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2화
아나스타샤의 무대는 정말 훌륭했기에 해 줄 말이 많았다. 난 모든 곡들을 전부 짚으면서 하나하나 다 칭찬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무대보다는 거기에 오르기 전까지의 과정을 내게 설명해 주고 싶어 했다.
“일단 시간은 넉넉하게 잡는 게 좋을 것 같아. 의상 입고 메이크업하는 데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고. 그리고 리허설은 최소 30분, 길면 1시간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다행히 방해하는 사람은 없고 조용해.”
앞으로 몇 시간 후면 내 차례가 오니까 조금이라도 내게 더 도움을 주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게 멋진 연주를 하고도 그에 대한 감상이나 칭찬은 차치하고 현장의 경험을 우선적으로 전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난 가만히 들으며 적당한 타이밍을 기다렸다.
“앉아서 연습하고 있으면 30분 딱 맞춰서 직원이 와서 에튀드 뭐 쳐야 하는지 알려 주는데…….”
“아, 맞아요. 아나스타샤. 라우타바라와 리스트의 곡을 치셨죠? 원하던 곡들이었나요?”
“응? 뭐, 그럭저럭…….”
난 이때다 싶어서 이야기의 초점을 그녀가 골랐던 곡들로 슬쩍 바꿔 놓았다.
역시 지금은 아나스타샤가 주인공이어야 할 상황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녀 역시 내가 음악 이야기를 꺼낸 걸 이해하는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당시 기억이나 기분 등을 떠올리는 듯했다.
무슨 말을 해도 칭찬할 생각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기다리자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사실 리스트는 약간 과한 게 아닌가 싶긴 했는데…… 심사 위원들은 다 듣고 싶었나 봐.”
“과해요?”
“알캉에 임팩트를 주고 싶었어.”
아나스타샤의 낭만주의적 비르투오시즘은 알캉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조금 서정적인 곡들을 먼저 연주하여 음악성을 증명한 다음 테크닉으로 끝내는 쪽이 확실히 더 임팩트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에튀드 후보 4곡 중 1곡은 반드시 리스트의 곡이어야만 했고, 거기서 심사 위원이 고른 2곡에 리스트의 곡이 포함된 건 사전 회의 과정에서 논의 된 일이었을 테니까……
결국 아나스타샤도 완전히 자기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연주하진 못했던 것이다.
물론 이상하거나 잘못된 점은 전혀 없었다. 난 아나스타샤가 정말 유기적이고 강력하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좋았다고 생각해요.”
“다행이네. 나 정말 준비 열심히 했거든.”
연주에 걸린 시간은 25분 정도. 그사이 모든 집중력을 쏟아부은 여파가 뒤늦게 찾아오는지 아나스타샤는 배시시 웃으며 목을 기울였다.
“너뿐만 아니라 이번에도 이겨야 할 애가…….”
작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나스타샤! 타티아나!}
“저기 오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세연과 교수님이 이제 막 우릴 발견했는지 복도 저편에서 다가왔다.
세연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빠르게 달려오더니 아나스타샤를 덥석 포옹했다.
{최고였어! 아나스타샤!}
{고마워.}
세연은 사실 오늘 이곳에 올 이유가 없다. 하지만 저번에 그녀가 무대에 섰을 때 내가 갔던 것처럼 순수하게 응원 목적으로 와 준 듯했다.
그래, 세연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교수님은 왜 여기 계신 걸까.
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과 동시에 긴장감을 느꼈다.
마지막에 교수님과 헤어졌을 때 보였던 추태가 떠올랐던 탓이었다.
때문에 일부러 교수님 쪽으론 눈인사만 살짝 보내고는 세연과 아나스타샤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굉장히 기뻐 보였다.
{시작부터 전력을 다하고 있구나? 저번에도 알캉으로 1등 했었잖아?}
{쓸 수 있는 건 아끼지 말아야지.}
{그건 그래!}
조금 전 아나스타샤가 이번에 이겨야 할 애가 있다고 했던 건 세연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포트워스 콩쿠르에서 아나스타샤와 세연은 각각 1등과 2등을 거머쥐었다.
