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9화
2시간 전만 하더라도 내가 상상하고 있던 풍경은 삭막하기만 했다.
난 메시앙의 종교적 주제가 담긴 음악을 도구로 사용해 사람들에게 불가해한 경외를 심어 줄 생각이었다.
그 생각대로 연주했다면 아마 연주를 다 마치고 나서도 찬사를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혼란이 해소될 즈음엔 몇몇 음악가를 중심으로 한 지탄을 받았겠지. 음악을 왜곡하여 모독한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아마 더 강하게 비난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의 신을 그렇게 표현하는 건 참을 수 없겠지. 하지만 난 한 번쯤은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신을 비꼬아 보고 싶었다.
‘난…….’
처음 이 곡을 듣자마자 내가 이걸 습득하여 휘두른다면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고, 주저 없이 내 콩쿠르 첫 무대 자유곡으로 삼았다.
그건 날 보고 있는 세연이나 같이 참가한 아나스타샤 그리고 연주자로서 내게 많은 걸 맡긴 에르네스트, 어딘가에서 내가 후회 없이 피아노 앞에 서길 바라는 여러 사람의 바람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 오래된 욕망을 채우기 위한 선택이었다.
신은 내게 마치 와 보라는 듯 세연과 교수님을 보내 날 뒤흔들었다.
그 도발에 거의 응할 뻔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난 피아노 연주자로 남는 걸 택했다.
이건 약간의 도박이기도 했다. 상황에 스스로를 던져 놓고 진심을 깨달아 보는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내가 후회한다면 이후 연주자로서 사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돌이켜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내가 다시 한번 마음속 깊은 진심을 떠올려 보았을 때 거기에 후회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약간의 의아함과 잔잔한 안도감 그리고 온몸에 파고드는 성취감뿐이었다.
“잘했어…….”
다시 한번 내 자신을 칭찬했다. 마치 거기에 동조하듯 끝나지 않는 박수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고 또 울리며 공명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등 뒤를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박수 소리를 느끼며 연주자 대기실로 돌아오니 대기실 직원이 분주하게 무언가 하더니 나와 눈이 딱 마주치자 멈춰 섰다.
굉장히 이상한 분위기였다. 직원의 눈이 뭔가 위험해 보였다. 피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가 갑자기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피아노 없는 내겐 아무 힘도 없다.
조금 무서워져서 뒷걸음질을 치려 했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는 내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대체 뭔지 말 좀 해 달라고 하려는 찰나, 그가 갑자기 자기 유니폼 상의 아래를 양손으로 잡고 들췄다.
기겁한 내가 거의 소리를 지르기 직전, 그가 말했다.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베르체노바 씨.}
{……예? 어…….}
{아무리 찾아봐도 사인을 받을 만한 물건이 없어서……. 그냥 여기에 빠르게 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직원은 자기 유니폼 상의를 팽팽하게 당겼다.
난 한숨을 내쉬었다. 사인 정도야 이렇게 필사적으로 부탁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그가 내민 마커를 쥐고 허리를 살짝 숙였다.
옷 위에 사인을 해 보는 건 처음이지만, 만약 실수하면 직원이 유니폼을 버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집중하자 깔끔하게 잘 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다 사인을 해 버리면 뭘 입고 일할 생각이지……?’
뒤늦게 의문이 들었지만 거울을 보며 행복해하는 직원을 보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긴 직원은 그 후 자신이 할 일을 떠올렸는지 약간 사무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연주 수고 많으셨습니다. 결과는 30분쯤 후에 전체적으로 공개될 예정입니다. 그러니 그때까진 이곳을 떠나지 말아 주세요.}
{예, 기다릴게요.}
{혹 불편하시면 그사이 편한 의복으로 갈아입고 기다리셔도 괜찮습니다.}
30분 동안 무엇을 할지는 내 자유인가 보다.
난 잠시 생각하며 거울을 보았다. 라벤더색의 이 드레스는 디자이너인 아델리나가 신경 써서 만들어 준 드레스다.
