 누군가가 무언가를 사 줄 이유가 없었다.

아마 타티아나라면 이 카페를 통째로 살 수도 있을 테니까. 재벌들의 금전 감각에 대해 잘 모르는 마누엘은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타티아나는 찻잔 두 개를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저도 돈 있어요.}

{지금이 아니면 내가 언제 재벌가 딸에게 차를 사 보겠어?}

아예 대놓고 마누엘이 농담을 던지자 타티아나는 조금 황당해했다. 하지만 다행히 예민하게 받아들이진 않고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마셨습니다, 베르니케 씨.}

{별말씀을.}

계산을 마치고 격식 어린 인사를 나눈 뒤 카페를 나오자 이젠 정말 헤어질 때였다.

타티아나와 함께 연주회 중계를 본 1시간은 정말 즐거웠다. 이쯤에서 쿨하게 헤어져 줘야 끝까지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은 즐거웠……. 아니지, 이따가 볼 거니까. 그럼 저녁에 보자.}

{……어디 가시나요?}

{어?}

{플라지에 가실 것 아니었나요?}

타티아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알레한드로에게 인사 정도는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마누엘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

{저도 가야 해요. 같이 가죠.}

타티아나와 했던 약속은 중계를 보는 1시간 동안 차 한 잔 마시는 것이었다.

그녀는 꽤 단호하고 딱 자르는 면모가 있었기에 마누엘은 그런 그녀를 거스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조금 가까워진 타티아나는 생각보다 그렇게 계산적이거나 예외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후 일정도 겹친다면 굳이 억지로 헤어질 필요는 없다고 먼저 말할 정도로 상식적이고 편안하게 마누엘을 대해 주었다.

마누엘은 타티아나와 조금 더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솔직히 기뻤다.

다시 플라지로 향하는 길을 걷던 중 타티아나가 물었다.

{꽃을 사야 할까요?}

타티아나는 바르고 명석하지만 약간 엉뚱한 면도 있었다.

{베르체노바 양……. 그건 진짜 좀 아닌 것 같아.}

{그, 그래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 난감하지 않겠어?}

아무리 친한 친구의 연주를 축하해 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지금 타티아나는 참가자 신분이다.

그것도 이미 자기 순서를 끝낸 것도 아니고 몇 시간 후면 무대에 올라야 하는.

그런데 잘했다고 꽃다발을 건네주면……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이상했다.

아무리 축하와 경쟁이 양립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적당한 선이 있어야 했다.

타티아나는 뭐가 이상한 건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마누엘의 의견에 따랐다.

{그럼 그냥 가죠. 저번에 세연을 보러 갔을 때도 그냥 갔었으니까.}

{다른 애도 응원했던 거야?}

{예.}

{대부분 자기 연습 하느라 바쁜데. 베르체노바 양은 다른 참가자들 챙기느라 바쁜 것 같네.}

마누엘의 농담 섞인 말에 타티아나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전부였으니까요.}

미묘한 과거형의 말이었다. 마누엘은 다시 걷기 시작한 타티아나를 따르며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하나 내려놓았다며 살짝 우울해하고 있었다.

그것이 뭔지 알 순 없었지만, 아마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해 주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다시 플라지 빌딩으로 돌아왔다.

인터미션 시간이라 그런지 홀 앞과 로비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흥분한 에너지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온다.

이 속에서 알레한드로나 아나스타샤를 어떻게 찾아야 하나 보고 있을 때였다. 타티아나는 군중 쪽은 보지도 않고 앞서 나갔다.

{이쪽으로.}

그녀가 향한 곳은 관계자들이 주로 지나다니는 통로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복도 구석에서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은 한 피아니스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

타티아나가 이름을 부르자 아나스타샤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이 포옹하는 모습을 보며 마누엘은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 타티아나. □□ □□□?”

“□□□. □□ 카페□□ □□ □□□□.”

“□□□□□.”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어가 이어졌다. 마누엘은 약간 뻘쭘한 기분이 들어서 근처에 서 있었다.

다행히 타티아나는 옆의 그를 돌아보고는 영어로 소개시켜 주었다.

{이분은 마누엘 베르니케. 오늘 저녁에 6번째로 무대에 서실 분이에요.}

{아항?}

마누엘이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히죽 웃었다.

{반가워, 이즈마일로바 양.}

인사를 받은 아나스타샤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야말로 반가워요. 저 애랑 같이 있었어요?}

{뭐…… 어쩌다 보니…….}

{그 어쩌다 보니가 어쩌다가인데요? 궁금하네.}

아니나 다를까. 아나스타샤는 쉽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

마누엘이 봐도 타티아나는 약간 순진한 데가 있었다. 아나스타샤 같은 친구라면 더더욱 잘 알 테니 걱정할 만도 했다.

