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1화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영화관에서 비명을 지르는 여자. 거의 공포 영화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 □, □, □□!!!』
난 프랑스어로 간단한 인사말밖에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유령을 어떻게 부르는지도 배울 수 있었다. 영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영어로 대답했다.
{유령 아니에요.}
{허억…… 헉…….}
거칠게 숨을 들이쉬던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야! 뭐야? 당신.}
{저야말로 묻고 싶네요.}
{이런 빌어먹을.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면서 그녀는 스마트폰을 들어 올려 다짜고짜 라이트를 켰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 있던 나는 급히 팔을 들어 올렸다.
아무리 다급하다고 해도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 난 살짝 짜증을 담아 말했다.
{눈부셔요.}
{드레스……? 지금…… 설마 피아니스트?}
{예. 알았으면 불 꺼 주시겠어요?}
다시 부탁하자 그녀가 라이트를 껐다.
빛이 사라지자마자 다시 서로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이 찾아왔고, 옆자리의 그녀도 내가 사람이라는 걸 확인해서인지 조금은 안정을 되찾은 듯한 호흡을 내쉬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녀가 어색하게 물었다.
{아니…… 왜 이런 곳에…….}
{조용히 휴식할 곳이 필요해서요.}
의상을 다 입었으니 밖으로 나가긴 어려웠고, 이 빌딩 안에서 조용하게 쉴 만한 곳은 이곳뿐이었다.
지금은 그 조건이 깨져 버리긴 했지만. 루트거가 이곳을 전세 내 준 것도 아니었으니 불평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첫 만남이 엉망진창이긴 했지만 어쨌든 아직 내 옆에 있는 그녀도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홀로 이 어두운 장소를 찾아왔으리라.
털썩 앉자마자 내뿜었던 그녀의 깊은 한숨과 중얼거리던 목소리에서 약간의 동질감을 느꼈던 나는 부드럽게 물어보았다.
{당신은요?}
{……나도 마찬가지야.}
{이곳 직원이시죠?}
{…….}
지금도 잘 안 보이고, 아까 빛이 있었을 때도 못 봤지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 물음을 취조로 여겼는지 갑자기 묻지도 않은 일을 이실직고했다.
{그래! 땡땡이치러 왔다! 뭐 문제라도 있어? 젠장, 딱 15분만 있다가 갈 생각이었다고.}
{아뇨, 문제는 없는데……. 제가 있는지 정말 몰랐나요?}
적당히 쉬려고 사람이 없는 곳을 찾다가 이곳에 온 것까진 이해했는데, 어떻게 바로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못 알아차리고 그대로 앉아 버릴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다시 생각해 봐도 황당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전혀 몰랐어. 어둡긴 해도 잘 살피고 들어왔는데. 어떻게 바로 옆자리에 있었던 거야?}
{갑자기 누가 옆에 앉길래 깜짝 놀랐어요.}
{난 진짜로 네가 유령인 줄 알았어…….}
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긴장을 풀었다. 나와 그럭저럭 말이 통한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이곳에 왔다는 건 분명했으니까.
{그래서…… 누군데?}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러시아에서 왔어요.}
{아, 이름은 들어 봤어. 기대하는 사람이 많던데?}
{……그래요?}
난 어색하게 답했다. 가장 어린 내게 기대가 많이 쏠려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난 거기에 부응해야 할 의무가 있고.
잠시 후 해야 할 연주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녀도 자신을 소개했다.
{후…… 난 클로에야. 이곳 어시스턴트고.}
{반가워요, 클로에.}
{지금 손 내밀었니?}
{예.}
{이렇게 깜깜한 곳에서 다른 사람이랑 인사하는 건 처음이네.}
뭔가 옆에서 더듬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곧 내 손을 클로에가 붙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우린 조금 더 친근감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상대와 악수한다는 건 꽤 재미있었지만, 클로에는 약간 불편한지 슬그머니 일어서려고 했다.
