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1화
장난을 치는 아나스타샤를 따라 같이 휴게실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사이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콩쿠르 참가자들과 호스트 패밀리 식구들이었다.
양지은과 이연주를 발견한 세연은 잠시 그쪽에 가서 인사 좀 하겠다며 떠났고, 아나스타샤도 레아와 함께 잠시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혼자가 된 건 아니었다.
내 근처에 있던 연주자들이 내게 관심을 보이며 인사를 건넸기 때문이다.
난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고 서로 좋은 결과가 있길 기원했다.
“너무 잘했어! 타티아나!”
데보라 아주머니는 파스칼 아저씨와 함께 오셨다.
결과를 보고 진출이든 탈락이든 함께해 줄 수 있는 사람이 1명이라도 더 옆에 있으니 무척 든든했다.
“내일은 하루 쉴 수 있겠니? 같이 외식이라도 하는 건 어때?”
그런데 아주머니는 이미 내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처럼 하고 계셔서 조금 부담스러웠다.
이미 여러 사람이 아주머니와 비슷하게 반응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난 결과를 받아 본 다음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온 나는 쉽게 안심 같은 걸 할 수 없었다.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이긴 싫어서 적절하게 분위기를 맞춰 주고 있는데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처음엔 프랑스어, 그다음 네덜란드어와 영어 순서였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1라운드 심사 결과 발표가 있을 예정이오니 관계자 여러분께서는 스튜디오4로 와 주시길 바랍니다.}
휴게실과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안내에 따라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연주자들은 연주자들끼리 뭉치게 되었다.
난 다시 세연과 아나스타샤 그리고 다른 연주자들과 합류했다.
스튜디오4로 들어선 사람들은 언뜻 100명도 넘었지만 참가자만 73명이란 걸 생각하면 사실 조금 적은 숫자였다.
결과를 굳이 현장에 와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각자 원하는 자리에 듬성듬성 앉을 수 있었다.
데보라 아주머니는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우린 뒤쪽에 앉아 있을게.”
그냥 앞쪽에 계셔도 상관없을 텐데, 아주머니는 아저씨를 이끌고 뒤편으로 갔다.
카메라와 조명을 연주자들이 제대로 받길 바라시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난 적당히 중간쯤 되는 위치에 앉았고, 내 바로 옆에 아나스타샤와 세연이 나란히 앉았다.
다른 연주자들도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잠시 후, 홀 안을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게 되자 무대로 심사 위원들이 올라왔다.
12명 전원은 아니었고 대표로 몇 명만 무대에 선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심사 위원장이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쥐었다.
그가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갈아 말해서 알아듣는 데엔 문제는 없었다.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전 심사 위원장 테오도르 블랑입니다.}
테오도르는 음악가이자 교육자로서 명성이 드높은 사람이었다.
70대 노인이었지만 그 자세와 목소리에서 강단이 느껴졌다.
어떤 심사를 하든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용한 홀을 향해 테오도르가 이어 말했다.
{각국에서 찾아와 지난 6일간 치열하게 실력을 보여 주신 73명의 참가자 모두 자랑스러운 피아니스트들이었습니다. 이 모두와 다음 라운드에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무척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약간의 피로감이 묻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1시가 넘는 늦은 시간까지 선별에 고심한 것이 보였다.
이 자리의 모두가 이제 그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운명이 결정될 시간이었다.
긴장된 엄숙함이 홀을 무겁게 내리누른다.
그 위로 테오도르가 첫 번째 진출자를 발표했다.
{다음 라운드에 출전이 확정된 24명의 명단을 부르겠습니다. 미국, 앤서니 마셜.}
단순히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는 것뿐이니 시상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명단을 부르고 잠시 박수를 받는 시간이 있을 뿐이다.
우린 가볍게 박수를 쳤고 앤서니는 잠시 일어나선 고개를 숙여 거기에 응했다.
이런 건 익숙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다음 비슷한 리듬으로 계속 이름들이 불렸다.
똑같이 일어나서 짧은 박수를 받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불리는 이름 중엔 내가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러시아, 렌스키 로마노비치 비소스키.}
러시아 출신 중에 처음으로 불린 건 렌스키였다.
난 그의 연주를 떠올렸다.
젊은 나이지만 잔뼈 굵은 베테랑으로서 이름값에 걸맞은 멋진 연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정도면 충분히 24명 안에 들 자격이 있었다.
