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46화 (1,146/1,277)

##  1146화

마누엘은 이른 시간에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플라지 빌딩으로 향했다.

그의 차례는 7명 중 6번째이기 때문에 사실 조금 더 늦어도 된다.

하지만 마음이 급해지면 그것이 손가락에서 묻어 나온다고 믿는 그는 항상 연주 전엔 여유 있게 준비하는 편을 택했다.

이제 콩쿠르 사무실을 찾아가는 일 정도는 쉽다. 마누엘은 한 번도 헤매지 않고 바로 사무실로 가선 직원에게 말했다.

{이브닝 세션 참가자 마누엘 베르니케입니다.}

{아! 베르니케 씨.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은 친절하게 그를 사무실 한쪽으로 안내했다. 거기엔 이미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모여 있었다.

참가자 명단을 여러 번 봐서 이번 세션 참가자들의 얼굴은 모두 알고 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 사람들도 있었고, 이미 본 사람도 있었다.

마누엘은 타티아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움에 손을 들어 인사했다. 타티아나는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이었다.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차를 마시고 콩쿠르를 같이 봤어도 여전히 타티아나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어쩐지 무섭게 느껴지는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그 분위기만큼은 익숙해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인사를 무시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누엘은 적당히 그녀 근처의 자리에 앉았다.

모인 사람은 총 5명. 직원은 이 정도면 일단 시작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종이 몇 장을 들고 와선 설명했다.

{간단하게 스케줄을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모이신 분들은 여유 있게 준비하셔도 괜찮을 겁니다.}

이미 대충 다 아는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늦는 일이 없도록 직원은 확실하게 다시 시간표에 맞춘 일정을 알려 주었다.

일단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절대 늦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필요한 몇 장의 서류에 사인하고, 직원이 서류를 거두어 간 사이 마누엘은 살짝 타티아나의 눈치를 살폈다. 말을 걸려면 지금밖에 없다.

{좀 쉬었어? 베르체노바 양.}

{예.}

{그…… 음, 좋아 보이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마누엘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무슨 대답이 돌아오더라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 볼 생각이었는데, 타티아나의 짧은 대답은 그 후 모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는 듯한 냉담함을 담고 있었다.

약간 이상했다. 타티아나가 차가워 보이긴 해도 말을 해 보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정말로 엄두가 안 날 정도였다.

긴장을 한 탓일까. 아무래도 이렇게 큰 콩쿠르의 첫 무대이고, 나이도 어리니까 긴장을 안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마누엘은 단순한 긴장과는 약간 다른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뭔가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지금 당장 앞에 다가오고 있는 무대에 집중력을 쏟아붓고 있다기엔 타티아나의 시선은 약간 초점이 흐렸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서 마누엘은 어색하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그 옆에선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쯤 지나서 두 사람이 더 왔다. 마누엘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브닝 세션 참가자들 다 왔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건 저 사람인가? 앤서니 마셜.}

타티아나에게도 들렸겠지만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마누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반응은 그 옆쪽에서 나왔다.

{그거 알아? 여기 있는 피아니스트들은 모두 국적이 다르다는 거.}

잡담을 나누고 있던 피아니스트들 중 한 명이 마누엘 쪽을 바라보더니 히죽 웃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선한 미소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한국의 박경민. 마누엘은 이미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마누엘을 알아봤다.

{마누엘 베르니케. 독일 출신 맞지?}

{맞아. 그쪽은?}

{난 한국에서 왔어. 저쪽은 일본 그리고 미국, 영국, 크로아티아.}

순서대로 가리키며 빙 둘러 각각의 국적을 이야기하던 박경민은 타티아나에게 손짓하더니 말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까지. 완전 글로벌하네.}

{그러게.}

{이쪽 러시아 친구는 혹시 영어 할 수 있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타티아나가 신경 쓰이는지 그가 물었다. 딱 봐도 말 걸기 어려운 분위기가 풍기는데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타티아나는 물끄러미 박경민을 바라보더니 짧게 답했다.

{해요.}

{오, 그렇구나. 소통이 된다는 건 다행이네. 저기 일본 친구는 영어가 서툴러서 고생 중이거든.}

박경민은 껄껄 웃더니 대화의 틀을 넓혀서 이곳에 있는 7명의 피아니스트들을 한데 모으려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인사나 할까?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것도 어색하잖아. 나부터 할까? 한국에서 온 박경민이야. 북쪽 아니라 남쪽이고.}

농담을 섞어 가며 자기소개를 하는 박경민은 은근한 분위기 메이커였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 주는 데엔 그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꼭 필요하기도 하다.

친목회 같은 느낌으로 박경민이 자기소개의 스타트를 끊자 자연스레 순서대로 옆 사람들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시라이시 타츠야, 미국의 앤서니 마셜, 영국의 루시 스튜어트, 크로아티아의 데이버 바리시치 순이었다.

마누엘도 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마쳤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타티아나의 외모는 모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인데도 품위가 느껴진다.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모두의 기대감이 구름처럼 커져 나갔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모두의 시선엔 별 관심이 없는지 낮게 가라앉은 눈을 살짝 들고 말했다.

