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7화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 개의 시선.
내가 이 곡을 콩쿠르 무대에 올리는 것에 대해 미하일 선생님은 반대하셨다.
지도 선생님으로서 당연한 반응이었다. 메시앙의 현대 음악은 연주하기도 까다로울뿐더러 유리한 평가를 받기도 어려우니까.
일반적으론 평범하게 다른 사람들도 많이 연주하는 낭만주의 독주곡 중 하나를 선택하는 편이 좋았다.
애초에 난 그쪽 장르의 레퍼토리를 많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가장 자신 있는 걸 내보내는 것이 안전한 방법이었을 터다.
하지만 난 적당히 좋은 평가를 챙기기 위해 이 콩쿠르에 참가한 것이 아니다. 난 이곳에서 확인할 것이 많았고, 결정해야 할 것도 많았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예쁘고 아름다운 연주를 하는 것은 자신 있다. 하지만 거기엔 짙은 연기가 섞인다.
그렇게 연기하며 피아노를 다루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가끔 나 자신을 잘 모르게 된다.
그래서 나는 한 곡쯤은 오롯한 나 자신을 투영하는 음악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찾다가 발견한 이 곡은 내 목소리에 공명하고 있었다.
난 유신론자로서 운명과 기적을 믿게 되었지만 한편으론 그것들이 항상 기꺼이 받아들일 만하진 않다는 것 또한 안다.
그리고 메시앙은 신이 자비롭지만은 않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난 그의 음악에서 그 혼돈의 흔적을 또렷하게 발견했다.
그 순간, 나는 이 난해한 음악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고찰이 있었는지…….’
마치 책을 읽다가 공감이 가는 내용이 있으면 깊게 몰입할 수 있는 것처럼 난 그의 음악에 몰입했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내가 비슷하게 여기는 부분이 많다는 점에 놀랐다.
신의 존재를 믿으면서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나 소리를 색깔로 바라보는 공감각적 표현에 능숙했다는 점, 피아노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오케스트라처럼 다루려 했다는 점, 새의 소리에 몰두하는 점까지.
특히 새의 소리에 대해 메시앙은 조류학자에 비견될 정도로 진심인 사람이었다.
자주 산이나 들로 나가 새소리를 악보에 적어 오는 일을 죽을 때까지 했고 보린휘파람새fauvette des jardins, 새의 카탈로그catalog d'oiseaux, 깨어나는 새들le réveil des oiseaux, 새들의 심연l'abîme d'oiseaux 같은 새를 테마로 한 수많은 곡을 썼다.
그중의 한 곡인 대륙검은지빠귀le merle noir는 내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메시앙이 해석한 새의 소리와 그것을 음악으로 인간이 옮겨 냈을 때 지향하고 있는 점이 어디에 있는지 난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 곡도 연주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수백 년 전의 음악들을 주로 연구하고 좋아하는 내게 현대 음악을 주로 하는 메시앙은 그리 잘 맞지 않지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음악가로서의 얼개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덕분에 빠르게 연구할 수 있었고 그의 곡 중 가장 뛰어나다고 손꼽히는 모음곡 중 한 곡을 성공적으로 손에 쥘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 곡, 기쁨의 성령의 시선이다.
‘천천히…….’
장단조의 개념이 아닌 선법으로 이루어진 불협화음. 소리를 겹쳐 이루어 내는 음화tone painting. 인도의 라가 바르다나ragavardhana에서 온 오리엔탈 리듬.
이 곡은 일반적인 클래식 음악에선 보기 어려운 조건들을 잔뜩 가지고 있어서 간단히 해석하거나 익숙해지기 어렵다.
그래서 난 곡만 바라보기보다는 메시앙의 진의에 다가서려고 노력했고, 어떤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이 곡을 구현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최대한 양손에 힘을 풀고 그저 있어야 할 자리에 위치시킨 후 중력으로만 건반을 컨트롤했다.
인위적인 힘이 가해지지 않은 소리는 피아노 안이 아니라 머나먼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이 수십 시간도 넘는다.
단 8분을 위한 수백 배의 시간. 그 시간의 압축을 고스란히 음악의 밀도로 담아냈다.
내겐 아나스타샤와 같은 절대적인 테크닉도, 에르네스트와 같은 천재적인 음악 재능도 없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것들에 최대한 깊게 파고들며 연주자로서 자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 뿐이다.
‘거대하지만 가볍게.’
열광적인 춤과 성가대의 합창. 거기엔 새의 지저귐과 밤하늘 별빛의 반짝임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의 화려함이 가미된다.
종교적인 암시와 자연의 상징을 섞고 그것들에 날뛰는 에너지를 부여하자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음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메시앙 특유의 제한적 순환 선법은 연주자의 정신조차 도취되게 만든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이 음악에 휘둘려 버릴 상황이었다. 난 신경을 가다듬으며 침착하게 건반을 컨트롤했다.
이 곡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 수천 명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끝났을 때, 마치 그 성가에 응답하듯 넓게 제시된 소리의 풍경을 가득 채우며 기쁨의 성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려워.’
본 적 없는 존재를 그려 내는 것은 내 전문이었지만, 성령이라는 존재는 내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었다.
내게 주어진 증거물 역시 메시앙이라는 인간 작곡가가 제시한 몇 개의 음표가 전부다.
이 정도의 근거로 성령을 표현하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연주자의 한계를 조금만 넘으면 그 초월적인 존재에도 조금은 손이 닿을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했다.
지금 있는 공간도, 듣고 있는 청중들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음악 자체의 최종적인 목적지를 향하는 길을 찾아낸 기분.