{불 켜고 올게.}
{이대로 두면 안 될까요?}
{……왜?}
{그냥요.}
여러 복잡한 이유가 있긴 하지만 그걸 남이 알아듣도록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다행히 클로에는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었고, 내게 많은 걸 묻지 않았다. 대신 농담으로 받아치며 이 상황을 넘어가려고 했다.
{그래, 알았어. 나도 떳떳하지 못한 상황이니까. 네가 날 알아보도록 둘 순 없지.}
{……방금 이름 말하지 않았었나요? 클로에.}
{아.}
그녀는 바보 같은 소리를 냈고,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 상황을 재미있게 여기는 건 클로에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실컷 웃던 클로에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하…… 그래서, 명상 같은 걸 하던 중이야?}
{비슷해요.}
{그럼 말 걸지 말까?}
연주를 앞두고 쉬러 온 것이라면 방해하지 않겠단 뜻이었다.
클로에도 정말 그냥 쉬고 싶어 이곳에 온 사람인 만큼 내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전 연주자들과 있을 땐 다른 사람과 얽히기 싫었었다. 문제를 일으키기도 싫었고, 심적 여유가 없어서 차갑게 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장소라서 그런지 약간 여유가 생겼다. 상대의 얼굴이 안 보인다는 건 반대로 내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저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휘발되어 사라질 것이란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 편했다.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솔직히 나도 그런 생각 하고 있었어.}
가볍게 묻자 클로에도 동조했다.
인사까지 나누었는데 이제와 서로 모른 척 각자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건 아깝고 어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살짝 들뜬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네 이야기부터 해 줘. 원래 어두운 곳을 좋아해?}
클로에는 기본적으로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지만, 은근히 하고 싶은 말을 못 참는 성격이기도 했다.
그녀의 질문에 난 진지한 대답과 농담을 동시에 떠올렸다. 하지만 아직 진지한 이야기를 막 늘어놓을 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농담부터 했다.
{절 무슨 흡혈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듣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날 방심시켜 놓고 갑자기 콱 무는 거 아니야?}
{걱정 마세요. 전 무척 약한 흡혈귀일 테니까.}
애초에 난 힘도 없고, 다른 사람을 물 수도 없을 것이다.
자조하듯 웃자 클로에는 믿기 어렵다는 듯 말했다.
{네가 약할 것 같진 않은데.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떠들어 댈 리 없잖아.}
아마 클로에가 생각하는 나는 화려하고 실력 있는 연주자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난 연주자로서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고, 그 결과가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건 무척 기쁘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고. 하지만 약간은 공허하기도 했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하자 클로에가 가볍게 물었다.
{난 클래식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 연주하고 있는 연주자랑 비교하면 어때? 더 잘하니?}
{누군지 몰라요.}
{중계 틀어 보면 되잖아. 내가 틀어 볼게.}
클로에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면 일단 진행 중인 콩쿠르를 주제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난 솔직히 그냥 그녀와 이야기하는 게 좋았지만 그렇다고 중계를 틀지 말라고 막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있자 클로에가 스마트폰을 켰다.
그 와중에도 날 배려하는지 화면 밝기를 최소화한 상태였다.
미약한 빛이 은은하게 클로에를 비추었다. 그녀는 나보다 겨우 몇 살 정도 많은 것 같이 보였다.
잠시 후 그녀가 중계 영상을 재생시켰고, 피아노 연주 소리가 울렸다.
영화관을 크게 울리기엔 턱없이 작은 소리였지만 난 듣자마자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한국 연주자네요. 박경민이겠죠.}
{아는 사람이야?}
{몰라요.}
클로에는 조금 의아해하며 날 바라보았지만 피아노 연주자로서 내가 그를 알아보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았다.
그보다는 지금 화면에서 나오는 빛으로 비로소 내 얼굴을 확인한 것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인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녀는 급히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우린 잠시 말없이 콩쿠르 무대를 관람했다. 박경민이 연주하는 곡은 쇼팽의 에튀드 op.25의 10번.
몰아치는 옥타브로 시작하는 도입부가 인상적이지만 그보다 중간에 깔리는 서정적인 멜로디의 구현과 조화가 중요한 곡이었다.