{……베르체노바입니다.}

{히야, 사실상 여기서 제일 슈퍼스타는 타티아나지? 음반 낸 것 기가 막히더라.}

박경민이 타티아나를 치켜세웠다. 긴장한 것인지 낯을 가리는 것인지 모를 그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받아 주는 사람이 생각이 있어야 되는 일이다.

타티아나는 감사하다고 짧게 말했을 뿐 그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박경민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다.

{또 음반 낸 사람 없어?}

이 어색함을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은 다시 왁자지껄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타티아나는 신경 쓰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누엘은 확실히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차가운 인상과는 다르게 타인을 배려하고 상냥하게 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처음 마누엘과 만났을 때도 그를 신경 써 주었었다.

하지만 지금 타티아나는 명백하게 다른 사람들과 얽히는 것을 거부했다.

자신의 생각만으로도 이미 머리가 복잡하다는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타티아나 정도 되는 피아니스트가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행동할 것까진 없을 텐데. 뭔가 이상했다.

마누엘은 마지막으로 봤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한국에서 온 친구와 그녀의 교수님과 함께하고 있었지.

혹시 무언가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 걸까.

‘물어보고 싶네…….’

온갖 생각이 다 들었지만 지금 그걸 속닥거리며 물었다간 타티아나가 어떻게 반응할지 뻔했다.

그걸 감수하더라도 이야기하고 싶긴 했지만 지금 타티아나에게서 느껴지는 섬뜩한 무언가가 마누엘을 저지했다.

그렇게 저녁 세션의 피아니스트들이 잠시 기다리는 사이, 나갔던 직원이 다시 돌아왔다.

{지금 인원이 몇 명입니까?}

숫자를 헤아려 모두 자리에 있음을 확인한 직원은 서류를 꺼내고 얼굴도 대조해 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모이셨군요. 뒤쪽 순번인 분들은 늦게 오시는 일도 있는데…… 다행입니다. 아무튼 그러면 의상실로 모시겠습니다. 혹시 볼일이 있다고 하시더라도 일단 의상실에 갔다가 하시길 바랍니다.}

정말 본격적으로 무대에 설 준비가 시작될 참이다.

박경민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러죠, 뭐.}

{따라오십시오.}

직원의 안내에 따라 7명의 피아니스트들은 그 뒤를 따랐다.

멀리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이 빌딩 안엔 연주자들을 위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여성분들은 이쪽으로.}

중간에 멈춰 선 직원이 여성 의상실이라고 적힌 방 쪽으로 루시와 타티아나를 들여보냈다. 그리고 조금 더 가니 남성 의상실도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대기하고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이 남자들을 맞이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미리 가져다 놓은 예복들도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마누엘이 가져온 것은 깔끔한 테일코트였다. 그는 의상을 확인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 옆자리에 앉은 건 박경민이었는데, 그는 마누엘을 보자마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뭔가 어렵지 않아? 그 애.}

{……뭐?}

무슨 말인가 싶어 되묻자 박경민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타티아나 말이야.}

마누엘은 그가 억울할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친해지고 싶어서 말을 걸었는데 무안할 정도로 타티아나가 너무 차갑게 굴었으니까.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렵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마누엘은 그녀를 감쌌다.

{그렇게 어려운 사람은 아니야.}

{그 애랑 친해?}

{오늘 오후에 처음 만났지. 지금은 집중하고 있나 봐.}

{누군 집중 안 하나…….}

박경민은 투덜거리듯 중얼거렸지만 그래도 마누엘의 말을 무시하진 않았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서 타티아나에 대해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내 친구들한테 들었을 땐 착한 애라고 하길래 조금 궁금했었는데…… 대체 뭘 보고 그런 말을 한 건지 모르겠네.}

일단 첫인상이 너무 냉랭했다. 옆에서 보는 마누엘도 너무하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박경민이 이런 평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마누엘은 그녀를 변호하고 싶었다.

{그 친구들이 맞을걸?}

{더 친해져 보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내가 보기엔…….}

하지만 이어지는 박경민의 말에 마누엘은 전혀 반박할 수 없었다.

{좀 무섭던데.}

{뭐?}

{나만 그렇게 느끼나……? 하긴 저 어린애를 두고 무섭다는 게 웃기긴 한데.}

거울을 보며 뺨을 만지작거리던 박경민은 적당한 단어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각오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마누엘은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타티아나는 그 나이 또래의 사람에게선 절대 느낄 수 없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로서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 마누엘도 그녀를 보자마자 무섭다고 생각했다.

박경민 역시 비슷한 걸 느꼈다면 그건 두 사람이 잘못 본 것이 아니다. 타티아나가 정말로 그런 사람인 것이다.

오후에 봤던 그녀의 모습을 일반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마누엘은 간신히 박경민이 했던 말을 빌려서 반박했다.

{누군 각오 안 하나.}

{그건 그래. 하하하하.}

박경민은 자리에 없는 사람을 놓고 쓸데없는 소릴 했다며 크게 웃었다. 마누엘은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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