박수를 보내고 있자 옆에서 세연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너 저 사람 싫어한다고 했었지?}
{예.}
{단호하네. 그런데 박수는 왜……?}
{이건 별개죠.}
내가 개인적으로 그를 안 좋아한다고 해서 이런 콩쿠르에서 실력 발휘도 못하고 떨어지라고 저주하진 않는다.
싫어하는 건 싫어하는 거고 잘한 건 잘했다고 축하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양립이 불가능한 사람이 있기도 하겠지만, 난 가능했다.
다음으로 불린 건 한국의 연주자였다.
{한국, 이연주.}
우리 좌석에서 두 칸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이연주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깜짝 놀라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너무 기뻐서 어찌할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이어서 연속으로 한국의 연주자가 또 불렸다.
{한국, 임세연.}
충분히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이렇게 확정이 되고 나니 안도감이 들었다.
난 세연에게도 박수를 보냈다.
{축하해요.}
「축하해. 세연아.」
다른 한국 연주자들도 모두 세연을 칭찬했다.
가장 어린 참가자로서 이렇게 1라운드에 통과한 것을 굉장히 기특하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세연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그렇게 10명 정도의 이름이 지나갔다.
슬슬 24명의 절반 정도가 결정되고 나니 점점 분위기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호명되고 박수를 보내는 과정은 똑같았지만 약간 서로 눈치를 보는 듯했다.
난 그 속에서 차분해지려 애쓰며 기다렸다.
내가 잘했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순서는 별 상관 없다.
난 어떤 결과가 나오든 후회하지 않고 받아들일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 다행스럽게도 나보다 아나스타샤가 먼저 진출을 확정지었다.
{러시아,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바로 탈락은 면했네.”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나스타샤의 기교는 다른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정말 압도적이었다.
어지간해선 떨어뜨릴 이유가 없었으리라.
세연도 거기에 한마디 거들었다.
{귀하디귀한 알캉 연주자를 떨어뜨릴 리 없지. 축하해, 아나스타샤.}
{고마워.}
세연과 아나스타샤가 둘 다 진출한 덕분인지 내 주변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고 좋았다.
모두 다음에도 열심히 잘해 보자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사이에서 나만 아직 호명되지 않았다.
‘지금 몇 명째지……?’
{아르헨티나, 알레한드로 페테르손.}
알레한드로까지 불렸다. 이걸로 대충 20명 정도가 된다.
앞으로 정말 몇 명 남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덩달아 아나스타샤나 세연의 분위기도 가라앉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우리가 긴장하는 것은 심사 위원장의 호명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이전과 똑같은 리듬으로 테오도르는 연주자들을 호명해 나갔고 난 멍하니 박수를 쳤다.
{마지막으로…….}
어라……?
벌써 마지막인가? 이대로 다른 사람이 되면 어쩌지?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다고 하지만 갑자기 이런 상황에 놓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자유곡으로 현대 음악을 가지고 나온 게 별로 좋지 않았나? 역시 미하일 선생님의 말을 들을 걸 그랬나?
온갖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찰나, 테오도르가 말을 맺었다.
{러시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이상 24명입니다.}
그제야 난 숨도 못 쉬고 있었다는 걸 깨닫곤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콩쿠르 결과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말은 그래도 내 마음은 역시 이곳에서 좋은 결과를 얻길 바라고 있었다.
내 진출에 대한 반응은 어쩐지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더 컸다.
마지막으로 연주한 내가 아무래도 기억에 남은 모양이다.
{역시 네가 떨어지는 건 말이 안 되지!}
{축하해!}
여전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꾹 누르며 난 간신히 한숨을 토해 냈다.
“떨어진 줄…….”
“마지막 순서였어서 그런가? 부르는 기준을 모르겠네.”
아나스타샤는 뭘 그런 걸 가지고 걱정했냐는 듯 웃었지만 그녀도 내 이름이 나오기 전까진 상당히 긴장했었다.
세연은 당장 일어나 손을 잡고 춤이라도 출 기세로 말했다.
{우리 셋 다 진출했네!?}
73명이나 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24명 안에 들었다는 건 굉장한 쾌거였다.
충분히 웃으며 자축할 만했다.
