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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48화 (1,148/1,277)

##  1148화

드레스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아나스타샤는 세연이 있는 카페로 찾아왔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몇몇 사람이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외모는 연주용 드레스를 입고 있을 때도 빛났지만, 캐주얼한 차림에서도 결코 그 빛이 바래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고 온 아나스타샤는 세연 앞에 앉더니 피곤하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네? 식사는 했니?}

{아직…….}

{그럼 뭐라도 좀 먹을까? 배고프네.}

{저녁으로?}

{아니, 저녁은 이따가. 11시까진 있을 예정이니 좀 나중에 먹으려고.}

{그렇구나.}

저녁 세션은 8시부터지만 타티아나의 순번은 7번째라 한참 걸린다. 무턱대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집에 가서 조금 쉬었다가 나와도 될 시간이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고, 세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서 편하게 쉴 생각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다.

{…….}

아까는 아나스타샤와 만나면 뭔가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하니 조금 무서웠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의 제일 친한 친구다. 만약 이번 일을 전해 듣는다면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아직 아나스타샤가 진심으로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세연은 그런 상황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무섭고 긴장되어서 시선을 피하자 그런 세연의 분위기를 느낀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무슨 일 있니? 세연 임.}

{…….}

지금이라도 시치미를 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1라운드 결과가 나올 테니 대충 이야기할 만한 다른 주제라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지금 무섭다는 이유로 아나스타샤에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엄청나게 잘못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더 강하게 들었다.

{일은 있는데…… 너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수선하게 입을 열자 아나스타샤의 표정도 살짝 바뀌었다. 겁을 주려고 하는 표정은 아니다.

단지 조금 더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것 같은 분위기였다.

눈치 빠른 그녀가 물었다.

{타티아나와 관련된 일이니?}

{응.}

{네가 잘못한 거고?}

{……응.}

{내가 도와줄 수 있을까?}

세연은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같은 나이인데도 아나스타샤는 어른스럽고 유능한 면모가 있었다.

이 엉망이 된 상황에 그녀가 끼어들어서 적절하게 잘 풀리도록 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타티아나가 차갑게 떠나 버렸던 걸 생각하면 아나스타샤라도 별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만약 아나스타샤가 편을 든다면 타티아나의 편을 들지, 절대로 세연의 편을 들 일은 없었다.

{모르겠어……. 이건 그 애와 나 사이의 일이라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세연은 아차 싶은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마주한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세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연이 무어라 변명할 틈도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바로 사태의 핵심을 찌르고 들어왔다.

{네 교수님이 타티아나에게 음악으로 간섭하지 말라고 했니?}

{……! 그걸 어떻게…….}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고.}

당황한 세연은 반쯤 넋이 나가선 우왕좌왕했다.

지금 옆에 교수님도 없고, 다른 그 어떤 단서도 알려 준 적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한 건지 이해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아까 교수님과 같이 봤던 게 문제였나?’

겉으론 아나스타샤의 연주에 찬사를 보내기 위해 같이 왔다고 했었지만, 그게 아니란 걸 바로 알아봤다면…… 세연으로선 지금 아나스타샤가 화를 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웃기만 했다.

예상했던 것이 그대로 맞았다고 생각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조금 더 옛날 일을 떠올리는 듯했다.

당혹감에 얼어 버린 세연이 바라보자 아나스타샤가 설명해 주었다.

{역시 선생님들은 타티아나가 하는 걸 그냥 보고 있질 못하겠나 봐.}

{그게 무슨 말이야?}

{그 애가 우리 학교에 처음 편입 왔을 때가 생각나네. 오자마자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선생님한테 찍혔었거든.}

아나스타샤가 들려주는 타티아나의 예전 이야기는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어렸을 때부터 차분하고 천재적이었다든가, 그런 걸 생각했던 세연은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찍히다니? 타티아나가?}

{그렇다니까?}

{말도 안 돼.}

{그 애가 아니라 내가 찍혔더라면 믿을 수 있었을 것 같지?}

{그건 그렇…… 아니, 아니야!}

{아하하핫.}

겉모습만 보면 아나스타샤야말로 선생님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을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

타티아나는 모로 봐도 모범생 이미지가 강하니까. 하지만 종종 보이는 그녀의 일면과 오늘의 태도를 본 세연은 그런 고정 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궁금해진 것들이 너무 많았다. 세연은 지금 물어봐도 되나 고민했지만,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그런데…… 왜? 타티아나는 성적도 좋잖아.}

{성적 문제가 아니지. 기본적인 음악가로서의 문제였으니까. 그 애를 찍은 건 구세프라는 선생님이었는데, 타티아나랑 거의 몇 달을 서로 자존심 걸고 싸우다시피 했었어.}

자존심을 걸고 선생과 학생이 싸우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살벌했다.

