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5화
슬쩍 고개를 들어 보니 교수님의 진지한 표정이 보인다. 난 객관화를 위해 교수님의 관점을 빌려 보기로 했다.
지금 이곳까지 오셔서 우리 대화를 지켜보시는 건 아마 어린 학생 두 명이 의기투합해서 제멋대로 험난한 길을 찾아가려는 걸 어떻게 말려야 할지 고민하시는 것이리라.
음악학교에선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친구들끼리 잘못된 습관이 옮기도 하고, 학생들 사이에서 헛바람이 유행처럼 돌기도 한다.
비슷한 학생들이 모여 있으면 서로 영향을 잘 받지만, 그 영향이 항상 좋은 방향이라는 법은 없다.
그러니 아마 교수님도 지금 상황이 그렇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으실 것이다.
세연이 음악적으로 심화되는 과정에서 내 태도와 성격을 느끼신 것 같지만, 그 이상으로 무언가 깨달으신 건 아니다.
그럼 내가 취해야 할 입장은 분명했다. 잘못된 길을 걷지 않도록 조언해 주시는 분의 말을 잘 듣고 따르면 되는 것이다.
‘그게 옳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아니까…….’
하지만 세연은 지금 상당히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 또한 이해가 간다.
내가 밝혀 주는 길을 따라서 막 성취를 이루어 나가는 순간에 그게 잘못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이해시키기 참 어려운 부분이지만, 그래도 난 세연을 설득해 보기로 했다. 그녀는 내 말을 잘 믿는다.
그러니 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듯 당당하게 굴 필요가 있었다.
턱을 당기고 눈빛이 흔들리지 않도록 힘을 주었다. 조금 더 뻔뻔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해 보려 했지만…… 어쩔 수 없죠. 왜냐하면 전 세연의 친구일 뿐이잖아요?}
{타티아나…….}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될 순 없죠. 되어서도 안 되고요.}
세연이 내게 가지고 있는 환상부터 부술 필요가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세연은 날 선배로 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으로 확인한 그 사실은 상당히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난 환희에 차 있었다.
그런 스스로가 정말 가증스러웠지만…… 내가 이 상황을 버텨 나갈 위안으로 혼자만 알고 있는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이제 그만두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세연에겐 교수님이 있고, 교수님은 한 번의 실패를 통해 커리큘럼을 바꾸었다. 거기에 있어 난 방해자일 뿐.
목 아래 깊은 곳 어디에선가 꿈틀거리는 감정이 느껴진다. 그러나 난 애써 그것을 무시하면서 가늘게 웃었다.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이런 일은 꽤 자주 있어요. 미숙한 동급생끼리 음악을 교류하다가 엇나가는 일. 그리고 그럴 때야말로 이렇게 객관적이고 따끔한 한마디가 필요하죠.}
{……교수님 말이니?}
{예, 세연.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교수님이 보고 계시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모범생이 할 만한 답변이다. 난 이런 말을 잘한다. 여기에 반론하는 건 결코 쉽지 않겠지.
말문이 막혔는지 세연은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지금 확답을 받아 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난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
{잘못은 바로잡아야죠. 그렇지 않나요? 세연.}
하지만 조급한 마음이 목소리에 섞여 나온 탓인지 세연은 다시 눈빛을 똑바로 하더니 신중하게 물었다.
{뭐가 잘못인데……?}
{……표현을 그리했을 뿐이에요. 사실 세연의 잘못이라고 할 건 없어요. 그저 열심히 노력하다가 길을 잘못 든 것뿐이니까.}
난 세연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
지금부터 음악적인 교류를 중단한다 하더라도 그녀와 절교하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되레 이전보다 훨씬 더 잘해 줄 생각이다.
그 점을 분명하게 되새기면서 난 이어 말했다.
{저 역시 마찬가지. 우린 음악적인 부분이 잘 맞는 편이니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을 뿐.}
난 지금 모든 잘잘못을 내게 돌리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고. 하지만 그랬다간 세연이 절대 가만있지 않고 반발하여 더더욱 교수님을 원망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난 그냥 모든 걸 우리들의 미숙한 한때의 놀이로 치부하기로 했다.
내가 세연을 보며 느낀 모든 감정과 내 욕심 그리고 후회…… 대속. 그 모든 걸.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걸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건 정말 어려웠다.
{그러니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고…… 교수님 말씀 들으세요, 세연.}
하지만 해냈다. 나도 성장하긴 한 것이다.
며칠 전 교수님과 독대하며 눈물을 보였던 건 내 속에 거의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다. 그 덕분인지 지금은 나름 냉정할 수 있었다.
충분히 알아듣게 잘 이야기했다고 생각한다. 난 여전히 세연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내가 정말 그녀를 위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건 전해졌겠지.
이제 세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일만 남았다.
그럼 난 다시 그녀를 달래 주고 교수님을 끌어들여 이 상황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
{거짓말하지 마, 타티아나.}
{……예?}
{넌 우리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잖아.}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버릴 정도로 세연의 목소리엔 분명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난 멍하니 다시 스스로를 짚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난 실패한 사람이었고, 세연에게 그 전철을 밟게 하고 있었다. 예리하게 알아차린 교수님이 아니었다면 심지어 그 문제를 깨닫지도 못할 뻔했다.
지금은 진심으로 내가 빠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 거기엔 한 점의 거짓도 없었다.
