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7화
타티아나가 냉정하게 자리를 뜬 뒤, 세연과 박 교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식어 가는 찻잔을 바라보며 세연은 우울해했다.
상황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하나하나 짚어 보면 결국 그 원인은 세연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세연은 자신이 타티아나를 따라 카를 타우지히의 곡을 어설프게 연주했기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박 교수가 개입하게 되었다고도. 박 교수는 결국 세연이 없는 자리에서 타티아나와 만나서 조언했으며, 타티아나는 그걸 받아들였다.
열일곱 살 두 명이 교류하며 실력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어른의 조언은 분명 도움이 될 테니 필요했겠지만, 지금은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내가 너무 조급했어…….’
세연은 후회하며 눈을 감았다.
지금도 어둠 속에서 보이는 길이 있다. 멀찌감치에서 보고 있는 세연은 그 길이 정상으로 가는 바른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안내자인 타티아나는 그 길에서 한참 앞서 나간 거의 정상에 가까운 피아니스트였다. 그래서 두 사람만 있을 땐 즐거웠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공간에서 시간만 조금 더 있으면 세연도 타티아나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려고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상까지 코앞인 것 같아 보였던 타티아나도 몇 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완전한 확신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걸 왜 몰랐을까.
교수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타티아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뒤편의 세연을 향해 돌아보고는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손을 저었다.
차가운 언행으로 자신을 감추지만 그녀가 지금 끔찍한 기분일 것이라는 건 분명했다.
‘어쩌지…….’
세연은 타티아나에게 사과를 하고자 했다. 모든 원인은 다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지금 보이지 않는 그 위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금방 거기까지 갈 테니 같이 가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타티아나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말해야만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부담이 덜 될 테니까. 타티아나가 혼자 모든 것을 감내하고 연주를 끝낸 뒤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
때문에 세연은 빠르게 움직였다. 박 교수에게 정면으로 항의했고, 타티아나에게 사과하겠다는 확답을 받아 냈다.
그리고 조금 일찍 홀에 도착하여 타티아나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그 과정은 정말 빨랐다. 하지만 결과는 이 모양이다.
「미안하구나.」
「…….」
교수가 조용히 사과했다. 세연은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찻잔을 들었다. 미지근한 찻물이 목을 축인다.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 세연이 사과받을 상황은 아니었다.
박 교수는 세연이 없는 자리에서 타티아나를 우연히 만나선 그녀의 음악이 세연에게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그 방식이 조금 난폭했었다는 걸 박 교수도 인정하고 있으니 타티아나에게 사과해야 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이야기를 듣고 모든 걸 수긍한 뒤 떠나 버렸다. 세연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딱 하나만 알겠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세연은 타티아나의 바람을 하나 읽어 냈다. 그건 바로 앞으로도 자신이 교수님과 잘 지내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타티아나의 입장은 일관적이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사제 관계에 균열이 생겨선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자신은 그저 머나먼 부외자로 남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타티아나는 성실하게 옳은 일을 우선 추구하려고 한다.
세연은 종종 섭섭함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녀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저야말로요…….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해요.」
「아니, 나도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괜찮단다.」
「교수님을 믿고 맡겼어야 했어요.」
타티아나에게 사과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옆에서 더 재촉하지 말고 그냥 지켜봤어야만 했다.
타티아나와 교수님 두 사람만 있는 것이 불안하다면 중계인으로서 위치를 지켰어야 했는데…… 가만 있지 못했다.
「제가 망친 것 같아요.」
「타티아나를 몰아세웠던 것 말이니?」
「예…….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타티아나에게 했던 말들을 돌이켜 본 세연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답답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분명 타티아나와 함께 추구했던 음악들은 찬란했고, 우리는 그것이 옳다고 적어도 한 번쯤은 주장할 수 있었다.
세연은 타티아나가 당장 그녀의 손을 잡고 연습실로 가서 피아노로 박 교수에게 증명해 보자고 말해 주길 바랐다.
적어도 그렇게 한번 행동해 보고 나서 그다음을 도모하는 것이 타티아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에서 꺾여 버렸는지 타티아나는 힘없이 세연의 손을 놓아 버렸다.
그저 틀렸었다고, 비슷함을 느꼈을 뿐이라고 말했다. 화를 낼 일도 아니고 우리가 미숙했을 뿐이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세연을 달래고자 꼭 잡은 손이 아이러니하게도 타티아나가 마음속으론 손을 놓았음을 증명했다.
그 지당한 말들이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세연은 단번에 꿰뚫어 봤다. 절대 본심일 수 없는 말들이었다.
타티아나는 얼굴 표정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그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격렬한 감정들까지 숨길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서 세연은 그녀가 한 번만이라도 진심을 보여 주길 바랐다.
박 교수가 아니라 신이 와서 무어라 하더라도 당당하게 한 마디쯤은 하길 바랐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포기하는 것도 단호했다.
「내게도 그 아이가 무리해서 자신의 입장을 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단다.」
박 교수는 팔짱을 끼고 조용히 말했다.
「그 나이에 그 정도 경지에 오르려면 필경 확신에서 비롯된 고집과 엄청난 집요함을 가지고 있어야 할 텐데…… 어째서 내 말에 바로 수긍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구나.」
그간 타티아나에게 흥미를 가지고 봐 왔던 박 교수의 분석은 꽤 정확했다. 세연은 거기에 완전히 동의했지만 동시에 조금 화가 났다.
