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3화
천천히 빛을 향해 걸었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건 눈만이 아니었다.
몸 전체가 무자극에 가라앉아 있었던 탓인지 빛을 마주하며 움직이려니 너무 힘들었다. 내가 이렇게 힘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고통을 피해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 버리면 영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된다.
난 저 빛을 똑바로 마주하면 언젠가 적응할 수 있다는 걸 안다. 그 믿음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괜찮으십니까?”
“아…… 잠시만요.”
영화관 밖으로 나오니 문 너머로만 비치던 빛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렬한 빛이 쏟아져서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루트거는 내 옆에서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그가 내 얼굴을 보고는 씩 웃었다.
“갈까요?”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루트거가 향한 곳은 사무실이었다.
원래 등록이나 서류 작성 등을 위해 오는 곳이지만 연주자 대기실로 가기 전 임시 대기실로도 쓰이는 듯했다.
난 구석에 있는 소파로 안내되었고, 루트거는 옆에 있는 냉장고의 자물쇠를 해제했다. 세상에 금고처럼 잠그는 냉장고는 처음 본다.
그는 냉장고에서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연주자들이 먹을 음식에 만에 하나라도 외부자가 손을 대면 안 되니까 자물쇠 달린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 같았다.
이 정도로 철저하게 관리하는 콩쿠르는 처음이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고마워요.”
솔직히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식사를 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샌드위치를 보니 허기를 참기 힘들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샌드위치의 절반 이상을 먹어 치운 후였다. 정신없이 우걱우걱 먹어 버렸다.
그제야 옆에서 루트거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나는 급격히 창피해져서 고개를 돌리고 빨대를 입에 물었다.
루트거는 껄껄 웃었다.
“사실 조금 걱정했습니다.”
“……예?”
“식사도 안 하실까 해서요.”
그는 내 상태를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찔리는 구석이 없잖아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보자 루트거가 이어 말했다.
“종종 그런 분들이 있죠. 무대를 앞두고 집중하면 식사는커녕 물도 입에 대지 않으시는 분들이.”
“그러면 컨디션에 지장이 생길 텐데요.”
“생각보다 또 그렇진 않습니다. 계속 그렇게 해 왔어도 괜찮았고, 그 때문에 금식을 루틴처럼 여기는 것이라서 연주가 흐트러지거나 하는 일은 없죠. 다만…….”
잠시 단어를 고르는 듯 말끝을 흐리던 루트거는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옆에서 보면 조금 안타까운 건 사실이죠.”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탐색하는 눈빛이었다.
무대에 집중하는 연주자에겐 그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그러니 옆에서 안타깝게 보며 걱정하는 것도 모조리 다 귀찮고 거슬리는 참견일 뿐이다.
나 역시 비슷한 사람이다.
정도를 넘어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래도 날카롭게 집중할 때 방해받는 건 상당히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만약 클로에와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샌드위치도 안 먹지 않았을까.
그냥 여기서도 조용히 앉아서 집중하다가 그대로 무대로 올라갔을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조금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일이었다.
얼굴도 잘 모르는 그녀와 잠시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난 지금까지 배워 온 여러 가지를 떠올리며 허기를 느꼈다.
정말 스스로 느끼기에도 이렇게 단순할 수 있나 싶다. 헛웃음이 절로 난다.
하지만 그리 기분 나쁘진 않았다. 덕분에 그렇게 단순한 자신을 느끼면서 동시에 다른 생각들도 조금 정리할 수 있었으니까.
난 샌드위치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제가 이걸 먹어서 안심하셨겠네요.”
“조금은요.”
루트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관을 찾으신 이유가 고도로 집중할 공간을 필요로 하신 거라면 그 후에 집중을 저하시킬 식사 같은 건 피하시리라 생각했었습니다.”
날 담당하는 직원으로서 루트거는 일단 식사를 제안하긴 했지만, 그걸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른 연주자들의 케이스에 대해 이야기해 준 것도 그렇고…… 아마 이곳에서 일하면서 여러 사람을 봐 왔기에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는 거겠지.
