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2화
난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굴지 않고 제대로 해내기 위해선 항상 제정신을 차리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늘 치미는 감정들을 눌러 두기 전에 제대로 들여다 봤어야만 했다.
항상 피아노가 먼저라서, 가족과 친구들이 먼저라서 꾹꾹 눌러 밀어 둔 감정들은 켜켜이 쌓여 이젠 어떤 형태인지도 알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그 감정들이 이따금 내 이성을 뚫고 나온다는 걸 느낀다. 세연과 교수님의 일은 화약고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나 다름없었다.
슬슬 한계라는 걸 느끼지만 두 사람에게 쏟아 낼 순 없었다. 그래서 견디고 또 견뎠다.
‘어떻게 해야 옳은지…….’
내가 가진 음악은 위험하고 실패했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도 어렴풋이 멀쩡한 사람이 되기엔 글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교수님의 진단으로 납득해 버리고 말았다.
음악이란 것을 부정하는 건 내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죽음을 결정짓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난 적어도 세연이 건전하고 번듯한 연주자가 되길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녀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속죄는 분명했고, 그 역할을 강인하게 견뎌 내야만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로…….’
하지만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조금 이해를 받은 것만으로도 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딱 한 곡의 음악으로 세연은 인정받았다. 클로에는 그녀의 음악에서 스피릿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 스피릿이 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예상이 가는 바가 있긴 했다.
세연의 음악이 높게 평가받은 것을 보며 난 순간적으로 가슴 벅찬 뿌듯함을 느꼈다.
그리고 기뻐하는 스스로를 자각하자마자 버릇처럼 그 감정을 누르려 했다. 여전히 난 내가 그런 감정을 느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난 그렇게 냉정하기엔 너무 엉망진창이었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와중에 간신히 얻어 낸 청중의 긍정이었다. 내겐 그걸 내칠 정도의 강함이 없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니?}
{예.}
서로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클로에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이미 상당히 꿰뚫어 본 듯했다.
그녀는 선을 넘어 들어오지 않고 청중이라는 입장에 서서 말했다.
삶을 쏟아부으며 매진하는 음악을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다.
단지 청중들은 그걸 알기에 응원한다고 했을 뿐. 그런데 그 말이 지금 내겐 마치 계속 살아 있어도 된다는 말처럼 들렸다.
물론 바뀐 건 별로 없다.
교수님이 말하고 내가 동의한 문제는 세연의 현재 실력이 아니라 미래의 일이었다. 지금 그녀의 실력은 정말 뛰어나다.
아마 많은 청중은 물론이고 심사 위원들도 그녀에게 좋은 평가를 내렸겠지. 거기에 한 명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내 입장과 할 일도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들끓던 감정이 약간 풀어진 기분이 들었다.
내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클로에는 갑자기 무슨 걱정이 들었는지 빠르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 그래도 너무 진지하게 듣진 마……. 난 클래식을 잘 몰라. 그냥 여기서 일하고 있으니까 대회 같은 걸 하면 들을 뿐이지.}
{그래도 안다고 하셨잖아요. 저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알긴 뭘 알겠니.}
클로에는 어림없다는 듯 가볍게 웃었지만 난 그녀가 클래식과 관련 없는 분야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본질적인 부분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간파했다면 숨길 것도 없다.
{아까 말했던 것, 제 이야기였어요.}
{무슨 말?}
{음악으로 모든 걸 평가하고 만성 우울증을 달고 사는 인생이 되리란 예상이요.}
스스로를 그렇게 말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지만, 지금 난 어째서인지 자조하지 않고 평범하게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비로소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뒤돌아보지 않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사실은 늘 뒤를 보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랐다는 걸 얼마 전에 알았어요. 스스로가 정말 한심하더라고요.}
{……그래서?}
{앞만 보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전력 질주해 보기로 했죠. 제가 넘어지면 뒤에 있던 사람은 적어도 그런 절 보고 조심할 테니까.}
난 친구들에게 보여 줄 수 없는 면을 가지고 있었다. 알레한드로에게 살짝 보여 주었을 때, 일부만을 보고도 그는 기겁했다.
