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0화
의상을 갖춰 입고 모인 7명의 연주자들은 서로를 살폈다. 경쟁자들의 준비 상태를 가늠하고, 반대로 자신은 남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확인하는 행위다.
신경이 곤두선 사람의 관찰력은 매우 예리한 수준까지 올라간다.
자신에게 향하는 눈빛만 봐도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향하는 시선들도 있었다. 난 거기서 상당히 경계하는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 하나쯤은 우습게 봐 줄 만도 한데, 그런 사람은 없었다.
‘모두 열심히 해 줄 것 같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이 어려운 무대까지 와서 방심하는 연주자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각자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확신을 느끼는 일은 상당한 고양감을 동반했다.
그리고 그러한 뜨거운 열기는 사람들 사이를 거치며 점점 증폭되었다.
살짝 고양감에 취한 데이버는 내게 사적인 내기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건 그 나름의 존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그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속에서 치미는 어떠한 감정을 느꼈다. 그건 희열이었다. 화풀이 대상을 찾았다는 희열.
전부터 데이버는 약간 신경에 거슬렸다. 그에게 화풀이를 한다면 어쩐지 속이 시원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루시가 말려 주지 않았다면 난 그의 도전을 즐겁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끌어모아 그에게 부딪쳤겠지.
그 결과는 아마 깔끔하지 못했으리라. 그건 미친 사람이나 할 행동이다.
‘아직까진 괜찮아…….’
충동적인 스스로를 자각한 나는 조금 놀랐고, 자조했다.
난 화가 나 있었다. 세연이 말한 그대로였다. 상황이 왜 이렇게까지 된 것인지 억울했고, 운명에 지치고 분노했다.
단지 그 분노가 절대로 세연과 교수님에게 향해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제어하고 있을 뿐이었다.
세연에 대한 역할은 내려놓기로 결정했지만 내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책임감까지 던져 버릴 순 없었다.
애초에 권리 같은 건 주장할 생각도 없었다.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난 다시 한번 생각을 공고하게 다졌다.
‘끝까지 해내야 해.’
책임감이야말로 내게 거의 마지막으로 남은 건전한 정신일지도 모른다.
날 믿어 준 검은 새에 대한 책임감, 세연을 들인 교수님에 대한 책임감, 용기를 낸 아나스타샤에 대한 책임감, 꺾이지 않고 있는 에르네스트에 대한 책임감.
그 책임감들은 내게 단단히 달라붙어 있다. 하지만 난 그것을 속박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내가 서서 움직일 수 있는 건 그 단단함이 내 정신을 붙잡아 주고 있는 덕분이었다.
지금 세연에게 향하는 내 책임감은 여전히 강렬했다.
그러니 날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교수님의 판단에 세연이 엇나가지 않도록 분명하게 알려 주어야만 했다.
자신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음악에 깊이 침잠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번에 보여 주면 세연도 교수님이 옳았다는 걸 이해하게 될 것이다.
거기까진 거의 확신에 가깝다. 하지만 이후 세연이 어떤 눈으로 날 바라볼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착한 그 아이가 조금 연민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 뿐이다.
“어이없네.”
순간적으로 든 나약한 생각이 경멸스럽다. 난 낮게 중얼거리며 눈을 들었다. 아주 작게 말했는데도 몇몇 사람이 날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휙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조금 불편했다. 적당히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이 에너지 넘치는 연주자들의 작은 모임이 길어지는 일은 없었다.
데이버가 그의 담당 직원을 따라 바로 연주를 준비하기 위해 떠났고, 다른 담당 직원들 역시 각각 연주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일반적으론 모두 한 대기실에 몰아넣고 순서대로 나오라고 하기 마련이지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무대는 엄격한 규칙에 따라 마치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움직인다.
연주자들은 시간에 맞추어 각자의 개인 연습실로 갈 필요가 있었고 이후 모두 같은 조건하에 무대에 선다.
그런 진행이 빈틈없이 이루어지려면 철저한 관리가 필요했다. 때문에 연주자들마다 직원이 붙는 것이다.