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루트거의 눈빛엔 여전히 흥미가 가득했다.
“그런데 뭔가…… 제 예상과는 다르군요.”
루트거가 이곳에서 쌓은 여러 경험에 따르면 난 특이 케이스에 속했다. 그는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지.
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느슨해진 것 같나요?”
“예? 아, 아뇨.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훨씬 더 좋아 보입니다. 제 말은…….”
“후후후.”
당황하는 그를 보니 어쩐지 조금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요. 느슨해진 게 사실이니까요.”
시원하게 인정해 버리고 나니 조금 더 편해졌다.
난 이번 무대에 정말 많은 걸 걸고 있었다.
자제하지 않고 모든 청중들을 내 음악으로 휘둘러 버리려 했고, 그것으로 세연을 질겁하게 만들 목적이었다.
교수님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더 이상 고집부리지 못하게끔.
심사 통과는 당연히 자신 있다. 아마 심사 위원들은 궁금해서라도 날 통과시켜서 내 음악을 더 들어 보려고 하겠지.
어지간해선 결과에 확신을 가지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확신이 있을 정도로 난 음악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없어졌다.
내가 그렇게 참지 않고 절제 없는 연주를 해 버린들 그건 나 자신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솔직한 날 드러내는 것도 아니라는 걸 느껴 버렸기 때문이다.
그건 그저 히스테릭한 미친 짓일 뿐이다.
클로에가 해 주었던 말을 돌이켜 보면 결국 남는 생각은 하나였다.
정말 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안심했어…….’
조용히 돌아본 내 마음이 정말로 모든 걸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모조리 단절하고 도망치길 바랐다면 나도 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더 이상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여력도 없으니 정말 끝장이었겠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난 더 잘해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떠나서 그렇게 살고 싶었다.
내가 진정할 수 있었던 건 그런 마음을 자각한 덕분이었다. 아직 난 미쳐 버렸거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지 않았다.
조금은 자신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자신감도 생겼다. 모든 건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테지.
느슨해진 마음은 결코 나약하지 않다. 조금 더 유연해진 만큼 탄성이 생기고 심지어 더 강해진 느낌마저 든다.
빙그레 웃는 날 바라보던 루트거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영화관에서 조금 주무셨던 겁니까?”
“아뇨, 전혀.”
“그럼 중계를 보셨습니까?”
“중간에 2분 정도 봤어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자 루트거는 당혹스러워했다.
“그럼 정말 대부분의 시간을 명상으로만 보내신 겁니까?”
“그렇죠.”
“뭔가 다른 일은 안 하시고요?”
루트거는 거듭해서 몇 번이나 물어보았다.
그가 보기에 난 1시간도 넘게 컴컴한 영화관에서 두 눈을 뜨고 앉아 있다가 나와선 난데없이 기분이 좋아진 이상한 사람이겠지.
하지만 클로에의 이야기를 할 순 없었다. 그녀의 땡땡이를 지켜 주기 위해 난 입을 다물었다.
그녀와의 의리를 지키려면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했다.
다시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고개를 젓자 루트거는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아까처럼 탐색하는 눈빛은 아니지만, 내가 정말 어딘가 제대로 이상해진 게 아닌가 걱정스러워하는 것 같아 보인다.
난 제정신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지금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진행 상황은 어떤가요?”
“아, 그걸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루트거는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스마트폰을 꺼내선 무언가 찾아보았다. 아마 콩쿠르 관계자들이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확인하는 것 같다.
“4번째 연주자인 마셜 씨가 조금 전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6번째인 베르니케 씨까지 대기 중이고요.”
“저도 바로 대기하면 되겠네요.”
“그렇습니다.”
내가 영화관에 가 있는 사이 다른 연주자들은 이미 연주를 마쳤거나 대기 중이었다.
마지막에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 조금 매몰차게 대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정도는 전하고 싶었는데…… 끝나고 나서 해야 할 것 같다.
