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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44화 (1,144/1,277)

##  1144화

세연이 자신 있게 실력을 발휘한 쇼팽의 마주르카를 처음 들었을 때 난 정말 큰 충격을 받았었다.

어떻게 이렇게 나와 비슷한 리듬감을 지닌 아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건 절대적인 실력과 관계없는 선천적인 음악성 같은 것이라서 훈련으로 바꾸더라도 반드시 원형이 남는 부분이었는데, 세연은 기이할 정도로 나와 유사한 호흡과 감각으로 리듬을 구사했던 것이다.

나는 나중에 세연이 교수님의 새로운 제자라는 사실을 알고 어떻게 된 상황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교수님은 바로 알아보셨을 거야.’

세연은 기본적으로 나와 비슷한 리듬감을 가졌다. 음악성에 예민한 교수님은 세연을 보자마자 흥미를 느끼셨을 것이다.

그리고 데려와선 아마도 그대로 가르치셨겠지. 그러니 세연의 음악은 선천적 후천적으로 날 닮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내 마음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내가 사라진 세상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 같은 세연에 대한 신비로움, 미련을 느끼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교수님에 대한 안타까움, 약간의 안도감.

그 혼란 속에서 난 최선의 위치를 찾으려고 애썼고,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교수님은 내가 그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것만으로도 위험을 감지했다.

더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내 역할은 이미 없다.

세연을 이루는 건 그녀 자신의 재능과 교수님의 가르침이다. 난 그저 방황하며 착각하고 있을 뿐.

이젠 그만둘 때였다. 방황하던 망령이 혹시라도 다른 마음을 먹기 전에.

‘제일 확실한 방법은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겠지.’

세연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기 위해 앞서 있을 필요가 없다면 아예 그녀 눈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좋다.

내가 계속 피아노 앞에 있으면 세연은 피아노가 아닌 날 볼 테니까.

하지만 지금 갑작스레 그랬다가는 당장 세연에게도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나스타샤에 대한 배신이 될 테고, 에르네스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하게 될 테지. 수많은 사람이 실망할 터다.

그러니 그만둘 순 없다. 이미 멈추기엔 너무 멀리까지 와 버렸다. 난 무대에 서야만 했고, 그러면서도 세연에게 경고해야만 했다.

조금 어렵지만 불가능하진 않은 방법이 있다. 난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말로 할 수 있는 입장을 밝히고 나서 입을 다물고 있자 조용히 듣고 계시던 교수님이 낮게 말했다.

「저 아이는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 같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마음의 결정? 무슨 결정요?」

세연은 항상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옆에서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진동이 전해져 왔다.

그녀는 스스로를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떨면서 말했다.

「앞으로 저랑은 음악으로 대화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건가요? 타티아나가?」

「……진정하렴.」

「그건 말도 안 돼요. 타티아나가 그렇게 결정해도 전…….」

다시 소리 높여 말하려던 그녀는 순간적으로 맥이 탁 풀린 듯 말끝을 흐렸다.

내가 연주하는 걸 어떻게든 보기만 한다면 세연은 거기에서 습득할 수 있는 것들이 있겠지. 하지만 난 의도적으로 내 음악을 숨기고 억누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아예 연주하지 않는 방법도 있었다. 이미 사람들 앞에서 쇼팽을 잘 연주하지 않는 것처럼.

앞으로도 세연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곡들을 연주하지 않으면 된다. 혹은 연주하더라도 적당히 비틀어 놓을 수도 있고.

연주자인 내가 쓸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세연은 그걸 알고 있었다.

옆에서 날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난 일부러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목이 고정된 것처럼 교수님 쪽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와 눈을 마주한 교수님은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세연아, 잘 생각해 보련. 저 아이가 널 싫어해서가 아니라는 걸…….」

「그쯤은 저도 알아요! 그리고 우린 잘할 수 있었다고요!」

내게 향하던 모종의 에너지는 내가 받아 주지 않자 갈 곳을 잃고 있다가 교수님의 방향으로 터져 나갔다.