나에게도 담당 직원이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루트거 칼스도르프가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되나요?”
난 거꾸로 물었다. 내 순서 앞엔 6명이나 되는 연주자들이 있다. 7시도 안 되었으니 아직 시간이 많았다.
그사이 괜히 돌아다니다가 연락이 안 닿거나 진행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된다. 그러니 난 루트거가 시키는 대로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루트거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저로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3시간 정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주는 것이 좋겠죠. 하지만 그러면 지루해서 어떻게 있습니까? 그렇게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죠.”
콩쿠르 측에서도 연주자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고민이 많은 것 같았다.
곡을 랜덤으로 정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 압박을 주는 콩쿠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기 중인 연주자를 무작정 묶어 두는 건 능사가 아니었다.
루트거는 양팔을 활짝 펼쳐 보이며 정말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니 자유롭게 행동하시되…… 적어도 9시 30분까진 다시 홀로 돌아와 저와 만난다고 생각하시고 그 사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실 건지 저에게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유가 주어져도 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멍하니 바라보자 루트거가 웃으며 말했다.
“식사를 하셔도 되고, 연습을 하셔도 됩니다.”
에너지와 자기 확신. 둘 다 내게 필요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본 난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칼스도르프 씨. 혹시 조용히 쉴 수 있는 곳이 있나요?”
“아, 쉴 생각이십니까?”
“예. 조용하고…… 어두운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지금 난 드레스 차림이다. 이 상태로 식사를 하러 가거나 연습실에 갔다가 내 외견을 다시 손봐야 할 일이라도 생긴다면 귀찮아진다.
지금은 가급적 집중력이 깨지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조용한 공간이 필요했다. 빛조차 불필요하다.
내 요구를 알아들었는지 루트거는 고민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워서 주무실 것 같진 않군요.”
“예. 졸리진 않아서.”
“그렇다면 적당한 곳이 있긴 합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난 앞장서는 루트거를 따라갔다. 그가 날 데려간 곳은 커다란 문 앞이었다.
약간의 위압감을 느끼며 물끄러미 바라보자 루트거가 그 문을 열며 말했다.
“스튜디오5입니다. 영화관으로 사용하는 곳인데 오늘은 쭉 비어 있을 예정입니다.”
콘서트홀이 있는 건물에 영화관도 있다는 건 상당히 신기했다.
본래 방송국이었다가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지원하는 곳으로 바뀐 플라지 빌딩만의 특별한 점이었다.
콩쿠르가 열리는 홀이 본래 녹음실이어서 스튜디오4인 것처럼 이 영화관 역시 녹음실이었던 것을 개조한 모양이다.
불이 완전히 꺼진 스튜디오5는 당장 눈앞이 안 보일 정도로 깜깜했다.
스마트폰의 불빛에 의존해 앞서나가던 루트거는 밑으로 내려가는 건 위험할 것 같다며 맨 뒷좌석에서 멈추어 섰다.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네요.”
“다행입니다. 지금은 너무 어둡군요. 제가 불을 좀 켜 놓겠습니다.”
“아뇨, 지금이 좋아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서우실 텐데요.”
무서운 건 싫다. 그러나 어둠이 차라리 나은 점도 분명히 있다.
난 루트거가 안내한 맨 뒷좌석 안쪽으로 들어가 드레스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잘 정돈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푹신한 느낌이 꽤 기분 좋았다.
“여기서 잠시만…… 1시간 정도만 쉴게요.”
“알겠습니다. 그러고 나면 식사하시죠. 제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가볍게 샌드위치 같은 건 어떠십니까?”
“그렇게까지 해 주시지 않아도…….”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스마트폰 불빛만 어렴풋하게 보이는 어둠 속에서 루트거는 사람 좋게 웃더니 뒤로 물러섰다.
“그럼 이만 방해하지 않고 가 보겠습니다. 혹시 제가 필요하시다면 바로 전화나 메시지를 해 주시길.”
“고마워요.”
루트거가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혔다. 그리고 거대한 공간과 어둠만이 남았다.