다양한 나라에서 공부한 그도 날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보여 줄 수 없는 건 그저 연습 방식 같은 게 아니었다.
연주야말로 통제를 잃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곳까지 가 버리곤 했다.
그런 연주는 필경 청중들을 겁먹게 한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테고, 난 손수 만든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게 될 테지.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홀로 파고드는 음악의 끝은 결국 그렇게 되어 버린다.
세연은 아직 그런 날 모른다. 그러니 이번에 보여 주면 아마 기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도 바보 같은 도피였네요.}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하려던 건 그저 미친 짓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걸 듣고 세연이 그저 무서워서 피하리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그녀를 업신여기는 일이었다.
클로에는 가만히 내 말을 들어 주었다. 난 중얼거리며 말을 맺었다.
{기껏 떠올린 방안이라는 것도 엉망진창이고…… 앞으로도 전 그렇겠죠. 이미 머리가 이상해진 것 아닌가 싶어요.}
기억이 뒤섞이고 성격도 뒤섞이면서 정상이길 바라는 것이 우스운 일이다.
정신과 진료를 받아 본 적은 없지만 난 애초에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이상해 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노력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젠 대체 어디까지 이상해졌는지 파악할 수도 없었다.
내가 제정신이긴 한 걸까?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내 판단을 믿을 수 없게 된다면 그땐 뭘 믿어야 하는 걸까.
그나마 내가 아직 완전히 기울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는 건 클로에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어두운 분위기가 속마음을 꺼내기 쉽게 만들어 준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클로에는 무거운 이야기를 들은 것에 당황하기보다는 조금 더 진지하게 다가와 주었다.
{자기 이야기를 친구 일인 것처럼 말하는 건 나도 자주 그래. 너도 그럴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왜 생각을 바꿔서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 주는 거야?}
{……조금 지친 건 저도 클로에도 비슷할 것 같아서요.}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만 쏟아 낸 것이 미안해져서, 만약 클로에도 할 이야기가 있다면 들어 줄 생각으로 그리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이야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상황을 더 중요시했다.
{그래, 여기서 우리가 만난 게 그 증거겠지.}
많은 사람과 음악이 어우러지고 세계 곳곳에 전파되고 있는 이 거대한 건물에서 우린 굳이 조용하고 어두운 곳을 찾아왔다.
이건 그저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에 가까웠다.
클로에는 가볍게 웃었다. 옆자리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난 그녀가 몸을 살짝 일으켜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응시하는 시선을 마주했다. 클로에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런데 있잖아, 타티아나. 네가 어떤 상황인지 내가 전부 이해할 순 없어도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는 건 있어.}
{무엇인가요?}
{너도 나도 도망치지 않았다는 거야.}
난 그 말을 바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금 우리가 있는 여기가 도망친 장소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가 보는 관점은 그보다 훨씬 더 넓었다.
{도망치려면 이 건물 밖으로 나갈 수도 있었어. 네 드레스나 내 유니폼 같은 건 벗어 던지고 어디든지 틀어박혀서 손톱이나 깨물고 있었겠지.}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난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전 손톱을 깨물 수 없어요.}
{그래, 그렇겠지. 왜냐하면 넌 잠깐 쉬었다가 무대 위로 올라갈 피아니스트이니까.}
내가 그리 반응할 줄 알았다는 듯 클로에는 가볍게 받아쳤다. 그리고 활기차게 이어 말했다.
{내가 잠깐 쉬었다가 일터로 복귀할 직원인 것처럼.}
어렴풋이 그녀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한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어둠 속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물론 난 땡땡이긴 한데, 아무튼. 적어도 이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고 조용하고 어두운 곳을 찾아왔다는 건 우리에게 잘 해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단 뜻이야.}
{잘 해내고자 하는 마음이요?}
{그래. 넌 모든 걸 망쳤다고 말하지만 지금도 잘하고 싶어 해.}
음악가로서 지속했던 세연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걸 잘해야 한다는 생각은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클로에의 말은 그 방향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있는 진심 또한 그렇지 않았다.
