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0화
내가 다가가자 기자들이 따라붙을 걸 생각했는지 친구들은 일부러 조금 더 으슥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난 얌전히 그 뒤를 따라갔다.
‘샤르베가에서 같이 있었구나…….’
같이 움직이는 세 사람을 보면서 난 세연과 아나스타샤, 레아가 이곳에서 만난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카페에서 헤어진 후에 세연은 바로 아나스타샤와 만나서 샤르베가에 갔었던 모양이다.
조금 안심되었다. 만약 세연이 자기 호스트 패밀리로 돌아갔거나 이 근처에서 혼자 있었다면 아마 혼자서 마음고생을 상당히 많이 했을 것이다.
난 마지막에 세연에게 모질게 말할 수밖에 없었지만…… 계속해서 마음 한편엔 미안함이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 주었을 거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같이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세연은 입이 그리 가벼운 편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아나스타샤에겐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대략적으로 이야기했을 것 같았다.
궁금해하면서 복도 모퉁이를 돌았을 때, 난 바로 옆에 있는 세 사람과 마주하곤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거세게 뛰는 심장을 누르며 바라보자 레아가 제일 먼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타티아나!”
그녀는 내 양손을 감싸더니 감탄을 연발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너 정말 엄청난 피아니스트였구나? 소름 돋을 정도로 잘하더라.”
“고마워요, 레아.”
“특히 마지막에 했었던 곡 말이야. 그런 건 처음 들어 봤어.”
일반적으론 전위적인 수준까지 간 곡들이 마치 현대 음악의 대표인 것처럼 알려지곤 하니 이렇게 모호한 경계에 있는 음악을 들어 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레아는 자신이 예전에도 클래식은 종종 듣는 편이었지만 자신의 편견이 부숴진 느낌이라면서 행복하게 재잘거렸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지만 이렇게 내 음악이 좋았다면서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청중을 앞에 두면 마음이 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난 기쁜 마음으로 웃으며 말했다.
“즐겁게 들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내가 자제력을 잃었다면 레아에게 이런 감상을 들을 수 없었겠지.
한참을 이야기하던 레아는 왜 자기만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뒤편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도 할 말 있지 않았어?”
우리가 경쟁자라는 건 지금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음악가로서 서로의 음악에 대해 진지한 감상을 주고받는 건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레아는 어떤 일이 더 중요한지 정확하게 따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레아는 러시아어로 대화하고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먼저 나선 건 세연이었다.
세연은 잠시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두 눈엔 반짝이는 빛이 담겨 있었지만 내 강한 거절에 상처받았던 기색이 역력했다. 그 눈빛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이번에도 먼저 용기를 낸 건 세연이었다. 그녀는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물었다.
{포옹해도 돼?}
이 조심스러운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겠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세연은 가까이 다가오더니 날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확 느껴졌다.
내 왼편으로 고개를 내민 세연은 귓가에 속삭였다.
{미안해.}
{예?}
{사과하고 싶었어.}
무슨 말인가 싶어 가만히 있자 그녀가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정말 미안해……. 아까…… 그냥 보내서.}
카페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였다.
절대 상처 같은 걸 줘선 안 될 사람들을 일부러 더 매몰차게 대하고 나와 버린 건 나인데, 어째서인지 사과는 세연이 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내가 억지로라도 붙잡았어야 했는데. 네가 이렇게 혼자 고민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말해 줬어야 했는데.}
자신이 조금 더 고집부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던 세연은 떨고 있는 속내를 내비쳤다.
{무섭더라고. 네가 날 더 미워하게 될까 봐.}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세연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난 처음부터 그녀를 차갑게 대했고, 지금도 사실 허물없는 친구로 대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려웠으니까.
문제는 그녀를 이렇게 대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에게 있었지만, 세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시 확실하게 말해 주는 것뿐이었다.
{전 세연을 미워하지 않아요.}
{응. 알아.}
{한 번도 그런 적 없어요.}
{이젠 알아.}
그런데 내가 말로 하기 전에 이미 다 깨달았다는 듯 세연은 웃으며 말했다.
우린 포옹을 살짝 풀고 떨어졌다. 세연은 내 양팔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언제라도 다시 끌어안을 수 있는 거리에서 그녀가 말했다.
{네가 지키고 있던 선의 윤곽을 봤어.}
{예.}
{그리고……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나도 그 선 밖으로 나가지 않게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더라고.}
세연이 지닌 음악성은 나와 무척 닮아 있다. 기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실현하는 것들은 대부분 세연도 노력하여 해낼 수 있다고 봐야 했다.
그녀는 한참 전부터 확신을 가지고 날 따라오고 있었다.
이번에 연주한 메시앙의 곡은 난이도가 무척 높긴 하지만 솔직히 세연이 하지 못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때문에 난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
{웃기지 않아요.}
내 확고한 대답에 세연은 배시시 웃더니 이어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어떻게 네가 그런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건지…… 그리고 어떻게 내가 그걸 따를 수 있는 건지.}
{…….}
{원래는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그치?}
음악가들이라고 하여 그 어떤 레퍼런스라도 들은 그대로 따라 연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음악성의 파장이 맞아야 한다.