세연이 말을 잊은 사이, 아나스타샤는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는 듯 쿡쿡 웃더니 작게 속삭였다.

{솔직히 그때 당시 내 기분이 어땠는지 말해 줄까?}

{너도 선생님한테 따지러 갔을 것 같은데?}

나처럼.

세연은 자신이 박 교수에게 따졌던 것처럼 아나스타샤도 분명 그랬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타티아나와 친한 친구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하고 싶어질 테니까.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선생님이 타티아나를 한 번쯤 꺾어 주길 바랐어.}

{뭐!?}

아나스타샤는 옆머리를 짚으며 이어 말했다.

{그때 그 애는 정말 위험했었거든. 그대로 음악을 하다가는 뭔가 이상해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지.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알긴 했는데…….}

위험이라는 단어에서 세연은 기시감을 느꼈다.

몇몇 사람은 타티아나를 보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고독과 강인함에 대해 아는 세연도 어렴풋이 그 평가에 대해 동의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세연의 반응을 살피는지 가만히 보더니 살포시 웃었다.

{난 그 애가 평범해지길 바랐던 것 같아.}

{그야…… 당연한 거잖아.}

{하지만 원래 특별한 애가 어떻게 평범해지겠니?}

마치 불변의 자연법칙을 이야기하듯 아나스타샤는 딱 잘라 말했다. 그 누가 타티아나를 평범하게 뜯어고치려고 해도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는 투였다.

{당시 그렇게 불안정하던 타티아나도 결국 자기가 옳았다는 걸 증명해 냈고, 지금은 구세프 선생님도 그 애의 두 번째 선생님이나 다름없게 되었어.}

세연보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타티아나를 봐 온 아나스타샤에겐 보다 공고한 믿음이 있었다.

그건 박 교수의 믿음과 결이랑은 약간 다르지만 강도에 있어선 훨씬 더 강한 믿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괜찮을 거야. 난 그렇게 믿어.}

{……무슨 일이었는지 말해 줄게, 아나스타샤.}

잠시 이야기해 본 것으로 세연은 이제 말해도 된다는 걸 느꼈다.

물론 자세한 걸 모두 다 이야기해 봤자 이해시키기 어렵겠지만 간략하게 있었던 사실들을 말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타티아나의 음악은 세연이 추구하던 이상적인 결과물과 무척 닮아 있었고, 그래서 열심히 따라 해 보려고 노력했다는 것과 어느 정도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중간에 그 사실을 알아챈 박 교수가 그런 방식은 그만두길 종용했다는 것까지.

세연은 되도록 초점을 자신과 박 교수 쪽에 맞추면서 모든 잘못이 이쪽에 있는 것으로 설명했다.

조용히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주억이며 중얼거렸다.

{역시 그랬었구나.}

{알고 있었어?}

{어렴풋이. 엄청 오래전부터.}

{오래전부터라니. 언제부터?}

{몇 년 되었지? 너희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으니까.}

{어?}

박 교수가 직접적으로 개입한 건 최근 세연이 카를 타우지히의 곡을 연주한 후였다.

처음부터라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땐 세연의 마음도 그저 막연했으니까.

당황한 세연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웃었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건 세연의 입장이 아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쇼팽의 마주르카 쳤었지?}

{그랬었나……?}

{그거 듣고 타티아나가 울었던 거 아니?}

{뭐라고?}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에 세연은 펄쩍 뛸 뻔했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 몰래 하는 비밀 이야기이니 혼자만 알고 있으라는 듯 말했다.