난 세연과 앞으로도 잘 지내고 싶었다.
연민이나 두려움 같은 시선을 받지 않고 동등한 친구로서 가끔은 한 발자국 앞서 있는 음악가로서 함께 하고 싶었다.
그간 외면하던 진심과 마주하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클로에는 그런 내 생각도 알아본 것처럼 깔끔하게 한마디로 정리했다.
{타티아나, 네가 뭘 하려고 하는 진 모르겠어. 하지만 그냥 해 봐. 내 직감엔 아마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해도 잘될 거야.}
무심코 그 말대로 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내겐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나도 검은 새도 그림자에 죄가 따라붙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 굉장히 충동적인 성격이에요. 마음이 가는 대로 했다간 큰일나요.}
{이성적인 답을 찾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거잖아?}
{그래도 이성적이어야…….}
다시 바른말을 찾아보려던 나는 말끝을 흐렸다.
내가 이성적으로 낸 결론은 지금까지 사람으로서 잘 참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는 일이었다. 그건 광증의 표출이나 다름없었다.
이성의 답에 이성이 없다는 끔찍한 모순이 내 말문을 틀어막았다.
클로에는 내가 입을 다물었는데도 자신이 옳았다고 의기양양하지 않고 부드럽게 물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으니 스스로를 못 믿고 충동적이라고 평가하는 거겠지?}
{……예.}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넌 성장했을 거야. 분명 네 충동도 성숙했을 테고.}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건 안다. 나도 내가 예전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클로에가 마지막으로 농담하듯 말했다.
{사실 나도 예전에 사고 많이 쳤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봐. 사회인으로서 멀쩡히 잘 살고 있잖아?}
결국 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스스로를 돌이켜 보았다. 만약 내가 정말로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다면 아마 그리 좋은 결과가 있진 않았을 터다.
하지만 클로에와 만나서 이야기한 지금은 어쩐지 정말 마음을 따라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었다. 타인에게나 내 스스로에게나.
{위로해 줘서 고마워요, 클로에.}
{뭘. 나야말로.}
클로에는 킥킥 웃더니 다시 움직였다. 바로 옆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그녀가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느껴졌다.
{너랑 이야기하고 나니까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땡땡이는 이쯤 하고 갈까.}
{별로 못 쉬셨잖아요.}
{아니, 중요한 건 내 정신적 안식이었거든.}
10분만 더 이야기하고 가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미 클로에는 생각을 굳힌 후였다.
그녀는 내게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옆 좌석이 덜컹거렸다. 클로에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녀는 위에서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먼저 나갈게. 너도 이 어두운 영화관에서 나가면 재충전할 수 있을 거야.}
그리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듯 확신 어린 어조로 이야기한 클로에는 몇 걸음 멀어지더니 다시 밝게 말했다.
{그럼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기대할게.}
그 말만 남기고 그녀는 휙 돌아서선 뒤편으로 향했다. 발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오며 클로에의 실루엣이 비쳤다.
문가에서 클로에는 잠시 내 쪽을 돌아보았다. 빛을 등진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환한 미소가 빛보다 더 찬란하게 내 눈에 새겨졌다.
“…….”
홀로 남은 나는 멍하니 좌석에 몸을 뉘었다.
클로에가 내 이야기를 들어 준 건 그저 직원으로서 콩쿠르 참가자의 긴장을 풀어 주려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그녀의 말엔 진심 어린 걱정과 응원이 담겨 있었다.
난 보다 차분해진 스스로를 느끼며 다시 어둠에 침잠해 들어갔다. 그런데 이젠 조용한데도 음악의 물고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요함만이 날 감싸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난 상념에 빠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문이 열리더니 이번엔 알고 있는 발소리가 들렸다. 루트거였다.
“계십니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여기 있어요, 칼스도르프 씨.”
난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문가에 서서 날 바라보던 루트거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