그 파장이 다르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린 그 파장이 흡사하니까 그녀는 내 음악에서 설득력과 매력을 느끼고 다른 연주자들보다 훨씬 쉽게 따라올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엔 무턱대고 따르던 세연도 이젠 그 사실을 서서히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날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긴 하지만…….
세연은 솔직하게 대답해 달라는 듯 물었다.
{그런데 너나 교수님의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여요.}
{레아가 놀라는데?}
{전 제가 느낀 그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나스타샤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레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내 연주를 매우 높게 평가한 그녀는 세연이 더 잘할 수 있다는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불안과 집착 등 문제가 많은 나와 달리 세연은 훨씬 더 건전하게 실력을 쌓아 올릴 수 있다.
아마 그녀의 피아니즘은 내 것보다 훨씬 견고하리라.
그런 예감을 느끼며 웃자 세연은 마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젠 다 알겠다는 듯 마주 미소 지었다.
{나도 내가 느낀 그대로 이야기하자면…… 네가 미처 내지 못한 답을 내가 내 보고 싶어졌어.}
{답…… 말씀이신가요.}
{응. 혹시 마지막에 뭐 하려고 했었어?}
평소 같았으면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세연에게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난 조용히 말했다.
{현을 끊으려고 했어요.}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거야?}
세연은 황당해했지만 내가 쓸데없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본능은 그게 옳은 마무리라고 판단했단 거네. 아마 네가 그렇게 끝냈으면 음악사에 깊게 남았을 거야.}
그랬을지도 모르지.
파리에서도 내 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아무 생각 없이 내가 본능대로 밀고 나갔다면…… 확실히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되는 데엔 성공했으리라.
하지만 내 목적은 그런 것에 있지 않다. 내가 죽어도 내 음악은 사람들 사이에 남는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연주자가 어떻게 영생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었다.
난 사람들에게 어떤 음악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신중하게 생각했다.
물론 아직 확실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피아노 현을 끊어 마무리하는 연주자로만 기억되긴 싫었다.
조용히 바라보자 세연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접었고, 다른 답을 내지 못해서 삐끗했지.}
{맞아요.}
아직 부족한 나는 현을 끊는 것 외의 적당한 마무리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
수없이 연습할 때 익혔던 모든 마무리들이 적절하지 않게 느껴졌고, 그 순간 신경이 굳어 버린 것이다.
아직 세연은 내가 어떻게 피아노를 대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예전보다 조금 더 이해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녀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같이 생각해 보자, 그거.}
세연은 머뭇거리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게서 어떠한 동기나 레퍼런스를 얻는 것처럼 나 역시 그녀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 확실하게 믿는 듯했다.
난 자신 있는 그녀를 보며 기뻐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네…….”
“그러게.”
그런 우리 이야기를 듣던 레아와 아나스타샤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 이 두 사람에게 세연과 내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이미 내 음악에서 꽤 많은 걸 파악한 듯한 눈빛이었다.
세연이 날 놓아주고 물러나자 이번엔 아나스타샤가 불쑥 다가왔다.
어쩐지 그녀에게 혼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항상 있는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익숙해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타티아나.”
“예…….”
“염소처럼 울어 볼래?”
“……예?”
그런데 갑자기 아나스타샤가 꺼낸 말은 정말 엉뚱했다. 영어와 러시아어를 번갈아 말하다 보니 내 언어 능력에 문제가 생겼나 싶다.
뭔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되물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했다.
“메에에 하고 말이야.”
“가,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아나스타샤.”
“그냥 해 봐.”
이렇게 강압적으로 요구하면 거절하기도 어렵다. 난 황당하고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그녀의 말에 따랐다.
“……메에에?”
“장난치지 말고. 좀 더 진지하게.”
“제가 뭐 잘못이라도 했나요? 왜 창피하게…….”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옆을 보니 방금 전까지 내가 어딜 가든 무조건 따라 줄 것 같던 세연이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연주를 극찬하던 레아도 마찬가지였다.
창피함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왜 이런 벌칙 같은 걸 수행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제발 봐 달라는 표정으로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녀는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염소 울음소리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걸 확인하고 싶어 했다.
“메에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울고 나니 결국 참지 못한 세연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난 괜히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날 부끄럽게 만들어 놓은 아나스타샤는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평했다.
“소리가 탁해지진 않았네.”
“대체 뭐예요? 저 진짜 화내요?”
“아, 맞아. 결과 보기 전에 뭐 좀 마실래? 나 목말라.”
“아나스타샤!”
이렇게 화가 난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난 진지하게 따졌지만 아나스타샤는 대놓고 요리조리 빠져나가기만 했다.
난 결국 이번에도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화내며 쫓고 세연과 레아의 웃음소리를 듣는 사이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