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8화
올리비에 메시앙은 현대 음악의 불모지인 한국에서도 꽤 인지도 있는 작곡가였다.
한국의 1세대 클래식 음악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정명훈 지휘자나 백건우 피아니스트 같은 이들이 메시앙의 음악을 들여와 연구한 덕분이었다.
그 계보 아래에서 공부하는 학생인 세연 역시 메시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피아니스트로서 메시앙은 연구할 거리가 정말 많은 작곡가였다.
그러나 세연은 콩쿠르 무대에 올릴 현대 음악 에튀드 레퍼토리에서 메시앙을 고르지 않고 리게티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메시앙은 지금 세연이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도 안 해 본 건 아니야.’
메시앙의 리듬은 단순히 악보에 적힌 대로 연주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클래식의 역사보다 훨씬 더 깊고 심오한 고대 그리스나 인도의 리듬이 그 근본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세연은 몇 번이고 다른 사람들의 연주를 들어 보며 그 리듬을 파악해 보고자 했지만 늘 어려움을 겪었다.
음색과 음향도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연습량을 늘려서 잘 외워지지도 않는 불협화음들을 간신히 손에 익힌다고 해도 자연스럽게 풀어내며 이미지를 그리는 것은 너무나 복잡한 일이었다.
게다가 세연은 무신론자로서 종교적 테마를 바탕으로 한 곡들은 영영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메시앙의 음악 전반엔 기독교적 상징이 내재되어 있다.
세연이 메시앙의 음악을 잘 연주하지 못한 데엔 기술적인 이유도 있지만 공부가 부족하여 음악 속 함의를 잘 이해하지 못한 이유도 컸다.
때문에 세연은 일찌감치 메시앙에 대해선 미뤄 두기로 결정했었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지금 가장 중요한 자리에서 메시앙의 곡을 꺼냈고, 지금까지 있었던 경합 전부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압도적이잖아.’
세연은 콩쿠르 전에 타티아나에게 어떤 곡을 연주할 거냐고 일부러 묻지 않았었다.
그 정도는 물어봐도 흔쾌히 답해 주겠지만, 그래도 콩쿠르를 앞두고 가급적 경쟁자라는 위치를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만약 세연이 연주하기 전 타티아나가 이 곡을 연주할 것이란 걸 알았다면 아마 분명히 무대에 영향이 갔을 것이다.
미리 듣기라도 했었다간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릴 뻔했다. 그 정도로 타티아나의 연주는 강렬하고 지배적이었다.
‘기쁨의 성령…….’
신성한 불꽃이 타오른다. 찬란한 광채를 바라보며 세연은 더욱 눈을 크게 떴다.
무대 위로 강림한 무언가는 어슬렁거리다가 고개를 숙이고 들기를 반복했다.
타티아나가 이런 존재들을 굉장히 잘 표현하는 걸 알면서도 이번엔 정말 격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신화적인 기적을 목도한 인간이 된 기분을 느낀 세연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세연은 지금 홀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텔레비전으로 무대를 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거리나 매체의 차이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타티아나의 음악은 분명하게 모든 청중들을 겨냥하여 울렸다.
그때, 성령이 세연을 돌아보았다.
「헉…….」
세연은 헛숨을 들이켜며 불꽃 속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이 음악이 실체를 느낄 정도로 강렬하더라도 무신론자인 자신은 이해의 한계가 있으니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타티아나의 음악은 종교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성큼 코앞으로 다가온 성령을 느끼며 세연은 양팔을 감쌌다. 온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이 사운드를 견디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타티아나의 음악에서 경이로움을 느끼는 건 이번뿐만이 아니다. 세연은 그녀의 음악이 곧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초인적인 퍼포먼스를 보면서도 눈을 돌리거나 멍하니 있지 않고 모든 집중력을 끌어모아서 제대로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그 결과 세연은 완벽하진 않아도 타티아나가 성취하고 있는 수준의 음악을 상당 부분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건 차원이 다르다.
지금까지 타티아나가 연주했던 건 그저 청중들이나 세연이 듣기 좋도록 알맞게 조절한 음악일 뿐이었다.