만약 내가 다음 라운드로 갈 수 있게 된다면 그 순간 이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이 그녀에게도 조금이나마 보답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냥 잠시 쉬고 싶어요. 친구들도 아마 곧 결과를 보러 올 것 같고요.}
{그럼 담당 직원을 불러 드리죠.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여기서요? 왜요?}
루트거에게 무언가 들어야 할 것이 있나 싶어 물어보니 직원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혼자 밖에 나가시면 다섯 걸음도 못 가서 기자들과 사람들에게 붙잡히실 겁니다. 일단 오늘 사람들을 상대하는 모든 건 담당 직원을 통해 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그러면서 직원은 대기실 문밖에 귀를 기울여 보라는 듯 눈짓했다.
그의 말대로 밖에선 사람들의 인기척이 잔뜩 들렸다. 나가자마자 질문 세례를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살짝 피곤하다는 기분도 든다. 하지만 지금 내게 잔뜩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나 역시 거기에 볼일이 있었다.
결정을 내린 나는 루트거를 부르는 대신 웃었다.
{저분들은 제게 묻고 싶은 것이 많겠죠?}
{예, 아마 정신없으실…….}
{괜찮아요. 저도 듣고 싶은 게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문 쪽으로 향하자 직원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말리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보안상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옆에 있어 주겠다고 했다. 난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밖으로 나섰다.
나는 문을 열자마자 많은 시선과 맞닥뜨려야 했다.
사람의 시선뿐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반짝이는 카메라 렌즈가 내 쪽으로 향하고, 사람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직원이 경고한 것처럼 다섯 걸음도 못 가진 않았다. 일곱 걸음까진 걸을 수 있었으니까.
『베르체노바 양! □□ □□□ □□□□□!?』
『□□ □ □□□□□!』
알 수 없는 언어들이 마구 울린다. 어느새 빅토르도 내 옆에 와 있었다.
난 그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빅토르는 내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난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충 봐도 20명이 넘었다. 직
원과 빅토르가 막아 주긴 하겠지만 혹시 그들이 더 다가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마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들은 일정 거리 안으로 더 접근하지 않았다.
양해를 구하고 비켜 달라고 하면 순순히 비켜 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난 이 사람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인터뷰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영어나 러시아어라면 가능해요. 하지만 시간은 10분 정도밖에 못 드릴 것 같아요.}
내게 남은 시간은 30분. 하지만 그사이 아나스타샤가 홀로 돌아온다면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니 30분 전부를 기자들에게 줄 순 없다.
기자들은 서로 웅성거리며 의견을 나누었다. 난 그들에게 선택권을 다 주지 않고 웃으며 정리했다.
{짧아도 괜찮다면 순서대로 답변드려도 될까요?}
내 한마디에 그대로 모든 것이 결정된 것처럼 맨 앞쪽에 있던 기자부터 입을 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베르체노바 양. 드 스탄다르드de standaard의 클레망입니다.}
내 소개를 다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수첩에 무언가 빠르게 휘갈겨 쓰면서 물었다.
{오늘 연주하신 곡들은 정말 완성도가 뛰어났습니다. 본래 연주하시던 곡입니까? 아니면 이번 콩쿠르를 위해 새로 준비하셨습니까? 준비하신 기간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실 수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콩쿠르 준비에 나름 극적인 스토리 같은 것이 있다면 재미있겠지만, 내겐 그런 것이 없었기에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하이든과 리스트 라흐마니노프는 자신 있는 레퍼토리 안에서 골랐어요. 메시앙은 따로…… 3개월 쯤 준비한 것 같아요.}
{3개월!}
『□□□ □□ □□□?』
하지만 내 대답만으로도 충분했는지 다시 여기저기서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난 거기에 우쭐거리거나 하지 않고 조용히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르 피가로le figaro에서 왔습니다. 질문드립니다. 메시앙의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 개의 시선…… 이 곡을 고르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특별한 이유라면 물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해선 이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열일곱 살짜리가 신에게 의문을 품었다고 말해 봐야 누가 진지하게 듣겠는가?
사실 다른 사람이 진지하게 듣든 말든 내 생각을 있는 대로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도 곡이 받쳐 주어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은 정상적으로 연주한 상황이었으니 내 대답 역시 정상이어야만 했다.