{저도 고집 부리고 싶어요, 세연. 하지만…….}
{저번에 카를 타우지히의 곡을 듣고는 직접 와서 칭찬해 줬잖아. 그때 분명…….}
{그 곡에 불려 왔을지도 모르겠다고 했었죠.}
{뭐……?}
난 당시 했던 말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세연을 칭찬하려고 했던 건 맞지만, 나와 비슷하게 해서 잘했다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전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신중하게 말을 골랐던 것이 지금 도움이 되고 있었다. 난 있는 그대로 차분하게 말했다.
{그게 전부예요. 비슷한 뉘앙스에 신기함을 느꼈을 뿐.}
{왜 또 거짓말을 해?}
{거짓말이라뇨?}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순간적으로 무언가 살짝 치밀어 오른다.
난 물끄러미 세연을 보다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세연은 더 매달리지 않고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거짓말이라면 당연히 많이 했다. 그녀에겐 미안함을 느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 주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냉정해져야 할 때였다.
{세연은 지금 아무것도 몰라요.}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이 관계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인지, 그걸 다시 되돌려야 한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게 얼마나 늦은 것인지 세연에게 알려 줄 순 없었다.
그러나 세연은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솔직히 난 너와 교수님이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단지 비슷한 공감대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야. 아마 아득한 레벨의 피아니스트들이라서 그런 거겠지?}
{전…… 그저 교수님이 옳다고 생각하는…….}
{거짓말하지 말라니까?}
세연은 그저 보고 있는 걸 그대로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는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교수님이 뭐라 하든, 지당함을 따지는 내 내면의 저울이 뭐라 하든 상관없이 세연은 내 본심이 어떤지 묻고 있었다.
하나 내 죄책감은 그녀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깊다.
물론 그녀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서 잘못을 되풀이하기도 했지만, 그 또한 내게 있어선 사실 속죄의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그렇다. 난 이미 본심이 무엇인지 잘 모를 정도로 죄책감과 이곳에 있는 이유 등에 얽매여 있었다.
그런 스스로를 새삼 자각하고 나니 슬며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게 날 지키기 위한 방어 기제라는 걸 깨달은 건 말을 뱉고 난 후였다.
{저도 고집이 센 편인데, 세연은 더 심하시네요. 저희끼리 했던 교류와 연습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을 뿐이잖아요. 지금 그렇게 화를 내실 일이 아니에요.}
다시 한번 딱딱하게 모범생 같은 말로 세연을 막고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는 일관적이었다.
{타티아나. 화는 나보다 네가 더 내고 있지 않아?}
{……}
{거짓말하지 않으면 안 돼?}
{자꾸 그러시면 정말 화가 날 것 같아요.}
슬쩍 경고하자 세연이 움찔했다. 난 그녀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잘 안다. 그녀는 내게 밉보여서 지금보다 더 사이가 멀어지길 바라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일부러 겁을 주었다. 나 자신이 싫어진다. 하지만 지금 무르게 대하면 결국 세연을 망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더 컸다.
{……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제가 보여 드릴게요.}
{……응?}
{교수님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신 부분을 말이에요.}
결국 말로 하는 건 한계가 있다. 이미 예상하긴 했었다. 세연 정도 되는 사람을 말로 설득하긴 어려울 거라는 걸.
그럼 보다 단호하게 행동으로 보여 줄 뿐이다. 난 이미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양.}
그때였다. 맞은편의 교수님이 날 불렀다.
천천히 돌아보니 복잡한 감정을 띤 표정으로 교수님이 나와 세연을 보고 계셨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상관없었다. 어떤 걱정을 하시는지 잘 알았고, 이제 그것도 내가 끝낼 테니까.
교수님은 내게 곧장 무언가 말씀하시려다가 생각을 바꾸셨는지 세연에게 전했다.
「……세연아, 잠깐 전해 주겠니. 난 네 걱정도 했지만 저 아이에 대해서도 걱정하고 있다고.」
상당히 고민하신 것 같은 말씀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난 나도 모르게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매몰차게 대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교수님의 말이 내게 날아와 꽂혔다.
가까스로 평정을 찾고 있는 사이, 세연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교수님.」
「설마 내가 단순히 너만 챙겨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세연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교수님이 다른 아이에게 신경을 쓰는데도 그녀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순수하게 그 걱정을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일 뿐이었다.
{타티아나…… 교수님은 네 걱정도 하고 계신대.}
다시 한번 다가오는 세연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다.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다. 그녀가 솔직하게 다가온 만큼 나도 솔직해지고 싶었다.
그런 나약한 마음들은 불꽃에 던져 넣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용서를 빌고 화해하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은 선배도 아니고, 선생님은 더욱이 아니며 그저 욕심 많은 망령이 했던 실수를 고치는 수순에 집중할 때였다.
난 모두 이해하지만 괜찮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전 이미 선생님이 두 분이나 계시거든요.}
{……아.}
세연은 말을 잃었다. 나 역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거의 마시지 않은 차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입에 댈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난 천천히 일어섰다.
{그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저도 제 무대를 준비해야 하니.}
세연도 교수님도 날 막지 못했다.
혹시 지금 내가 자리를 뜨면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질까 봐 살짝 걱정이 되긴 했지만 분위기를 보면 그럴 것 같진 않았다.
결국 세연도 내가 아니라 교수님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걸 이해할 것이다.
세 명분의 찻값을 모두 계산하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따사롭던 5월의 봄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난 카디건을 여미며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