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3화
6명의 피아노 연주자들이 모여서 할 이야기는 정말 많았다.
주로 오가는 건 알레한드로와 아나스타샤가 연주했었던 곡들에 대한 감상이었지만, 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대한 정보도 주된 주제였다.
게다가 여기엔 교수님도 한 분 있다.
교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곡들, 작곡가, 연주자, 콩쿠르 등에 대해서 알고 계셨고 그런 지식들을 비교하며 설명해 주실 수 있었다.
처음에 교수님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이던 알레한드로는 차차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이내 제일 열의를 가지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한국도 한번 가 봐야겠는데?}
알레한드로는 아르헨티나, 러시아, 독일의 음악 교육을 받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연주자였다.
스물일곱 살밖에 안 되었는데 그렇게 다채로운 교육을 받고 한 몸에 습득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더욱 배움을 추구해 나갔다.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을 이루었다면 대부분 그것을 더 공고하게 하기 마련인데, 알레한드로는 적극적으로 다른 걸 더 보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과 내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라고 보고 있었다.
음악에 미쳐 있는 사람들. 하지만 난 알레한드로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순수하고 건전하게 음악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 갈 무렵이었다. 계단을 막 내려온 누군가가 급하게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페테르손 씨! 이즈마일로바 씨!}
홀 직원처럼 보이는 여성분이었다. 모두가 깜짝 놀라자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빠르게 다가오며 말했다.
{두 분 여기 계셨군요. 연락할 방법이 없어 찾아다녔습니다.}
{아, 죄송해요. 폰을 꺼 놔서.}
{보통 그렇죠! 아하하, 그래서 이렇게 찾으러 다닐 일이 많습니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녀는 가볍게 웃고는 알레한드로와 아나스타샤를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했다.
방금 연주를 마친 두 사람에게 잠시 확인받아야 할 것이 있으니 사무실로 와 달라는 이야기였다. 아마 콩쿠르 측 행정적인 이유인 것 같았다.
알레한드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음, 1분만 있다가 가도 될까요?}
{꼭 부탁드립니다! 전 다른 분도 찾으러 가야 해서요!}
{수고 많으십니다.}
직원이 다시 빠르게 떠나가니 살짝 분위기가 바뀌었다.
방금 전까진 하루 종일 음악 이야기를 해도 상관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당장 각자의 일을 찾아 떠나야 할 것 같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아나스타샤였다.
{가 봐야겠네.}
{그러네요.}
{너는 저 애와 더 있을 거니?}
아나스타샤가 말한 건 세연이었다. 아마 세연이 지금 바로 돌아갈 것 같진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녀는 이곳에서 내 순서까지 응원하려고 하겠지. 그렇다면 잠시 있어 줄 필요가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그렇구나.}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건 아나스타샤도 아는지 그녀는 옅게 웃더니 조금 더 내 쪽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너무 길게 이야기하진 말고. 너도 곧 준비해야 하잖아?}
설마 무언가 눈치챈 걸까.
난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제 생일 파티를 할 때도 난 세연을 어색하게 대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아나스타샤에겐 일부 들켰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날 바라보는 아나스타샤의 눈빛에선 약간의 걱정 외엔 다른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단순히 내 무대에 신경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알고 있어요.}
아나스타샤를 안심시키기 위해 짧게 대답하니 그녀는 허리를 쭉 펴면서 고양이처럼 스트레칭했다.
{처리할 것 해 놓고 나도 집에 가서 조금 쉬어야겠어. 그리고…… 이따 밤에 다시 올게.}
{고생했어요. 푹 쉬세요, 아나스타샤.}
{응.}
밝게 웃던 아나스타샤는 이어 마누엘을 향해 말했다.
{베르니케 씨도 잘하세요.}
{어? 어, 고마워.}
마누엘은 설마 아나스타샤가 친구인 날 옆에 두고 자기까지 응원할 줄은 몰랐다는 듯 당황해했다.
하지만 나도 아나스타샤도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들이다.
교수님과 무언가 이야기하던 알레한드로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자는 듯 박수를 짝 쳤다.
{이만 시간 뺏지 않고 갈게. 네가 무대에 오를 모습이 기대되네, 타티아나.}
그의 기대 어린 눈빛은 조금 무겁다. 내가 무언가 특별한 걸 보여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눈빛이다.
그러나 난 그런 기대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힘을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난 도전적으로 웃으며 대꾸했다.
{마음껏 기대해 주세요.}
{그래, 그거야.}
마음에 든다는 듯 알레한드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더니 미소를 흘리며 뒤로 돌아섰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먼저 떠나갔다.
마누엘도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알레한드로를 따라갔고, 아나스타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뒤를 따랐다.
이제 남은 건 나와 세연, 교수님뿐이었다.
어색한 침묵과 눈빛만이 오갔다. 어제 이야기를 나눈 나와 세연은 물론이고, 교수님과는 정말로 어색했다.
{타티아나.}
이 사이에서 중재할 수 있는 건 세연뿐이었다. 그녀는 모종의 의무감을 가지고 있는지 눈치를 보면서도 내게 말을 걸었다.
{이제 준비하러 가야 하니?}
8시 세션이 시작하기 전까진 아직 한참 남아 있었고, 시작하고 난 후에도 내 순서가 오려면 앞서 6명이나 연주해야 한다.