마누엘은 연습실에서 타티아나와 만나 그대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차를 마시러 카페에 간 것까지 이야기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그럼 제 연주도 봐 주셨나요?}

{기절하는 줄 알았어.}

{기절은 안 하셨던 거네요. 역시 조금 부족했나 보네.}

그녀는 농담하며 킥킥 웃었다. 연주에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차라리 이러면 마누엘도 상대하기 편했다.

{정말 인상적이었어. 아마 뭐…… 1라운드 통과는 쉽게 할 것 같은데. 미리 축하해 줘도 될까?}

가벼운 인사와 축하의 메시지가 오갔다. 모든 대화는 영어였다. 마누엘이 러시아어를 전혀 할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마누엘은 슬슬 정말로 비켜 주어야 할 타이밍이란 것을 느꼈다.

{그럼 두 사람 편하게 이야기해.}

약간의 배려를 담아 그렇게 말하자 타티아나가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련 없이 자리를 빠져나온 마누엘은 복도를 조금 거닐며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이번엔 알레한드로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길을 막고 서선 스마트폰으로 무언가 하고 있었다.

‘말을 걸어 볼까.’

사실 아는 척을 할 생각은 딱히 없었다. 하지만 모처럼 타티아나와 조금 친해지고 아나스타샤와도 인사를 한 덕분일까.

용기가 생긴 마누엘은 알레한드로에게도 말을 붙여 보기로 했다. 조금 전 연주한 것이 있으니 그것을 주제로 삼는다면 적당한 대화거리는 충분했다.

{알레한드로 페테르손.}

{……뭐냐?}

말을 걸자 알레한드로는 고개를 들며 대꾸했다. 시큰둥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마누엘은 꿋꿋하게 말했다.

{잠시 대화할 수 있을까? 당신과 같이 쾰른 음대에 다녔었던…….}

{얼굴이 익네. 베르니케였던가?}

{……!}

설마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마누엘이 놀라 말을 잇지 못하자 알레한드로가 피식 웃었다.

{뭘 놀라지? 쾰른 음대에서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해.}

그가 독일 음대의 추억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마누엘은 갑자기 감사 인사부터 전해야 하나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그런 건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

{아무튼, 무슨 일인데?}

{그…… 조금 전 연주가 정말 좋았어서.}

{그건 고마워.}

알레한드로는 자신의 연주의 수준이 훌륭했다는 것 역시 자각 중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충분히 찬사를 받을 만한 음악이었으니 합당하게 받아 챙긴다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신경 쓰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내 다음 순서였던 피아니스트는 어떻게 생각해?}

마누엘은 순간 웃어 버릴 뻔했다. 역시 피아니스트들의 식견은 디테일한 차이가 조금 있을 뿐, 명품을 알아보는 데에 있어선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 맞나 싶던데.}

{역시 그렇지? 상상을 초월하던데. 기절할 뻔했어.}

알레한드로는 마누엘과 똑같이 반응했다.

역시 이런 국제 무대에서 열일곱 살짜리가 알캉을 연주하면 누구라도 기절해 자빠질 만하다.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마누엘은 가까운 곳에서 직관했을, 그리고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밖에 없었던 알레한드로의 의견도 듣고 싶어서 살짝 더 깊게 파고들어갔다.

{그녀는 여력이 남아 있던 것 같던데. 일부러 적당히 했다는 듯 농담하더라고.}

{……무슨 말이야?}

{방금 만나서 이야기했었거든. 저쪽에서.}

손가락으로 복도 저편을 가리키며 마누엘이 말했다. 그런데 돌아온 알레한드로의 반응이 과격했다.

{젠장, 왜 나만? 이거 따져야겠는데. 잠깐 따라와 봐, 베르니케.}

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도 모르고 마누엘은 그 뒤를 따라가야만 했다.

아나스타샤에게 무언가 불만이 있어 보이는데…… 하지만 이렇게 따진다고 그녀가 받아 줄 사람처럼 생각되진 않았다.

괜히 중간에 있다가 불똥만 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적절하게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 사이에서 잘 빠졌는데 다시 돌아가는 것도 모양이 우습다.

그래서 마누엘은 적당히 알레한드로를 붙잡으려 했으나 어느새 그는 이미 멀리 아나스타샤가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누구지, 저건?’

그런데 거기엔 이미 모르는 사람이 두 사람 더 있었다. 동양인으로 보이는 작은 여자와 노년의 남자였다.

둘러서서 이야기하는 걸 보니 여자 세 사람은 친구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에 끼어 있는 한 남자가 약간 균형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멀리서도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마누엘은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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