{제 이해와 공감대로 이 곡을 연주했을 때……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평가라고 말하긴 했지만 내가 궁금한 건 사람들의 순수하고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지금도 난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기자들의 얼굴과 반응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거기에 날 위험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도 그렇게 느껴지는지 붙잡고 이야기해 볼 생각이었다.
그중 뒤편에 있던 한 기자가 물었다.
{러시아에서 앙팡 테리블이란 별명으로도 불리신다고 들었습니다. 프랑스어로 무서운 아이라는 뜻인데, 그 별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게 과분한 별명이죠.}
혹시 내 음악에서 무언가 읽어 낸 사람인가 싶어서 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엔 열정적인 취재 의지밖에 없었다. 앙팡 테리블은 그저 관용적인 표현으로 쓴 것 같았다.
{전 베르체노바 양에게 그런 별명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오늘 연주를 보고 나니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베르체노바 양만큼 그 별명이 어울리는 피아니스트도 없다는 것을.}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명이나 명성 같은 것엔 그리 큰 관심이 없지만, 내 성공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도 무시해선 안 될 중요한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이슈가 되는 것도 내가 클래식 음악계에 공헌하는 방법 중 하나일 테니까.
그렇게 몇몇 기자의 질의응답에 응했다. 기자들은 모두 정중하고 조심스러웠다. 덕분에 나 역시 친절하게 그들을 대할 수 있었다.
사진을 얼마나 찍혔는지, 몇 개나 되는 질문을 받았는지 슬슬 세기 어려워질 즈음이었다.
{BBC의 오스카입니다.}
한참 동안 날 관찰하기만 하던 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사진만 찍어 가려나 싶었는데 큰 언론사에서 온 기자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기쁨의 성령의 시선……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연주하시다가 마지막에 실수하셨죠?}
{……예.}
내 실수에 대해 처음으로 나온 질문이다.
아마 대부분 사람들이 내 실수를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선법으로 이루어진 불협화음에서 올바른 음을 찾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다른 레퍼런스를 들어 보지 않은 한 차이점을 알긴 쉽지 않다.
아마 이 오스카라는 기자는 이 곡을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고, 귀도 좋은 것 같았다.
난 조금 기분이 좋아져서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정말로 내가 실수한 게 맞냐고 서로 확인하는 목소리들이었다.
확신을 가지고 있는 건 아마 여기서 오스카 1명뿐인 것 같았다.
그는 단순히 내 실수를 지적하려고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진중하게 그가 물었다.
{손에 힘이 풀리신 겁니까? 아니면 일부러 어떤 의미라도…….}
대답하기 까다로웠다. 단순 실수라고 하는 건 거짓말이 되고, 의도가 있었다고 하는 건 콩쿠르를 우습게 보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솔직히 난 내가 곡을 마무리 지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생각을 경솔하게 그냥 이야기했다간 큰 실수가 될 것 같았다.
적당히 말을 삼가려 할 때, 다른 기자가 갑자기 농담조로 받아쳤다.
{하하핫, 그것도 인간미 아니겠습니까?}
순식간에 웃음소리가 퍼져 나가고 그 농담에 동조한 다른 기자들도 거들었다.
{정말 그렇군요!}
{그 인간미 있는 마무리가 결과적으로 곡의 완성도를 더 끌어 올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난 껄껄 웃는 기자들을 보며 조금 놀랐다. 설마 실수에서 인간미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만약 내가 마지막에 연주자로서의 반사에 따라 현을 끊어 놓았다면 무슨 말을 들었을까. 내겐 그게 더 쉬운 일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저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나스타샤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캐주얼한 복장으로도 눈에 확 띄었다. 그리고 그녀 옆엔 레아와 세연도 와 있었다.
난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질문은 여기까지 받아도 괜찮을까요?}
{아, 저희는 괜찮습니다.}
{저희도.}
{감사했습니다.}
{나중에 따로 더 인터뷰를 요청드려도 되겠습니까?}
아쉬워하는 사람도 몇 있었지만 내가 가능하다면 그리 하겠다고 답하자 모두 생각보다 쉽게 납득하곤 물러가 주었다.
난 20명의 기자들을 상대하면서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지만, 저기 있는 친구들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조금 난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