세연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 스스로에게 놀랐는지 움찔하더니 이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잘하고 있었잖아요……. 그냥 내버려 두셨으면…….」

「세연아.」

「그렇다고 제가 언제 교수님 말씀 안 들었던 적이 있었나요?」

세연의 잘못은 전혀 없다. 그녀는 교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랐고, 그 가르침을 앞서 알고 있는 내가 주는 노하우를 빠르게 익혔을 뿐이다.

교수님은 그 부분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었다.

「아니, 넌 항상 내가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잘 해냈지. 네가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모두에게 손을 뻗어서.」

「그런데 왜 이 애한테 쓸데없는 말씀을 하신 건데요?」

그렇게 손을 뻗어 얻은 도움에 단지 노하우 같은 것만 담겨 있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건 교수님이 설명하기도 어렵고, 내가 말해 줄 수도 없는 부분이었다.

답답해진 세연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원망은 계속 교수님 쪽으로만 향하고 있었다. 지금도 내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세연은 잘 모르겠지만 그건 날 지옥으로 밀어 넣는 일이다. 차라리 그녀가 날 원망하는 쪽이 낫다.

{두 분.}

슬쩍 끼어든 나는 냉정하게 이야기했다.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해 주세요. 아니면 전 이만 일어날게요.}

이렇게 차갑게 이야기하기까지 정말 많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목소리를 떨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만큼 내가 분명한 확신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난 내 입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천천히 돌아보자 세연은 당황해하며 허둥거렸다.

계속 내가 들을 수 없게 교수님에게만 원망을 쏟아 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모습이었다.

잠시 진정하는 사이 주문했던 음료가 나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음료에 손을 대지 않았다. 모두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던 까닭이다.

이윽고 먼저 이야기하기 시작한 건 세연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조금 차분함을 되찾은 듯 보였다.

{타티아나, 난 네가 날 휘둘렀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린 이런 말을 할 것도 없이 알고 있어. 우리가 다루는 음악엔 묘한 공통점이 있다는 걸 말이야.}

당연히 세연도 알고 있을 터였다. 우린 억지로 닮으려 하지 않아도 이미 기본적인 부분들이 많이 비슷했다.

때문에 조금만 신경 쓰면 금방 상대를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걸 몸소 체감했던 세연이 음악가로서 나와 비슷하다는 걸 모를 순 없었다. 아마 교수님이 그녀를 제자로 거둔 이유까진 모를 수도 있겠지만…….

세연은 내 침묵을 동의로 해석했는지 빙그레 웃더니 이어 말했다.

{어떤 부분이라고 딱 짚어서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분명히 있어. 너도 그걸 알고 날 친구로 삼아 준 거겠지.}

{삼아 주다뇨.}

{혹시 그게 순수하지 않은 의도였다고 생각하는 거야?}

난 조금 전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세연을 보는 내 시선은 상당히 비틀려 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선 친구로 보고 있겠지만, 연주자인 내 자신은 정말 불순한 의도로 세연을 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연은 날 변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졌다.

{음악에 대한 호기심과 이끌림…… 그게 과연 우리들에게 있어서 순수한 걸까, 아니면 이기적인 걸까? 솔직히 나도 그걸 어떻게 정의해야 할진 모르겠어. 순수한 이기심이라고 하면 어때?}

{세연.}

{그렇게 따지면 나도 꼭 떳떳한 의도로만 네게 다가갔던 게 아니야.}

굳이 의식하지 않았어도 될 것들을 세연은 생각하고 말았다. 내 생각을 이해하고 동질감을 느끼기 위해서.

난 그녀가 점점 더 내 쪽으로 다가온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무척 슬펐다.

{교수님이 정말 잘못 알고 계시는 게 있지. 네가 날 어떻게 했다고……. 전혀 아닌데 말이야. 그렇지?}

{…….}

{넌 날 보자마자 밀쳐 내려고 했었어. 그걸 억지로 비집고 들어갔던 건 나였고.}

올곧게 날 바라보는 눈동자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나야말로 널 이용하려고만 했던 거야. 난 그걸 어제 깊게 생각해 보고 나서야 깨달았어.}

그러나 곧 그 눈빛은 강하게 흔들렸다.

{정말 미안해, 타티아나.}

뒤늦게 죄책감을 느낀 세연은 울먹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그것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휙 고개를 돌리곤 손등으로 닦아 냈다.