거기에서부터 이어져 온 연주자로서의 인연과 서로를 의식하는 마음 등이 지금도 여전히 팽팽하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내가 없어도 두 사람은 알아서 관계성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난 그것이 순수하게 기뻐서 웃으며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세연과 이야기를 나누던 아나스타샤가 순간 내 뒤편으로 궁금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것을 눈치챈 세연이 빠르게 소개했다.
{아, 이분은 우리 교수님이셔! 교수님, 이쪽은 제 친구인 아나스타샤예요.}
교수님은 앞으로 한 걸음 나와선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이즈마일로바 양. 박성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입니다.}
친구의 교수님이란 말에 아나스타샤는 정중한 태도로 인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의아함을 담고 있는 눈빛은 그대로였다.
세연의 교수님이 브뤼셀에 왔다는 사실은 저번에 들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같이 온 건 조금 묘한 일이었다.
눈치 빠른 아나스타샤는 교수님이 용건 없이 오진 않으셨을 거라 직감한 듯했다.
그 용건에 대해선 세연이 설명해 주었다.
{오늘 오후부터 나랑 같이 계셨거든. 그런데 내가 널 보러 하러 가야겠다고 했더니 감상을 전하고 싶다고 하셔서…….}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그리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마 세연과 함께 무대를 보고 나서 알캉에 탄복하신 듯하다.
난 지금 교수님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조금 웃고 말았다.
역시 피아노에 업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아나스타샤에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세상 모든 음악가들이 다 그렇겠지.
교수님은 담담한 표정으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시더니 살짝 고개를 돌려 세연에게 짧게 말했다.
「세연아, 이즈마일로바 양에게 1라운드 통과 축하한다고 전해 주렴.」
감상이라고 하긴 어려웠지만 교수님이 전반적으로 느낀 것들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결론이 너무 이른 것 같긴 하다. 세연이 놀라워했다.
「어라…… 벌써요?」
「그래. 그대로 전하렴.」
그 말을 전해 들은 아나스타샤도 같은 반응이었다.
{축하받기엔 너무 이르지 않나요?}
교수님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세연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어떻게 봐도 이즈마일로바 양보다 앞에 설 사람이 24명이나 될 것 같진 않다고 하시네.}
{굉장히 높은 평가이신데?}
묻고 따질 것도 없이 통과라고 확인해 주는 말에 아나스타샤는 기분 좋게 웃었다. 어쨌든 간에 목적을 달성했다면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난 이 대화 과정을 보면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교수님은 영어를 아주 잘하시진 않지만 그래도 충분히 대화를 나눌 정도는 하신다.
저번에 나와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나스타샤와도 충분히 교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세연을 통해 이야기하신 건, 어떻게 보더라도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이었다.
앞으로 우리와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않고 반드시 세연을 통하겠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갑자기 교수님과의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아마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리라.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마음으로 서 있는데, 문득 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교수님이 세연의 친구인 우리와 거리를 두기로 하신 것이라면 이렇게 만나러 오실 이유도 없다.
감상을 전하고 싶으신 거라면 세연에게 말을 전해 달라고 하면 될 일이다. 어차피 직접 이야기할 생각은 별로 없어 보이시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계시다는 건…… 세연이 걱정되었던 걸까? 나나 아나스타샤가 또 이 아이에게 무언가 영향을 끼칠까 봐? 그걸 확인하고 싶으셨던 걸까?
‘넘겨짚진 말자…….’
내 생각은 빠르게 이곳저곳을 찔러 댔다. 순간적으로 움찔했던 나는 다시 차분하게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지금은 무언가 앞서 생각할 때가 아니다.
그런데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 낯익은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어…… 알레한드로 씨.”
“저 사람…….”
조금 전 자리를 피해 주었던 마누엘 그리고 아나스타샤의 앞 순서로 연주했었던 알레한드로.
두 사람이 우리 쪽으로 와서 합류했다. 통로 난간에 모인 사람은 이제 6명이나 되었다.
뭔가 왁자지껄한 느낌이 든다. 어째서인지 난 여기서 슬쩍 빠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표정을 보니 그럴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녀는 알레한드로를 보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여전히 그가 싫은가 보다.
