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49화 (1,149/1,277)

##  1149화

다양한 소품이나 무대 장치들이 존재하는 연극이나 뮤지컬, 팝 스타들의 무대와 비교하면 클래식 기악 연주자들의 무대는 텅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무로 된 무대 위에 덩그러니 악기와 연주자만 존재하니까.

모든 시선은 악기와 연주자에게만 집중되는데, 악기 역시 전부 비슷하게 생겼다. 주목받는 건 연주자뿐이다.

때문에 연주자의 개성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꾸미는 건 무대 전체의 강렬함을 좌우하는 마지막 요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너무 과하면 청중들의 눈을 현혹하여 음악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비교 대상이 많은 콩쿠르에선 포멀과 패셔너블의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차별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이런 부분에서 바로 의상과 메이크업의 중요성이 두드러지는데, 플라지 의상실의 직원들은 모두 브뤼셀에서도 알아주는 프로들이었다.

{생동감이 넘치는 곡들을 연주하실 예정이니 그에 맞춰 봤습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정말 최고예요.}

루시 스튜어트는 감동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갑자기 어떤 곡들을 연주할 것이냐고 묻길래 긴장을 풀어 주려는 스몰토크인가 싶어 대답했더니 그 제목들을 듣자마자 담당 직원은 해당 곡이 어떤 곡인지 이해하고는 그 전체적인 테마를 녹여 낼 수 있는 적절한 메이크업을 추천하고는 정확하게 해 주었다.

여러 공연장을 다녀 봤지만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루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지금 이 상태로 무대에 오르면 정말 평소보다 120%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차오르는 자신감을 느끼며 일어난 루시는 다시 거울 앞에서 빙그르 돌면서 혹시 놓친 점이 있는지 직원과 함께 마지막으로 체크했고, 완벽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고개를 휙 돌렸다.

이 방 안의 연주자는 루시만이 아니었다. 곧 같은 세션으로 무대에 오를 연주자가 또 있었다.

‘저 애는 벌써 다 했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러시아에서 온 열일곱 살의 피아니스트는 한마디로 잘라 말해 고급스럽게 생겼다.

차분한 머리카락과 반듯한 이목구비를 돋보이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라벤더색의 드레스도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사실 어떤 색이든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그녀의 태도였다.

‘다시 봐도 인형 같네…….’

타티아나는 의상실 구석에 있는 한 의자에 앉아 전화를 받고 있었다.

다리를 꼬거나 팔걸이에 기대지도 않고 똑바로 앉아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마치 누군가 그녀를 그곳에 묶어 놓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환영 파티장에서 처음 봤을 땐 이렇게까지 딱딱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사무실에서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모였을 때 타티아나를 다시 본 루시는 그녀가 어딘가 아픈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말없이 조용하게 앉아 있는 그녀는 스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하며 말을 걸어 보려던 루시는 타티아나와 눈을 마주친 순간 그런 걱정이 모두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이 자리의 누구보다 강인해 보였다. 만약 팔씨름을 한다면 타티아나는 루시를 이기는 것도 버거워 할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를 무기로 맞붙는다면 거구의 남성인 앤서니 마셜도 쩔쩔매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기묘한 괴리감이 타티아나를 더더욱 신비롭게 보이게 만들었다.

‘살짝 이야기해 볼까.’

타티아나에 대한 여러 소문이나 정보를 들은 적 있는 루시는 애초에 그녀에게 흥미가 많았다.

뛰어난 실력자인데 부자인 데다가 이렇게 미인이기까지 하니 흥미가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아까 메이크업을 받으면서 말을 걸어 보니 짤막하긴 해도 잘 대답해 주기도 했고, 그러니 나가기 전에 오늘 무대를 어떻게 해 나갈 것인지 이야기해 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루시는 타티아나가 눈치챌 수 있도록 인기척을 내며 다가갔다. 통화 중인 타티아나는 눈을 슬쩍 들어 루시와 시선을 마주했다.

“□□□ □□□□□. □□ □□□.”

전화 너머로 전하는 목소리는 무척 차분하고 따뜻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타티아나를 응원하기 위해 전화한 사람이고, 타티아나는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와 달리 타티아나의 표정과 시선은 서늘했다.

숙련된 피아니스트가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감미로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처럼 단지 타티아나는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목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섬뜩함을 느낀 루시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타티아나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루시는 무언가에 속박된 것처럼 조심스레 근처의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전화를 마친 타티아나가 루시를 돌아보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별로 그런 건 아닌데…….}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어쩐지 더 깊게 파고들면 그녀로부터 도망치지 못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루시는 지금이라도 식상한 인사말이나 몇 가지 던지고 빠져나갈까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호기심이 가장 앞서고 말았다.

{방금 통화한 건 누구야?}

{저희 선생님들이에요.}

{선생님들?}

{예.}

타티아나는 짧게 대답했다. 루시는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는 걸 느꼈지만 이번에도 참지 못했다.

{하나 물어봐도 돼?}

{무엇인가요?}

{선생님들하고 사이가 안 좋아……?}

이 중요한 순간에 그렇게 연기를 하듯 전화를 할 이유로 루시가 떠올릴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물론 이유를 듣는다고 하더라도 루시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다. 순전한 흥미 본위로 물어본 질문이었다.

실례라는 걸 느낀 루시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지만, 타티아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루시를 바라보더니 이내 작게 미소 지었다.

{목소리 관리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표정 관리가 안 되었나 보네요. 여유가 없다 보니 그랬을 뿐…… 선생님들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에요.}

{그…… 괜찮아? 긴장을 많이 한 것 같은데.}

{긴장이라…… 그렇긴 하죠.}

타티아나는 양손을 깍지로 쥐며 말했다.