연습 중에 그런 기분을 느낀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었었다.
보통 사람들이 절대 이해하지 못할 지점에 가까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찔한 괴리감. 이 선을 넘어서면 돌이키기 어려울 것이란 섬뜩함이 날 제지했다.
하지만 세연과 틀어진 후, 난 다시 거기에 손을 뻗고 있었다.
아마 클로에가 다시 한번 날 돌아보게 해 주지 않았다면…… 난 이 자리에서 정말 멈추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괜찮아.’
다행히 지금 난 안정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음악을 완성시킬 자신이 있다.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성령을 표현하면서 난 여러 사람을 떠올렸다.
지금은 세연이 이 음악을 들어주길 바라고 있었으니 그녀가 내 아기 예수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녀의 존재에 내가 얼마나 놀라고 감동하고 있는가. 축복하고 기뻐하며 행복을 기원하고 싶었다.
난 그 감정을 음악에 실어 보냈다. 성큼거리며 옥타브로 치솟는 화음은 감정을 한껏 증폭시키며 기쁨의 성령에 동조시켰다.
그러나 거기에 기쁨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묘하게 뒤틀리는 불협화음은 메시앙이 해석하는 성령이자 내 어두운 부분이기도 했다.
거대한 성령이 홀 안을 가득 채우고 사람들을 위압한다. 불과 기름 그리고 바람은 성령의 상징이다.
그 존재감은 신성함과 공포스러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살짝만 균형이 틀어지면 모두를 완전히 패닉에 빠트릴 수도 있었다.
난 집중력을 끌어 올려 그 균형을 잡는 데에 애쓰며 조금 더 절제된 소리로 성령을 진정시켰다. 그것은 내 자신을 진정시키는 것과도 같았다.
끝없이 타오를 것 같았던 성령의 시간이 지나가고, 텅 빈 들판으로 구름 사이로 비치는 한 줄기 빛이 펼쳐졌다.
신의 음성은 새소리와도 닮아 있었다.
***
아나스타샤는 멍하니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에 있던 세연과 레아도 말을 잊고 넋을 놓은 지 오래였다.
타티아나의 기량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처음 꺼낸 하이든부터 다른 피아니스트들과는 궤를 달리하더니 이어진 리스트와 라흐마니노프에 이르러선 정말 그녀만의 거대한 산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같은 나이의 피아니스트가 그만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건 그저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결과일 뿐이었다.
‘이 애는 어디까지…….’
일반적으로 피아니스트들은 자신이 마음껏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음악을 무대에 올리지 못한다.
그건 집에서 혼자 영유해야 할 부분이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최대한 잘 정제하고 가공한 음악을 멋지게 표현하는 것이 피아니스트의 일이었다. 항상 스스로를 잘 다듬는 타티아나는 그런 일을 무척 잘 해냈다.
그런 그녀가 친구들에게 미처 보여 줄 수 없는 부분들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 자체는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슬쩍 선을 넘으며 드러낸 음악은 단순히 충동적인 일탈의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소리의 압력과 날카로움이 숨을 막히게 한다.
거의 극한에 다다른 표현력은 텔레비전 너머로도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괴, 굉장하네.}
연주 중에 레아가 입을 연 것은 정신을 유지하고자 함이었다.
현장에 가 있었다면 아마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타티아나에게 사로잡혀 버렸을 것이다.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피아니스트로서 이성적인 분석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는 건 텔레비전을 통해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교를 쓰고 있는 건 아니야…….’
타티아나가 쓸 수 있는 기괴한 기술이 많다는 건 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런 것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음악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그건 클래식 연주자라는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한계에 다다라서도 그 완성도에 감탄할 뿐이지 이상하다고 느끼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보이려 하는 체면조차 내려놓고 한계를 부숴 버린 타티아나가 구사하는 음악은 일반적인 이해를 넘어서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완전히 광인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순간적으로 느낀 그 직감은 아나스타샤를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하지만 타티아나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않고 그 전에 아슬아슬하게 멈추었다. 어떤 경계를 넘어서면 안 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의 묘기였다.
초인적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된다.
성령을 표현하면서 거기에 깊게 관여하고 있는 피아니스트가 자신을 끝까지 몰아세우다가 멈추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아나스타샤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멍하니 메시앙이 제안하고 타티아나가 그리는 종교적 암시를 바라보던 아나스타샤는 그녀가 왜 멈출 수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곡의 제목은 기쁨의 성령의 시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는 기쁨의 성령의 격정을 표현한 곡이다.
거대하고 열광적인 성령은 언뜻 지상과 완전히 관계없는 초자연적인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기독교의 공리인 삼위일체에 의하면 신과 성령과 예수는 곧 하나였다.
자신의 행동의 결과가 아기 예수에게도 미치리라 생각한 성령은 절제하고 차분해질 수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슬쩍 옆을 보니 세연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집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오늘 타티아나와 살짝 다툰 것 같았고, 그래서 굉장히 신경 쓰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어쩌면 세연이 지금 훨씬 더 많은 걸 듣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아나스타샤의 감정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안도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문득 타티아나가 메에에 울던 모습을 떠올렸다. 한참이나 된 일이다.
그녀는 자신이 기억을 전부 잃어버렸다면서 별자리 운세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염소자리인 것을 알려 주자 울음소리를 냈다.
염소는 귀엽지. 아나스타샤는 그녀를 귀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염소는 곧 악마의 상징이기도 했다.
만약 그녀가 견디는 것에 지쳐서 타락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조차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