{3명 중 2명이 떨어져야 하는 확률이었는데 말이야. 정말 잘됐어!}
{그래, 잘됐지.}
그러나 우리가 모두 진출했다는 건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탈락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내 이름이 불리고 난 뒤 난 많은 축하를 받았지만, 그만큼 곳곳에서 절망의 한숨이 쏟아졌다. 거기엔 내가 아는 사람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약간 안타깝고 신경도 쓰인다.
하지만 콩쿠르에선 서로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에티켓이었다.
테오도르 심사 위원장은 약간의 위로를 담아 말했다.
{혹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셨더라도 앞으로도 다른 곳에서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확실하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1라운드가 마무리되었다.
심사 결과를 발표한 테오도르가 뒤로 물러서고, 다음으로 다른 심사 위원이 마이크를 잡고는 간단한 일정을 설명해 주었다.
다음 라운드인 준결승은 모레인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6일간 진행된다.
이번엔 사람이 확 줄어든 만큼 훨씬 더 집중적인 경합이 치러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뽑히는 것은 절반인 12명이었다.
우린 서로를 돌아보았다. 12명 안에 모두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 하지만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서로를 신경 쓸 틈도 없을 정도로 각자 최선을 다해야만 할 것이다.
눈빛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우린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슬슬 일어나자.}
{그래요.}
아나스타샤의 제안에 우린 일어나 홀 밖으로 향했다.
이미 홀 밖 복도엔 여러 사람이 얽혀 있었다. 결과에 흥분하거나 실망한 사람들의 상반된 분위기가 콩쿠르의 무서움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딱히 무언가 할 필요는 없었다. 괜한 짓 말고 그냥 친구들과 함께 돌아가는 게 가장 좋았다.
하지만 이미 친분이 생긴 양지은 등에겐 잠깐이나마 인사를 하고 싶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타이밍을 보고 있을 때였다.
{베르체노바 양.}
놀라서 돌아보니 데이버 바리시치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다음 라운드에 가지 못하고 탈락했다.
난 그를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지 몰라 조금 머뭇거렸다. 데이버는 그런 내 마음을 알겠다는 듯 피식 웃더니 다가왔다.
{다음 라운드 진출 축하드립니다. 당연히 그럴 만한 멋진 무대였어요.}
{고마워요, 바리시치 씨. 당신은…….}
{제 이야기는 굳이 안 하셔도 됩니다. 솔직히 좀 창피하거든요.}
{……예?}
뭔가 약간 분위기가 다르다. 예전의 그는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훨씬 더 솔직담백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전보다 대하기도 더 편했다. 난 그를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그냥 똑바로 마주했다. 마음에 든다는 듯 그가 웃었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그…… 뭔가요?}
{사인 한 장 해 주시죠. 제가 사인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서요.}
이 상황에?
처음 환영 파티장에서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수집품들을 보여 주기도 했었다. 게임에서 이긴 나와 세연에게 나중에 자신의 수집품을 주겠다고도 했고.
그건 좋은데…… 정말 아무 사인이나 다 모으는 건가?
조금 주저하자 데이버가 재차 물었다.
{안 됩니까?}
{예? 아뇨, 돼요. 사인 수집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그런데…….}
이걸 물어봐도 되나 안 되나 판단이 잘 안 되었지만 지금의 데이버라면 솔직하게 대답해 줄 것 같아서 물어보았다.
{그럼 처음 만났을 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데이버는 뚱하니 날 바라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바로 그럽니까? 저도 피아니스트인데. 자존심이 있지.}
아차 싶었다. 환영 파티장에서도 우린 경쟁자였다. 그가 내게 흥미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인 같은 걸 부탁할 순 없었던 것이다.
그건 상당히 상식적이고 납득 가능한 피아노 연주자의 행동이었다. 데이버는 그리 이상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승낙하자 데이버는 기다렸다는 듯 사인지와 펜을 꺼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사인을 했지만 이렇게 고급진 사인지는 처음이었다.
실수하지 않게 심혈을 기울여 사인을 해 주자 데이버는 내 글씨를 보더니 흡족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글씨를 정말 잘 쓰시는군요. 다음에 만날 땐 조금 더 편하게 말해도 됩니까?}
{……?}
{허락한 걸로 알게, 타티아나.}
어이없어하는 사이 그는 손을 살랑 흔들고는 다시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 버렸다.
내가 잠깐 사람을 잘못 본 것 같다. 데이버는 확실히 이상한 사람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