{여유 있어요.}
{있잖아, 그럼…… 차 마시러 안 갈래? 딱 15분만…….}
아까 교수님과 나누던 이야기에서 미루어 보면…… 아마 세연은 교수님이 내게 사과하실 자리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걸 거부할 순 없었다. 적어도 세연이 보기에 겉으로나마 상황을 잘 마무리한 것처럼 보여야 할 테니까.
{그럴까요.}
우린 플라지 빌딩을 빠져나와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오후의 카페엔 사람들이 많았지만 다행히 조용한 구석에 셋이 앉을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네모난 테이블에 세연과 내가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 교수님이 앉았다.
사실 세연과 교수님이 같이 앉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지금 세연은 내 옆자리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세연의 존재감이 평소보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난 그녀가 날 붙잡아 두려는 이유를 알면서도 모른 척 가만히 있었다.
주문을 하고 나서 세연이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교수님 계시니 어색하지?}
{괜찮아요.}
{미안해, 저기…….}
세연은 사소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려 했으나 여기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곤 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제 너랑 이야기하고 나서 많이 생각해 봤어. 그랬더니 그냥은 못 있겠더라고. 그래서…….}
{교수님과 이야기하셨나요?}
{응. 나도 그 정도의 권리는 있다고 생각했거든.}
나도 어제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교수님에게 곧장 따지겠다고 하던 그 모습에서 위안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었다.
두 사제의 사이가 틀어지는 건 절대로 있어선 안 될 일이다. 난 그 점에 대해서 만큼은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세연은 맞은편의 교수님에게 눈빛으로 무언가 동의를 구하는 듯 싶더니 고개를 돌려 날 마주하며 말했다.
{그런데 교수님도 굉장히 후회하고 계신대.}
{후회요?}
{응. 너랑 했던 이야기들이 너무 과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네가 분명 선의로 날 대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고…… 그러셨어.}
그렇게 세연이 대신 전하는 사과를 다 듣고 교수님이 영어로 말씀하셨다.
{미안합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아마 더 길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와 교수님 사이엔 일단락된 합의점이 존재했다.
세연이 있으면 그녀의 중계를 통해서 대화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세연을 통하면 분명 할 수 있는 말도 제한되고 뜻도 원활하게 전달되지 않겠지. 하지만 그 정도의 선이 있어야 나도 교수님도 보다 객관적일 수 있다.
불편하고 기이한 관계. 무엇이 옳은지 잘 모르겠다. 교수님은 짧게 사과만 하시곤 다시 날 보고만 계셨다.
세연이 빠르게 물었다.
「사과 다 하신 거예요?」
「아니. 다음은 네가 전해 주겠니?」
「……그럴게요.」
「내 개인적인 우려가 도를 넘어선 것 같다고 전해 주련.」
교수님과 단둘이 이야기했을 때, 교수님은 날 세연의 친구가 아니라 한 명의 피아노 연주자로 보고 계셨다.
때문에 솔직하게 걱정하는 부분들을 이야기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바보 같은 모습을 보였고, 그 직후 교수님이 날 보는 시선은 다시 세연의 친구로 떨어졌다.
지금도 교수님은 내게 미안해하고 계셨다.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인 모습들이 있기 때문에 변명조차 불가능했다.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는 사이 세연이 교수님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교수님은 개인적인 걱정이 있다고 하시네.}
{그 걱정이 뭔지 저도 알아요. 그리고…… 전 교수님이 옳다고 생각해요, 세연.}
{그게 무슨…….}
{세연도 아시잖아요. 제 음악에서 힌트를 얻고 계시다는 것.}
이렇게 된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시 문제의 중심으로 파고드는 일이었다.
어째서 브뤼셀로 와야 했을 정도로 교수님이 걱정하며 날 확인하고 싶어 하셨던 것인지, 내가 세연을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지.
우린 서로 말로 하지만 않았을 뿐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건…….}
{전 그게 무척이나 기뻤어요. 세연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나도 기뻤어!! 내가 금방 네 의도를 따라갈 수 있는 건 분명 무언가 우리 음악이 잘 맞는 거니까……!}
{알아요. 하지만 사실 제 의도란 건 그렇게 순수한 것이 아니거든요.}
{어?}
당황한 듯 세연이 더듬거렸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짚이는 구석이 있는 듯 보였다.
내가 세연을 멀리 하면서도 몇 번이나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마치 가르쳐 주려는 듯 대했던 것을 한 번쯤은 이상하게 여겼을 테니까.
물론 나도 세연을 정말 후배나 제자처럼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저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욕심이 앞섰을 뿐이니 지금 명확한 단어로 내 의도와 관계를 설명할 순 없었다.
딱 하나 확실한 건 그녀에게 위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는 것뿐이었다.
난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저처럼 미숙한 타인이 제자를 휘두르려고 하는 게 교수님에겐 어떻게 보이셨겠어요? 걱정하시는 것도 당연하죠.}
{휘두르다니? 그게 아니…… 아니란 건 알잖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면 그게 전부예요.}
내가 어떤 의도를 가졌었는지는 나 스스로도 분명치 않을 정도고, 이젠 사실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세상엔 돌이킬 수 없는 일도 많으니까.}
난 결코 건전한 정신으로 음악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고, 내 방식은 굉장히 위험하다.
그걸 그렇게 잘 알면서도 또다시 무책임하게 경솔한 짓을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난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세연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제와 달리 그 눈빛에선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러나 난 이미 생각의 정리를 마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