‘이 아이를 어쩌면 좋지.’

세연이 한 건 그저 교수님과 내 기대에 부응하려고 했던 것뿐이다.

잘못한 것 하나 없이 열심히 했을 뿐인데도 그녀는 훌쩍이며 용서를 빌었다.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음악의 길에 오른 세연과 새 제자를 찾은 교수님을 축복하고 응원하진 못할망정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다.

세연은 이미 내게 많이 의지하고 있다. 난 그걸 주박이나 저주라고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어쩌면 좋을까.

이미 무대 위에서 하고자 하는 건 독하게 마음을 먹고 정해 놓았다. 그걸 바꿀 순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울고 있는 세연에게까지 냉정하게 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난 천천히 세연의 손을 잡았다. 세연은 흠칫 놀라며 날 바라보았다.

{세연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그건 저 역시 같아요.}

{아니야, 그게 다 내가 시작한…….}

{제가 세연을 그리하게끔 유도했다면요?}

{……응?}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느끼는 죄책감마저 내게 옮기는 것이었다.

{전 세연을 보자마자 알았어요. 저와 무척 닮아 있다는 걸…… 그리고 저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그래서 어쩌면 세연이 제가 보지 못하는 곳까지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죠.}

맞은편의 교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조금 놀라고 계시다는 건 느껴졌다.

어차피 이제 이 정도는 말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일련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 그건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할 말은 그다음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세연과 교수님이 찾아야 할 길이에요.}

딱 잘라 이야기하자 세연은 내 손을 조금 더 꽉 쥐며 말했다.

{네가 보지 못하는 곳이라면 더 높은…… 그런 음악적 경지를 말하는 거야?}

{세연이라면 가능할…….}

{그럼 네가 날 유도한 게, 도와준 게 뭐가 나빠!? 그리고 그건 곧 피아니스트로서 성공하는 길이라는 거 아니야? 난 누구의 힘을 빌리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된 거라고 생각하는데?}

울먹이던 세연은 어느새 다시 힘을 되찾았다. 자신만의 방식과 논리를 찾아낸 눈빛이었다.

무슨 이유와 기대가 있든 간에 모두 납득하고 받아들일 것 같다. 세연은 이토록 강하고 찬란한 사람이었다.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세연은 교수님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교수님에겐 정말 죄송하지만…… 제 평생 스승님이 한 분일 순 없죠. 그렇지 않나요?」

「…….」

절대 반항하거나 따지는 어투가 아니었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 세연은 연주자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뿐이었다.

교수님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셨지만, 지금 부정하는 건 곧 세연을 옭아매는 일이라는 걸 느끼신 듯했다.

내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교수님 역시 세연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를 거둔 이유도, 가르치는 것들도 모두 일련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란 것을 이미 여실히 자각하고 계신 까닭이었다.

그래서 교수님은 더더욱 세연을 조심스럽게 대하면서도 그 이상으로 제자라는 위치에 못 박아 두지 못했다.

「그렇지. 해외 유학을 가는 것도 추천하마.」

「그러니까…….」

세연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이어서 말하려다가 순간 머뭇거렸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뒤늦게 깨달은 듯했다.

그녀의 당혹스러움이 손을 통해 전해졌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실언이 되리란 것을 직감한 것이다.

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천천히 생각하며 말했다.

{세연. 아까 아나스타샤가 연주했던 알캉의 곡 혹시 기억나시나요?}

{응?}

뜬금없는 말에 세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긴 하는데…… 갑자기 그건 왜?}

{부제가 뭐였죠?}

{그…… 이솝의 향연?}

이솝이 잔칫상에 혀로 된 요리들만 올려놓으면서 했던 궤변을 변주곡으로 만들어 놓은 곡. 그 곡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있었지만 난 과격하게 축약하여 말했다.

{그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건 간단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제일 좋은 것이 역설적으로 제일 나쁠 수도 있다.}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던 세연은 이윽고 내 말을 이해했는지 창백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우리가 지금 서로 나빠지고 있을 뿐이라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정말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 때문에 교수님과 세연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전부 내 잘못이라고 해 봐야 세연의 내 변호만 견고해질 뿐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조금 뻔뻔해질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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