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62화 (1,162/1,277)

##  1162화

작곡을 위해 한 달 넘게 갇혀 있으면서 에르네스트는 이곳에 상당히 익숙해졌다.

고급스러운 시설과 무제한으로 보장되는 자유로운 시간, 필요한 물건들도 원하는 만큼 제공되고 건강과 팔 부상 관리를 위한 의사도 늘 상주 중이다.

밖으로 나갈 수 없고 통신이 단절되었을 뿐이지 생활 자체는 완벽하게 지원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 없이 하루도 못 견디는 것이 현대인이라지만, 에르네스트는 이 모든 생활을 슬슬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체질인가…….’

답답하게 느끼고만 있으면 자신만 손해라고 생각하면서 에르네스트는 그사이 책을 읽거나 작곡을 하며 실력을 증진시켜 나갔다.

이 정도로 철저하게 관리받으면서 바깥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에게 깊게 몰두할 시간은 평소에 얻기 어렵다.

에르네스트는 커피를 마시며 어제 읽던 전자책을 마저 펼쳤다. 과거 있었던 여러 천재들의 통찰은 깊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시사하는 바가 컸다.

하지만 나름 즐겁게 상황에 적응하다가도 에르네스트는 불현듯 찾아오는 생각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그 애는 잘하고 있겠지?’

전날 밤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1라운드 마지막 무대가 있었던 날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친구인 타티아나나 아나스타샤가 언제 무대에 올랐는지도 모르지만, 콩쿠르가 본래 일정대로 진행되었다면 어제 결과가 나오는 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진출했는지, 아니면 떨어졌는지…… 외부 통신이 끊긴 에르네스트로선 알 방법이 없었다.

물론 떨어질 확률은 굉장히 낮다고 생각한다.

아나스타샤는 최근에 알캉을 레퍼토리에 넣을 정도로 테크닉이 더 강해졌고, 타티아나는 대체 그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항상 발전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평소 실력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무대 위에서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닥쳐 봐야 아는 일이다.

특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연주자들을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고 다양한 능력들을 요구하는 콩쿠르로 유명하다.

약간의 기대감과 불안감 그리고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답답함이 잡념으로 자꾸 끼어들어 에르네스트를 방해했다.

그는 결국 전자책 리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방문이 슬그머니 열리더니 한 남자가 들어왔다. 에르네스트는 일부러 그쪽을 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관심을 끌려는 듯 남자가 입으로 노크 소리를 냈다.

“똑똑.”

“문 열어 놓고 노크하면 뭐 합니까?”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돌아보았다. 거기에 서 있는 건 에르네스트의 담당 직원인 가브리엘이었다.

가브리엘은 명목상 에르네스트의 생활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거기엔 감시의 목적도 있었다.

잠기지 않는 방문과 마음대로 드나드는 그의 행동이 그것을 증명했다.

이곳은 프라이버시도 없는 곳이다. 물론 한 달간 있으면서 그 부분은 포기한 지 오래다.

가브리엘은 약간 능글맞은 태도로 다가오더니 물었다.

“커피 드시고 계셨습니까?”

“한 잔 드릴까요?”

“그것도 좋겠군요. 모처럼 좋은 소식들이 있으니.”

좋은 소식이란 말에 에르네스트는 막 일어서려다가 멈칫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담당 직원이 좋은 소식이라고 가지고 올 만한 이야기는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에르네스트는 가브리엘에게 눈짓했다. 그렇게 좋은 소식이면 얼른 말해 달란 의미였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일부러 장난치듯 느긋한 태도로 침대맡에 앉았다. 그러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웃고 있기만 했다.

어쩔 수 없이 에르네스트는 그에게 커피를 끓여 주었다.

“여기.”

“고맙습니다.”

커피를 가져다주고 나서야 가브리엘은 그걸 한 모금 마시더니 과장된 태도로 너무 맛있다며 극찬을 하기 시작했다.

슬슬 그의 장난을 받아 주기 싫어진 에르네스트가 흐름을 자르듯 툭 물어보았다.

“그럼 시원하게 이야기해 주시죠. 보통 좋은 소식이 있으면 나쁜 소식도 있기 마련이던데.”

“눈치가 빠르시군요.”

“진짜 있습니까?”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갑자기 가브리엘이 정색하며 고개를 끄덕이니 조금 긴장된다.

약간 경계하며 에르네스트가 묻자 가브리엘은 커피잔을 내려놓더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이곳에 조금 더 오래 계셔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정말 예상치 못했던 나쁜 소식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에 짜증이 섞이는 걸 느꼈다.

이곳이 혼자서 자기 개발을 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참가한 작곡가의 신변을 구속해 놓은 감옥과 비슷한 곳임은 달라지지 않는다.

더 오래 있어 달라는 말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기분도 이해한다는 듯 가브리엘은 깍지 낀 양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조금 더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본래 일정대로라면 앞으로 1주 후면 자유롭게 풀려 나실 예정이었죠. 하지만 거기에 1주 더 추가하여 2주간 있어 주셔야겠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하루 이틀 늘어난 것도 아니고.”