너무 조용한 나머지 내 심장 소리가 울리는 것이 들리고, 주위가 끊임없이 넓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든다.
그 속에서 난 스스로의 존재만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내린 판단과 결정들 그리고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감정들. 죄책감과 책임감. 운명이 있다면 누구의 안배인가.
머릿속 수조 안에선 여러 생각이 군집하여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뒤얽혀 돌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그 수조에 음악이라는 이름의 포식자들을 풀어놓았다. 돌아다니던 생각들은 음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음악들은 정말 욕심이 많다. 내 확고한 의지는 물론이고 무의식까지도 먹어 치우고 표현하려 한다.
난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내어 주지 않았을 감정들까지 모조리 다 먹였다. 점차 비대해지는 음악의 존재는 날 대신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렇게 난 스스로를 음악과 치환하는 일을 계속해 나갔다.
“몇 시지.”
가만히 앉아 머리만 쓰다 보니 조금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약간 이성이 남아 있는 내 머리는 빠르게 현실 감각을 되찾기 위해 시간부터 확인하려 했다.
아직 루트거가 돌아오지 않았으니 1시간은 안 되었다. 체감상 적당히 30분 정도 지난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미 데이버의 순서는 끝났으리라.
그는 내가 연주를 봐 주길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다음 순서는 박경민. 난 그에 대해서도 약간의 흥미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한국 연주자들의 무대는 많이 봤다. 그의 것까지 볼 생각은 없었다.
연주를 모니터링할 생각이 없으니 내게 남은 건 아까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것뿐이었다.
내 생각을 잡아먹은 음악들은 거대한 어둠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이 스튜디오5 전체는 이미 완전히 점령된 후였다. 고요 속에서도 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어둠 너머의 소리를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
갑자기 등 뒤에서부터 빛이 쏟아졌다.
혹시 루트거인가 싶었지만 문을 여는 소리와 이어지는 발소리가 완전히 달랐다.
순간적으로 난 나도 모르게 좌석 아래로 몸을 미끄러트리며 몸을 낮췄다.
당황한 난 머리를 숨겼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거대한 어둠과 음악의 물고기는 빛이 쏟아지자마자 사라져 버렸고, 난 현실 속에 툭 떨어져 약간의 패닉에 빠진 채 숨을 죽이고 기다릴 뿐이었다.
루트거가 분명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고 했었기에 누가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대체 뭐야.’
이곳에 갑자기 침입한 사람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다시 어둠이 찾아든다. 하지만 음악의 물고기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의문의 인물이 발소리를 울리며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숨 쉬는 것도 잊고 얼어붙은 나는 눈만 크게 뜬 채 발소리가 다가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실루엣이 보인다.
저게 분명 사람이라는 건 안다.
아마 들키더라도 내게 위해를 끼치거나 하진 않을 것이란 것도. 하지만 어둠 속에서 말없이 다가오는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그 실루엣은 내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그 광경을 올려다보며 난 점점 더 강한 패닉에 빠졌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미칠 것 같다.
‘뭐야…… 뭐냐고…….’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데, 갑자기 그 실루엣이 내 옆 좌석에 털썩하고 앉았다. 기겁한 나는 몸을 반대 방향으로 쭉 기울였다.
『흐아…….』
갑자기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번엔 낮게 중얼중얼 거린다.
『□□□□ □□, □□□ □□□□□…….』
그 프랑스어엔 엄청난 불만이 담겨 있었다. 피곤함과 무기력감, 거기에 무언가를 저주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있다.
난 뻣뻣하게 굳은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여성이란 건 알겠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거의 10초 넘게 기묘한 상황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기척을 숨길 순 없었다.
말은 하지 않더라도 내쉬는 호흡과 심장 박동, 체온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해 준다.
옆자리의 그녀는 갑자기 휙 하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어둠 속이었지만 서로 눈이 마주쳤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으아아아악!!!』
그녀는 유령이라도 본 듯 비명을 지르며 좌석을 덜컹거렸다.
나야말로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