물론 그녀가 적당히 했다는 건 아니다. 음악을 듣기 좋게 조절하는 것에도 분명 뼈를 깎는 노력이 들어갈 테니까.
그녀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음악에서 무엇을 보여 주고 무엇을 숨겨야 할지 선별하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마치 빛 같은…….’
세연은 과학 시간에 배웠던 것을 떠올렸다.
빛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인식 밖에 있는 자외선, 적외선, X선 모두가 빛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눈은 그리 성능이 좋지 않아서 빨주노초파남보로 나누어지는 가시광선밖에 볼 수 없다.
타티아나는 지금까지 가시광선 영역만 증폭하여 연주에 담아내고 있었다.
그 섬세한 터치에서 피어나는 다채로운 이미지 표현력은 뭇 피아니스트들이 그토록 바라던 기적과도 다름없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진면목은 가시광선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그녀는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난 도저히 못 해.’
인식 밖의 무언가를 자유자재로 다루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온몸의 맥이 풀렸다.
타티아나는 특별했다. 특별한 데다가 노력가이기까지 했다. 세연은 박 교수가 왜 타티아나를 위험하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그녀가 선보이는 음악은 평범한 방식으로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음악의 신에게 영혼을 바치고 모든 인생을 쏟아부어야만 간신히 얻을 수 있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이 성령을 흉내 내는 것이 허락될 리 없으니까.
‘아…….’
성령은 여전히 세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엔 무섭게 느껴졌던 시선이 지금은 어딘가 약간 따뜻하게 느껴졌다.
희한한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세연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며 웃을 수 있게 되자 긴장도 조금 풀어졌다.
조금 더 똑바로 음악을 마주한 세연은 그제야 성령이 보내는 메시지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성령은 어떠한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그것을 느끼고 나자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냥 듣고 감상에 빠지는 것만으로도 한계에 다다를 지경이라 대답까지 궁리해서 되돌려 줄 여유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만약 한다고 해도 성령을 만족시킬 만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조금 무기력한 생각으로 앉아 있던 세연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지 궁금해져서 옆을 바라보았다.
‘왜 다행이라는 표정이야……?’
아나스타샤는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소파에 걸터앉은 채 한 손엔 과일을 찍어 먹던 포크를 그대로 들고 있었다.
그 모습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아마 초월적인 실력에 대한 경외 같은 걸 느꼈으리라. 세연은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째서 그녀가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해하던 세연은 다음으로 레아를 바라보고는 깨달았다.
평범한 사람에 속하는 레아는 타티아나의 연주를 듣고 굉장하다고 말했다.
물론 이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현대 음악의 사운드에 압도당한 듯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듣기에 그리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만약 타티아나가 정말로 자중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했다면 과연 레아가 이렇게 듣고만 있을 수 있었을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었다. 타티아나는 여전히 착하고 배려심이 깊었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것 같네…….’
오늘 박 교수와 함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을 때 타티아나는 무척 지쳐 보였고, 세연과의 관계에도 진저리 치는 것 같았다.
말로는 위한다고 하지만 강한 배척을 보이며 선을 그었다.
그러나 지금 타티아나는 무조건적으로 세연을 밀어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궁극적으로 향하고 있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 곡예를 필요로 하는 길인지 슬쩍 보여 주며 말릴 뿐이다.
세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박 교수가 타티아나를 위험하다고 한 건 진짜였다. 거기엔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다.
하지만 세연이 직접 겪어 본 타티아나는 피해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타티아나가 구사하는 음악은 가히 초인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중요한 건 타티아나가 아슬아슬하게 피아니스트로서 살아갈 수 있는 선을 분명하게 제시했다는 점이었다.
타티아나는 말이나 행동과는 정반대로 세연이 그녀를 따르길 은근히 바라곤 했다. 그 정도도 모를 정도로 눈치 없진 않았다.
‘정말로 어쩔 수 없나?’
세연은 조금 더 신중하게 음악에 집중했다.