그의 생각과 관계 없이 정해진 상황을 어찌할 수 없음은 명백하지만 일단 입장상 화라도 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가브리엘에게 따지려 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치사하게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사무적인 태도로 대응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심사 위원단이 특수한 사정을 고려했다고 생각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은 전부 저희 측에서 책임지고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1주나 더 갇혀 있으면 해야 할 행정 처리가 많다.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어차피 가브리엘에겐 결정권이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일을 제대로 보상받으려면 윗선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기분은 좋지 않지만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빠르게 인정한 에르네스트는 짜증을 내 봐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조금 진정되고 나자 2주로 감금 기간이 늘어났다는 말에 집중하느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부분이 떠올랐다.

이곳의 심사 위원단이 에르네스트에게 더 이상 볼일이 없다면 붙잡아 둘 이유도 없다.

“그럼 심사는…….”

“그게 좋은 소식입니다.”

가브리엘은 바로 이 말을 전하기 위해 아침부터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손을 펼치며 에르네스트에게 축하를 보냈다.

“최종 당선자로 결정되셨습니다, 에르네스트.”

뭔가 기분이 묘했다.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는 것은 분명 기뻤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에르네스트는 한 달이나 되는 감금 생활을 참아 왔고, 앞으로도 참아 낼 각오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은 시상대 같은 곳이 아닌 이런 방에서 담당 직원에서 통보받으니 약간 덤덤한 기분이었다.

‘무슨 통보를 이렇게 해……?’

청중이 없는 작곡 심사이니 작곡가와 심사 위원단만 작품을 놓고 그 가치를 정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심사 위원장 같은 사람이라도 와서 직접 이야기해 줘야 하는 부분 아닌가?

수상 소감 같은 걸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냥 지금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걸 가브리엘에게 물었다.

“생각보다 빨리 결정이 났군요.”

“아무래도 특수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주요 심사 후보 두 분을 놓고 그사이에서 선정을 미루며 저울질을 할 시간이 없는 거죠. 대신 심층 심사를 하면서 요구 사항들이 조금 있을 순 있겠지만…… 에르네스트로 낙점된 사실엔 변동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경선에 있었던 작곡가는 두 명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 둘을 놓고 굉장히 면밀한 심사가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이전에 듣기론 이곳에서 작곡해 제출해야 하는 두 곡은 그냥 한 번에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나 리젝과 수정 그리고 재심사를 거쳐서 최종본을 가지고 겨룬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렇게 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심사 위원단이 앞으로 뭘 어떻게 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약간 불안해졌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그만큼 곡의 퀄리티가 뛰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심사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아십니까?”

그는 심사 현장의 분위기를 전해 주었다.

심사 위원 몇 명이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든가, 정말로 혼자서 작곡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른 샘플 곡을 더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든가…….

가브리엘의 말은 약간 과장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지만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좋았던 건 사실인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항상 염두에 두며 걱정했던 건 음악관이 편협하게 좁아져서 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단 작품으로 깐깐한 심사 위원들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한시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기쁘긴 하군요.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현실감이 안 들긴 하지만요.”

“하하하, 특별히 미리 알려 드리는 겁니다.”

껄껄 웃으면서 가브리엘은 조만간 제대로 된 시상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여 전했다. 에르네스트는 큰 기대 하지 않고 웃었다.

최종 당선이 되었다는 말에도 에르네스트가 무덤덤하게 반응하자 가브리엘은 그를 조금 놀라게 하고 싶었는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혹시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알아봤는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준결승 진출자 24명이 확정되었습니다.”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흠칫했다. 어젯밤부터 계속 머릿속에 있던 궁금증을 가브리엘에게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절대 내비치지 않고 싶었던 에르네스트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잘 진행 중인가 보군요.”

“예. 그런데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답답해하시겠죠?”

가브리엘은 능청스럽게 웃었다. 지난 한 달간 그를 담당자로 두면서 에르네스트는 성격을 파악당한 것 같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정확하게 에르네스트가 신경 쓰는 부분을 짚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양도 진출자 명단에 있습니다. 마지막 순서였는데 그 실력이 거의 초인적이었다고 하더군요. 직접 못 들어 봐서 너무 아쉽습니다.”

에르네스트는 바로 반응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73명이나 되는 참가자들 그리고 24명의 진출자 중 그녀만 콕 집어 말해 주고 반응을 살피다니. 정말 유치하고 돼먹지 못한 어른이었다.

가브리엘의 흥미 본위의 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는 에르네스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 그 정도야 하겠죠.”

“쿨하군요. 아까 최종 당선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의연하셨고…… 그런데 어쩐지 지금이 더 기뻐 보이는 것 같은 건 제 착각입니까?”

“농담하지 마시죠.”

타티아나의 존재와 관계성에 대해 에르네스트는 더 이상 그와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준결승에 올랐다는 소식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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