{이제부터 할 연주를 생각하면요.}

당연하다는 듯 말하며 타티아나는 어깨를 살짝 웅크렸다. 그런데 루시는 타티아나의 행동에서 상당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는 정말로 긴장해서 움츠린 것이 아니라 마치 기회를 앞둔 맹수처럼 언제든지 튀어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발톱의 날카로움을 직감한 루시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더 거리를 벌렸다.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을 확인한 타티아나는 중얼거리며 말했다.

{스마트폰은 이만 꺼 놔야겠네요. 선생님들과 통화도 했고…… 아까 아버지와 통화도 했으니.}

그 말은 루시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타티아나가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다.

{이젠 제 일만 신경 쓰면 되겠네요.}

피아니스트들이 무대 위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다. 때문에 무대가 가까워질수록 스스로에게 점점 더 집중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많다.

루시는 여러 대가에게서 그런 모습을 종종 본 적 있었다.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인 자신을 버리고 완전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그 순간은 마치 무른 진흙이 아름다운 도자기가 되는 과정과 닮아 있었다.

고개를 살짝 든 것만으로도 이미 인간이 아닌 무언가처럼 보인다. 그 초월의 순간은 사람들을 속이고 홀리며 환상 속에 빠지게 한다.

음악이라는 강력한 힘을 다루는 피아니스트들이 비로소 기적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애는 아직 열일곱 살이지 않았어?’

수십 년 된 괴물 같은 음악가들에게서나 느낄 수 있었던 분위기를 이 어린 피아니스트에게서 느낀다는 것에 루시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루시는 청중의 입장이 아니다. 경쟁자의 입장에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상대가 만만치 않다고 해서 기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루시는 의자에서 일어나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타티아나 역시 빤히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나가실 건가요?}

{그래야지?}

{나가죠.}

결정을 내린 타티아나는 스륵 일어나선 의상실 직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보내고는 밖으로 나섰다.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루시는 구경하듯 보고 있다가 얼른 그녀를 따라나섰다.

의상실 밖엔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연주자와 콩쿠르 직원 등이었다.

{와우, 루시. 얼굴로 점수 딸 생각이야?}

{고마워. 너도 멋져, 앤서니.}

조금 친해진 남자 연주자들과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자연스레 타티아나에게도 관심이 향했다.

먼저 그녀와 조금 친분이 있어 보이는 마누엘 베르니케가 화두를 던졌다. 타티아나도 작은 목소리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루시는 아마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타티아나는 훨씬 더 상냥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타티아나는 이미 피아니스트로서 집중력을 한껏 끌어 올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말도 못 붙일 정도로 신경질적이진 않았다.

적당히 이야기하면 적당히 받아 준다. 마누엘도 그 정도에서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던 데이버 바리시치는 그런 타티아나를 조금 더 건드렸다.

{오늘 마지막 순서죠? 베르체노바 양.}

{……그렇게 되었네요.}

{뭘 보여 주실지 무척 기대되네요. 당신에 대해 알아본 바로는 아마…… 라흐마니노프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넉살 좋게 친해지려는 의도로 받아들인다면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많은 피아니스트가 있는데 타티아나만 콕 집어서 묘하게 떠보는 듯한 말투는 꽤 날카롭게 들렸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그저 약간 귀찮다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데이버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리시치 씨가 알아봐야 할 건 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라흐마니노프에 대해 더 알아보는 건 어떤가요?}

{뭐…… 그건 당연한 일이죠. 전 라흐마니노프에도 자신이 있어서.}

{그래요?}

자신 있다는 말엔 타티아나의 반응이 조금 바뀌었다. 데이버는 이참에 잘되었다는 듯 이어 말했다.

{아무튼 오늘 24명이 결정되겠지만…… 혹시 괜찮다면 우리 개인적으로 내기라도 해 보지 않겠습니까?}

{무슨 내기 말인가요?}

{피아니스트가 할 내기가 피아노 말고 뭐가 있습니까? 심사 위원들의 채점표가 공시될 테니 그 점수를 기준으로 하면 공정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난데없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루시는 어이가 없어 데이버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타티아나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리라 믿는 것 같았다.

그리고 타티아나도 곧바로 거절하지 않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뜬금없는 내기는 아무 도움도 안 된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단지 지금 목표를 하나라도 더 늘리면 늘릴수록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정말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불안감을 느낀 루시는 자기도 모르게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기, 심사 내용을 가지고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건 금지인데. 아까 사인하지 않았어?}

아무 이유 없이 끼어든 건 아니다. 분명히 콩쿠르 규칙에 그러한 조항이 있었다.

정론에 말문이 막힌 데이버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삐딱하게 서더니 고개를 저었다.

{뭐…… 그럼 어쩔 수 없네.}

다시 그는 남자들 사이로 돌아가더니 이번엔 직원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브닝 세션 첫 번째 피아니스트이니만큼 당장 준비할 것들이 많은 듯했다.

타티아나는 앞으로 살짝 나오더니 루시를 돌아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스튜어트 씨.}

만약 옆에서 루시가 막지 않았더라면 타티아나는 그대로 내기에 응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겐 그것이 실수가 될 수도 있었다는 자각이 있는 것 같았다.

루시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웃었다.

{그냥 루시라고 불러 주면 고맙겠는데.}

타티아나 역시 이 정도 작은 부탁은 가볍게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데이버가 직원들과 함께 복도를 떠났다. 앞으로 이브닝 세션 시작까진 1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리허설 실에서 혼자 연습하다가 무대에 오를 것이다.

루시는 세 번째 순서였다.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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