「그걸 바라신 것 아니었나요?」
「너희가 조심하길 바라긴 했지. 하지만 이런 상황을 바란 건 아니었단다.」
이어진 박 교수의 말에 세연은 자기도 모르게 놓을 뻔했던 이성을 다시 붙잡았다.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짚어 주고 위험한 건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것이 바로 박 교수의 일이었다.
그저 이번엔 여러 상황이 안 좋게 꼬여 버렸을 뿐이다. 세연은 그것까지 박 교수의 탓을 하고 싶진 않았다.
박 교수는 책상에 팔을 괴며 말했다.
「후회되는구나. 내가 조금 더 신중했었어야 했는데…… 이상하게 조급해져서…….」
자신이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리는 박 교수를 보며 세연은 자기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어쩐지 그 심정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박 교수와 비슷한 자세로 책상에 기댄 세연은 천천히 말했다.
「타티아나는 신기하죠. 저도 그 애를 처음 봤을 때 어떻게든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이었어요.」
「그랬구나.」
「같은 나이여서도, 부자여서도, 피아노를 잘 쳐서도 아니라…….」
세연은 다시 몇 년 전을 떠올렸다. 악보를 보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던 그녀를 보고 마음이 흔들렸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했다.
그때 분명히 세연은 타티아나와 무언가 이어졌다고 생각했다.
「제가 교수님과 만나 피아니스트가 되었듯, 그 애와 친해져야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닮은 면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먼 나라의 피아니스트와 유일하게 비슷한 것은 음악뿐이었다.
세연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매달렸다.
「실제로도 그랬고요.」
「세연아.」
「교수님이 무슨 말씀 하시는지도 알아요. 타티아나는 정말 착하지만 평범하지 않으니까……. 그 애는 마치 자신이 행복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죠.」
세연은 안쓰러운 마음을 삼키며 말했다.
타티아나의 실력은 정말 뛰어나다. 하지만 세연은 그녀가 행복해하며 연주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녀는 항상 어떠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깊은 우울함을 근간으로 했다.
지독할 정도로 고독과 고행을 자처하는 타티아나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기엔 어려웠다.
그런 정신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티아나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세연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고, 때문에 세연을 가르치는 박 교수의 스타일도 평범하고 여유로운 편이었다.
뛰어난 가르침으로 몇 년 만에 세연의 실력을 크게 향상시켰지만, 기본적으로 교수는 세연에게 더 많은 것을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고 그녀가 행복한 피아니스트로서 오래 활동하길 바랐다.
그 절절한 진심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세연이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연은 선택해야만 했다.
강철 같은 정신력을 지닌 타티아나를 완벽하게 따라 할 순 없어도 비슷하게나마 노력해 볼 것인지, 아니면 박 교수를 따라 차근차근 강해질 것인지.
세연도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으나 결국은 무언가에 홀린 듯 타티아나에게 관심이 갔다.
열심히 타티아나를 쫓아갔을 때, 가끔 그녀가 뒤돌아보면서 행복해한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피아니스트로서 같이 즐겁게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박 교수는 이쯤에서 그만두길 종용했다.
세연은 왜 타티아나가 다시 냉랭해졌는지 슬슬 알 것 같았다.
세연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고 한 건 곧 그런 식으로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말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타티아나는 잠시 잊고 있던 자신의 고독을 깨달아 버린 것이다.
‘아…….’
안타까워서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 어설프게 움직였다간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이 앞섰다.
무력감이 들자 그건 곧 박 교수에 대한 원망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하지만 세연은 타티아나가 마지막으로 바랐던 바람마저 저버릴 순 없었다.
적어도 교수님과 틀어지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그래서 세연은 차분해지려고 애쓰며 말했다.
「타티아나가 걱정이에요.」
「조금 편하게 무대에 오르게 해 주고 싶었는데 말이다.」
박 교수 역시 세연과 같은 생각으로 이 자리에 왔으나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을 무척 유감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의 눈빛에선 약간의 믿음이 느껴졌다.
「그 아이가 보여 주겠다는 게 있었지. 그걸 확실하게 보고 답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인 것 같구나.」
피아니스트인 타티아나에 대한 신뢰는 철옹성과도 같았다.
세연 역시 타티아나가 어떻게든 해내리란 걸 안다.
심지어 에르네스트가 다쳤을 때도 타티아나는 무대에 섰고, 훌륭하게 연주를 해내서 훈장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집에 틀어박혀서 꼼짝도 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는 걸 사람들은 잘 모른다.
‘지금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세연은 조금 멀리하기로 마음먹었을 타티아나가 연주를 못 할 정도로 무너지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거 같아 걱정되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박 교수는 이만 아는 사람과 만나 봐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지금 같이 있어 봐야 할 일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홀로 남은 세연은 조용히 고민했다.
타티아나는 교수님이 말했던 위험이 뭔지 보여 주겠다고 했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자신이 결정할 일이었다.
「하…….」
마음 같아선 무작정 전화해서 잘하라고 응원해 주고 싶었다.
자신과의 일 같은 건 나중에 말해도 되니까 무조건 이번 무대에만 집중하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전화하는 것 자체가 타티아나의 신경을 거슬리게 할 수도 있었다. 세연은 더 이상 그녀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만에 하나 타티아나의 연주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세연은 이번 콩쿠르에서 기권할 생각까지 있었다.
물론 그랬다간 타티아나가 정말 불같이 화를 내겠지만…… 그런 방법 말고는 세연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니?}
{아나스타샤……!}
연주를 마치고 무언가 하러 갔었던 아나스타샤가 볼일이 다 끝났는지 전화를 해 왔다.
세연은 그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조차 몰랐지만 일단 만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