이후 스케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난 식사를 마저 했다.
루트거는 내가 샌드위치를 허겁지겁 먹어 치우는 걸 기대하는 것 같았지만 이미 충분히 창피함을 느낀 나는 나머지 절반의 샌드위치를 얌전히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사무실 밖으로 나오니 복도에서 이야기하고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연주를 마친 데이버와 루시 그리고 두 사람을 담당하는 직원들이었다.
{베르체노바 양, 아직 밖에 계셨군요.}
{예. 이제 대기실로 가려고 해요.}
데이버는 그리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아까와 달리 연주자 동료라는 느낌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바라보는 내 시선이 조금 바뀌었다는 건 그도 느꼈으리라. 데이버는 어색하게 웃더니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까 내기 이야기했었던 거…… 진행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하하하.}
{……?}
{못 보셨습니까? 그럼 괜한 소리를…….}
정말 미안하지만 그의 연주는 못 봤다. 미안하다고 하려는 찰나 루시가 끼어들었다.
{이 사람 중간에 거하게 실수했거든.}
{스튜어트 양…….}
{내가 말려서 산 줄 알아.}
무대에서 실수한 연주자라면 되도록 조심스럽게 대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루시는 너무 과격했다.
데이버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내가 더 신경이 쓰일 정도였다.
{실수…… 크게 하셨나요? 괜찮아요?}
{어, 예? 예…….}
{큰 감점 없었으면 좋겠네요.}
데이버는 조금 당황했는지 버벅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실수한 것에 대한 충격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되도록 괜찮으면 좋겠다.
이어서 난 옆의 루시에게도 물었다.
{스튜어트 씨는 어떠셨나요?}
{난 뭐…… 연습했던 대로 쳤어.}
루시도 약간 더듬거리며 대답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게 잘한 모양이다.
나중에 두 사람의 연주는 따로 봐 둬야 할 것 같다. 만약 24명 안에 들게 된다면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난 이 사람들과 만약 다음 무대에서 만나면 어떨지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워졌다.
그런데 지금은 현실적인 시간이 조금 부족했다.
“가시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루트거가 날 재촉했다. 난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이만 가 볼게요.}
{아, 알았어. 네 무대까지 꼭 지켜볼게.}
루시가 웃으며 주먹을 꽉 쥐며 응원했고, 난 기쁘게 웃으며 그 응원을 받아들였다.
연주자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던 와중 루트거가 흘리는 투로 말했다.
“역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루트거는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몇 번 젓더니 말없이 날 대기실까지 안내했다.
대기실 앞에 있던 직원이 루트거와 프랑스어로 무어라 대화를 주고받은 후 내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럼 밖에 있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직원에게 절 불러 달라고 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고마웠어요.”
감사를 표한 뒤 난 직원의 안내를 받아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엔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미리 설명해 주었던 대로였다.
여기서 리허설을 하면서 손을 풀고 있으면 되는 모양이다.
마치 생선 가게를 앞에 둔 고양이처럼 피아노 앞으로 향한 나는 바로 건반 덮개를 열고는 피아노 상태를 확인했다.
대기실의 피아노는 상태가 안 좋은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곳에선 모두 철저하게 관리하는지 피아노 상태는 매우 훌륭했다.
무엇부터 리허설을 해 볼까 생각하면서 난 천천히 손가락을 돌렸다. 굳어 있던 근육과 관절이 풀어지면서 점점 더 유연해진다.
‘에튀드부터 해 볼까.’
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겪는 첫 난관은 바로 랜덤으로 지정되는 에튀드였다.
무대에 서기 30분 전 4곡 중 2곡을 통보받는 이 방식은 여러 연주자를 패닉에 빠트리곤 했다.
자신 있는 곡이 쓸모없게 되어 버리면 허탈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난 총 6가지의 경우의 수를 전부 고려해 왔다. 모든 곡을 철저하게 연습하고 조합을 시뮬레이션했다.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연주할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