완전히 다르게 들리는 두 가지 테마를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 나가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박경민은 그 지점을 잘 파악하고는 아름답게 연주하고 있었다.
겨우 3분 남짓 들었을 뿐이지만 그가 쇼팽을 얼마나 깊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데엔 충분했다.
곡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나도 모르게 난 입을 열어 클로에에게 말했다.
{정말 건전하고 듣기 좋은 연주네요. 이런 연주를 해야 하는 거겠죠.}
깔끔한 전문가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불안함을 그리는 연주를 불안하지 않게 해낸다는 건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클로에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솔직히 난 잘 모르겠네. 클래식을 자주 안 들어서 그런가…….}
{별로이신가요?}
{그…… 뭐라 해야 하나. 스피릿이 부족하지 않아?}
{……스피릿?}
연주에 영혼이나 정신을 실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긴 하지만 이렇게 들으니 약간 생소하게 느껴졌다.
클로에는 전문적인 레토릭 등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세하게 말해 보려는 듯 손을 펼치며 설명했다.
{내 편견일지는 모르겠는데 팝 스타들에 비해 클래식 연주자들은 뭔가 정형화된 예술을 하려는 느낌이 있어서…… 뭔가 예술가라면 자기 영혼을 갈아 넣는 그런 게 있어야 하지 않나?}
{뭐…… 보편적인 관점이네요.}
{특히 지금 치는 애는 그런 부분이 부족하네. 뭔가 마음에 확 와닿지가 않아.}
그 평가에도 일리가 있었다. 확실히 박경민의 연주는 예쁜 유리 세공품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으니까.
저 큰 무대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너무 여유롭게 잘 해내서 다급한 사람의 어수선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클로에의 기준이 어디쯤에 있는지 가늠해 보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펄쩍 뛰더니 다급하게 덧붙였다.
{아, 차별적 발언은 아니야! 며칠 전에 했던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좋았었거든.}
{누군가요?}
{이름이 뭐더라? 한국인이었는데……. 지금 찾아볼게. 너도 들어 보고 평가해 줘. 네 의견도 듣고 싶어.}
클로에는 빠르게 이전 연주 영상들을 찾기 시작했고, 곧 한 영상을 내 앞에 틀어 보여 주었다.
그건 세연이 카를 타우지히의 유령선을 연주하는 영상이었다.
다시 들어 봐도 내 평가는 달라지지 않았다. 세연은 정말 잘했다.
곡에서 요구하는 모든 기술적 조건을 만족시켰고, 빈틈없이 연주하면서도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다채롭게 펼쳐 냈다.
그 스타일에선 나와 약간 비슷한 면모를 찾아볼 수 있었지만 그런 것이 세연의 실력을 낮게 평가할 이유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난 긍정적인 평가만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서 내 그림자를 느끼기 시작했을 무렵 바로 그만두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내 목 뒤 부근을 조르고 있었다.
음악을 두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내 신념과도 같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그녀가 아닌 내게 하는 말이었으니까.
{이런 음악은 연주자를 갉아먹어요.}
{그러니까, 내 말이. 스피릿이 느껴지지 않니?}
{그 스피릿이 뭔지 모르겠지만…… 연주자에겐 정말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음악으로만 모든 걸 평가하는 바보가 되고 만성 우울증 같은 걸 달고 사는 인생이 되겠죠.}
난 중얼거리며 말을 맺었다.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고칠 생각이 없다면 적어도 다른 사람을 물들이진 않아야 한다.
앞으로도 세연은 분명 대단한 연주자가 되겠지. 나보다 훨씬 더 잘 해낼 것이다. 그러니 나 같은 걸 따를 필요는 없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클로에는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힘들게 이룬 음악을 기꺼이 들려주고 있다는 걸 청중들은 모두 다 알아. 그러니까 응원하는 거잖아?}
클로에가 청중의 입장에서 말하는 긍정적인 응원은 내 가슴 깊은 곳에 닿았다.
그제야 난 알았다. 나도 모르게 벌어져 덧나고 있던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