성령을 넘어 신의 주제를 노래하는 타티아나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이 탈력감을 처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타티아나가 쇼팽을 연주했을 때도 세연은 그녀에게서 압도적인 실력 차를 느꼈다.
하지만 따라잡기 위해 애쓴 결과 지금은 타티아나에게 인정을 받고, 박 교수에겐 너무 위험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수준까지 왔다.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음악도 세연이 따라잡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무지에서 비롯된 공포와 무력을 제대로 마주하고 나니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비로소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았다.
고양감이 세연을 조금씩 들뜨게 만들었다.
***
이 곡엔 모데레modéré라는 지시가 정말 자주 등장한다.
절제하라는 의미로 주어지는 지시인데, 특히 성령과 신을 묘사할 때 메시앙은 계속해서 잊지 말라는 듯 모데레를 강조했다.
연주자가 절제를 잊고 음악에 심취해 버리면 인간이 들을 수 없는 곳까지 가 버린다는 것을 메시앙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 의견에 동의했으므로 메시앙의 지시를 잘 지켰다. 자신을 전부 쏟아 넣지 않고 절제하며 지켜보았다.
구름 뒤편의 신은 성령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다. 단지 구름 너머의 광채와 새소리 그리고 엄숙한 음성으로 그 존재를 드러낼 뿐이다.
신의 위엄과 권위는 절제 아래에서 더 견고해졌다. 난 이 해석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며 밀어붙였다.
다시 한번 지상의 성령이 노래하며 맴돌다가 불현듯 모두 한순간의 기적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두리번거리는 인간들,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어수선하게 들리다가 이윽고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고 다시 격렬한 춤이 이어졌다.
‘속도는 같지만 빠르게…….’
도입부와 같은 음향을 반복한다. 하지만 한 옥타브 높고 화음도 두 배다. 기적을 목도하고 도취된 격정이 느껴진다.
제시된 속도는 빠르지만 더 빠르게 느껴지도록 연주하는 건 꽤 정교한 표현력을 필요로 했다.
내 연구는 이 구간을 제대로 구사하는 데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끝으로 달려간다.
다시 한번 성령의 잔향과 거기에서 이어지는 현란한 아르페지오. 하지만 여전히 메시앙은 절제를 요구했다.
음악의 끝을 느끼자 점점 절제하기 어려워졌다. 그래도 난 신경을 집중하면서 끝까지 컨트롤을 놓지 않기 위해 애썼다.
‘거의 다 왔어.’
화려한 신성함으로 시작한 이 음악의 끝맺음은 기이할 정도로 익살스럽다.
마치 모든 것이 환영이었던 것처럼 없던 일로 하려는 듯한 느낌이다. 난 그 끝에서 순간적으로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것을 깨달았다.
파리에서 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이 음악을 재현하기 어렵게 마무리 지어야 했다. 난 충분히 할 수 있었고, 또 해야만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직감과 충동에 왼손이 충실하게 반응하여 위로 올라갔다. 그대로 내리쳐서 현을 끊어 놓으려는 순간, 난 이성을 되찾았다.
몸과 생각이 따로 놀면서 순간 삐끗했다. 어색하게 내리쳐진 내 왼손은 마무리 화음을 잘못 쳤고, 그건 나의 첫 번째 미스가 되었다.
‘아.’
마지막에 실수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대로 쳤어야지 이 곡을 제대로 완성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음악을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박아 넣을 수 있는 기회였지 않나? 아니면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미숙하다는 걸 뜻하나?
혼란스러운 머리가 잘 정리되지 않아서 난 왼손을 미처 들어 올리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몇 년 전, 시험을 쳤을 때 답안을 틀리게 고쳐 썼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난 내 자신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했었다. 이번에 틀린 음을 연주한 것도 갑자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소리가 사라지고 내 생각도 딱 멎었을 때 깜짝 놀라 펄쩍 뛸 정도로 폭발적인 소리가 오른편에서 터져 나왔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수백 명의 청중들이 내게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잘했어…….’
적어도 청중들은 내 연주를 즐겨 주었고, 지금 난 후회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은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