난 알레한드로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중간에서 변호사이자 친해질 매개가 되어 주려 했다. 그런데 알레한드로가 내 꿈을 박살 냈다.
“이즈마일로바 선배님, 이번엔 제가 졌습니다. 인정하죠.”
갑작스러운 그의 발언에 아나스타샤가 정말로 질색하며 물러섰다. 난 그녀가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라는 건 처음 보았다.
내가 어찌할 도리도 없었다. 덩달아 당황한 난 알레한드로에게 급히 물었다.
“지금 뭐라고…… 선배님이라고요? 왜요?”
“아까 내기했거든. 나이고 뭐고 실력이 전부인 콩쿠르에 왔으니 잘한 쪽이 선배 하기로.”
“그게 무슨…… 아나스타샤! 어째서 그런 내기를 제안하신 거예요?”
나 역시 알레한드로에게 도전장을 던진 적이 있으니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건이 너무 과격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내가 그럴 리 없잖아!”
“그럼 알레한드로가 손해뿐일 내기를 제안했다고요……?”
“그래! 그랬다니까! 저 사람 이상해!”
이젠 나도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알레한드로는 진짜 이상한 사람이다.
그녀와 같은 눈빛으로 알레한드로를 올려다보니 그는 난처한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옆의 마누엘에게 무어라 말했다.
그냥 어색하니까 분위기를 돌려 보려는 심산이 훤하게 보인다.
이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내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세연이었다.
{뭐…… 뭐야? 왜 싸워?}
무섭고 걱정된다는 듯 그녀가 물었다. 러시아어로 오가는 대화 속에서 느껴진 건 혼란과 아나스타샤의 짜증뿐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마누엘도 당황해하는 것 같고, 교수님은 우리가 뭘 하든지 그냥 지켜보실 것 같았다.
난 일단 언어적인 부분을 규정했다.
{영어로 이야기할까요, 우리? 모두 알아들을 수 있게요.}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영어가 모국어인 화자는 없었다.
다 같이 외국어로 말하는 것이니까 그럼 흥분도 조금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달라진 분위기에서 아나스타샤는 알레한드로와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고, 세연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기한은 언제까지예요? 다음 라운드까지?}
{그래야지.}
{그러긴 뭘 그래! 당장 그만둬요. 진짜로 거북하니까.}
선배란 호칭으로 불리는 게 정말 징그러운지 아나스타샤는 몸서리치기까지 했다.
알레한드로는 처음엔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는 어떻게 하면 더 괴롭힐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흥미와 재미를 위해서라면 평가 같은 건 내던지는 사람이었다.
다시 다투기 시작한 두 사람을 보던 교수님은 홀로 조용히 말하며 웃으셨다.
「피아노 실력으로 선후배도 정한다 이건가……. 하하하, 역시 재미있군.」
젊은 연주자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보시는 그 눈빛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세연이 불쑥 끼어들며 빠르게 말했다.
「제가 왜 타티아나를 선배처럼 생각하는지도 아시겠죠? 교수님.」
「내가 그걸 모르겠니. 어제 이야기 듣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
「그걸 인정하지 않으시는 거잖아요. 다시 분명하게 말씀드릴게요. 전 타티아나가 훨씬 더 실력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혼자 일방적으로 선배로 여길 뿐이에요. 그러니 타티아나의 잘못은 없어요.」
난 깜짝 놀랐다. 세연의 목소리에 따지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거기에 기분 나빠 하시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그래. 알았다.」
「이따가 사과해 주시는 거예요? 어제 약속하신대로요.」
「그래.」
어제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세연이 날 지켜 주려고 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존경하는 교수님에게 정면으로 대들면서까지.
보다 상황이 분명해졌다. 지금 교수님의 용건은 연주를 마친 아나스타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게 있었던 것이다.
순간 목이 메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르면서 난 마음 약해지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저 애가 날 좋아하는 만큼 나 역시 저 애가 소중하다.
그러나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행했던 것들이 저 애를 망칠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일단 이야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죄송하지만 영어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저에게 무슨 문제라도?}
{응?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세연은 급히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난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