{아마 창피해서 네겐 이야기 안 했겠지만, 이젠 말해도 될 것 같으니까 말해 줄게.}

{말도 안 돼…….}

{오늘 그 말 많이 하네.}

{진짜 말도 안 되잖아!}

열다섯 살이었던 당시 타티아나는 이미 월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세연은 교수에게 레슨을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터라 5위밖에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마주르카에 타티아나가 울었다는 건 정말 놀랄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기억나는 일도 많았다. 그중엔 아나스타샤도 모를 일도 있을 터.

원래 공평하려면 그때 대기실에서 있었던 일도 말해 줘야겠지만, 세연은 타티아나가 없는 여기서 그렇게 모든 걸 서로 다 말해 버리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세연은 타티아나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정확하게 모른다.

나중에 다시 물어 보고 나서 제대로 알게 된 다음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나스타샤가 어디까지 알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진 세연이 물었다.

{왜, 왜 울었던 건데?}

{글쎄? 네 음악에 감동해서? 아니면…… 비슷한 음악을 구사하는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해서?}

아나스타샤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종종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처럼 보이곤 했으니까. 아무리 가까운 친구인 아나스타샤라도 미처 묻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시원하게 말했다.

{타티아나는 진심으로 널 중요하게 생각해. 부럽네.}

세연은 그 말이 기쁘면서도 그 말을 하는 것이 아나스타샤라는 점에서 약간 의아했다. 어떻게 봐도 타티아나와 가장 친한 건 그녀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아나스타샤는 진심으로 세연을 부러워하고 있었고, 세연은 그것이 마냥 기쁘기보다는 약간 죄스럽기까지 했다.

제대로 이해하긴 어렵지만 뭔가 반칙이라도 저지른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아나스타샤가 그런 말을 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세연은 급히 덧붙이듯 말했다.

{그렇지만 이젠 그만둔다고…….}

{그 고집 센 애가 물러난 이유가 있겠지. 아마 자기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오늘은 평소와 다를지도 몰라.}

아나스타샤의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무대를 단 몇 시간 앞두고 최대한 연주에만 집중해야 할 타티아나가 지금 세연과 박 교수에게 휘말려선 기분이 썩 좋은 상태가 아닐 것이란 말을 들었으니 친구로서 걱정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타티아나가 여태까지 어떻게 해 왔는지 잘 안다는 투였다.

되레 아나스타샤는 불안해하는 세연을 다독이며 웃었다.

{그래도 믿고 지켜봐 줘. 사과는 나중에 해도 될 테니까.}

그 말에 약간 위로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세연은 지금 그런 기분을 느껴도 되는지 의문이었지만, 박 교수도 비슷한 말을 했었단 걸 떠올리면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

드레스를 확인하고 메이크업을 받는 도중에도 스마트폰으로 계속 연락이 왔다.

이런 상황을 자주 겪는지 중간에 메시지를 하거나 전화를 받아도 직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학교 친구들이나 아는 음악가들에게서 온 메시지가 정말 많았다.

그리고 그중엔 바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을 친구에게서 온 것도 있었다.

[나 지금 세연 임이랑 같이 있어. 같이 저녁 먹고 지켜볼 테니까 이따 결과는 같이 확인하자.]

아나스타샤에게서 온 메시지를 가만히 바라보며 난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고민했다.

세연과 교수님을 뒤로하고 나왔지만, 그 후에도 내 뇌리엔 계속 세연에 대한 걱정이 잔류해 있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와 같이 있다면…… 조금 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상황을 이야기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현명한 아나스타샤라면 세연의 탓을 하거나 오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온 메시지만 봐도 아마 괜찮은 것 같다.

걱정보다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한숨을 쉬며 일단 스마트폰을 덮자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응원 많이 오네?}

영국의 연주자 루시 스튜어트였다. 그녀는 내게 흥미가 있다는 듯 눈을 빛내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나도 여유가 별로 없어서 적당히 답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죠.}

{내 친구들은 뭐 하는지 연락도 없네.}

{후후, 아직 시간이 남아서 그런 것 아닐까요.}

난 8시 전에 연락을 다 마치고 스마트폰을 끌 생각이었다. 그 전에 가족들과 선생님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화 정도만 하면 되겠지.

순간 세연에게도 전화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그런 약한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지금 그녀에게 보여 주어야 할 건 내 음악뿐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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