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63화 (1,163/1,277)

##  1163화

결과가 발표되고, 칼스도르프에게 일정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 듣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워낙 늦은 시간이라서 다른 걸 할 수도 없었기에 난 모스크바에 있는 선생님들과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화를 하고는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황에서 워낙 많은 일이 있기도 했고, 연주에도 워낙 많은 심력을 쏟아부은 탓이었다.

특히 마지막 메시앙의 곡은 준비했던 수준을 뛰어넘었을 정도로 고도의 집중력으로 이루어 낸 연주였다.

연주자로서 후회는 전혀 없다.

라운드 통과라는 결과 역시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세연은 내게 겁먹지 않고 다시 다가와선 같이 답을 찾아가 보자고 말했다.

모든 것이 좋았다. 교수님이 어떤 대답을 하실지 모른다는 것만 빼면.

‘더 경계하실지도 모르지…….’

세연은 원래 날 따르고 있었으므로 지금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교수님뿐이었다. 내가 연주한 음악은 결코 쉽고 부드럽지 않았다.

아기 예수와 성령을 그리는 음악이었으나 그 길이 매우 험난할 것이란 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일부러 난 그것을 숨기지 않고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러니 교수님이 잘못 보실 일은 없다.

제대로 들으셨다면 내가 세연에게 영향을 끼쳐도 되는지 다시금 판단하셨겠지. 그리고 이번엔 조심스러우실 필요도 없었다.

내가 지금 무대 연주자로서 어떤 음악을 하고 있는지 아셨을 테니 교수님 역시 입장을 숨기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마 조만간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이야기할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그때를 상상하는 내 마음속에 생긴 다짐은 단 하나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교수님과 세연을 우선하겠다는 것이다.

여전히 내 마음속엔 어두운 감정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난 어느 정도 스스로에게 믿음이 있었다.

클로에가 가르쳐 준 대로 내 마음이 향하는 대로 했더니 후회 없는 무대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연주자로서 한번 증명해 낸 사실을 굳게 믿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어느새 곯아떨어진 나는 아침 햇살과 새소리에 잠에서 깼다.

“토요일인가…….”

눈을 뜨자마자 시계와 달력부터 확인한 나는 일어나 가볍게 몸 상태부터 확인했다. 이 모든 것이 내겐 하나의 버릇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다행히 전날 쏟아부은 체력이나 정신력에 비해 반동은 적었다.

몸 곳곳에 약간의 근육통이 느껴지긴 하지만 이 정도는 별것 아니었다. 잘 관리하고 하루만 푹 쉬면 금방 나을 정도다.

난 스트레칭을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틀어 놓았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 콩쿠르라 그런지 전 세계의 음악 관련 매스컴에서 1라운드 결과를 전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선 어떻게 전하고 있을지 궁금해져서 뉴스를 보면서 무릎을 당기고 있는데 복도를 딛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젠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데보라 아주머니였다.

스트레칭 하던 손을 놓고 고개를 들자 아주머니가 문을 노크하셨다.

“타티아나. 일어났니?”

“들어오세요.”

난 기분 좋게 인사하며 아주머니를 맞이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데보라 아주머니.”

“그러게. 너무 행복한 아침이야.”

데보라 아주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다.

맡고 있는 연주자가 준결승에 진출했다는 것에 어제부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계시는 것이 눈에 선했다.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고 나자 아주머니는 내가 보고 있던 스마트폰 화면에 관심을 보이셨다.

“뉴스 보고 있었니? 그럼 이것도 봤겠네?”

“예?”

“여기에서 보니 네가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던데? 그거 말해 주려고 온 거야.”

아주머니가 보여 준 화면엔 유명 클래식 평론가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유력 수상 후보로 점찍은 명단이 올라와 있었다.

거기엔 나와 아나스타샤의 이름이 있었다.

걱정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평론을 읽어 본 나는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거기엔 우리의 테크닉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음악성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나스타샤는 알캉의 곡을 연주했기에 사람들의 초점이 테크닉에 쏠릴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음악성으로도 인정받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내가 싱글벙글 웃으며 스마트폰을 보고 있자 아주머니 역시 기쁘게 웃으며 물으셨다.

“오늘은 어디 안 가 봐도 되니?”

콩쿠르 일정은 무척 빡빡하다. 24명이 참가하는 준결승전은 내일부터 시작하여 6일간 진행된다.

그러니 당장 내일 무대에 올라야 할 참가자들은 오늘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다행히 준결승 또한 1라운드 추첨 순서에 따라 진행하게 된다.

심사 위원단의 의견을 반영하여 조금씩 순서가 바뀐다고는 하지만 난 이번에도 뒤쪽 순번일 확률이 높았다. 거기에 대한 설명은 이미 들었다.

“가야 할 일이 있으면 제 담당인 칼스도르프 씨가 알려 주실 거예요.”

“그러면 오늘은 푹 쉬려고?”

“그래야겠죠?”

“음…… 그러면 점심엔 어떤 맛있는 걸 해 줘야 하려나?”

오늘 하루 정도는 푹 쉴 수 있다는 말에 데보라 아주머니는 즐겁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 역시 오늘은 랑스가 식구들과 보낼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침대 위에서 조금 늘어진 상태로 멍하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세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난 똑바로 앉은 다음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세연.}

-{아침부터 미안! 쉬고 있었어?}

{예. 세연은요?}

-{나도 쉬고 있었지. 아, 맞아. 너 혹시 텔레비전 봤니? 네가 나오던데.}

내 방엔 텔레비전이 없어서 벨기에 방송을 볼 방법이 없었다. 대신 난 다른 매체에 올라와 있던 이야기들을 그녀에게 해 주었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지금 세연이 혼자가 아니라 다른 누구와 함께 있고, 그 누군가의 눈치를 상당히 보고 있다는 것을.

두서없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말이 끊기기도 하고, 세연의 상태는 상당히 수상했다.

난 그녀에게 편하게 말해도 된다고 하려다가 지금 편하지 않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고는 자조했다.

내가 실없이 웃자 세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타티아나. 사실은 있지…… 다른 게 아니라…… 음…….}

{무슨 일 있나요?}

-{아니!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음…….}

계속 머뭇거리는 것을 보니 점차 확실해졌다.

그리고 세연의 옆에서 누군가 말하는 미약한 목소리도 들렸다. 그건 분명 교수님의 목소리였다.

두 사제가 같이 있으면서 내게 전화를 할 만한 이유라곤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제도 카페에서 비슷한 상황이 있었으니까.

‘지금도 긴장되긴 해.’

교수님이 내 음악에 어떤 평가를 내리셨는지 난 아직 모른다. 세연이 머뭇거리는 것을 보니 조금 불안하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회피해 버리면 그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었다. 전화를 걸어 준 세연의 용기를 받아 나도 용기를 내어 마주 할 필요가 있었다.

{혹시 세연의 교수님도 함께 계시나요?}

-{아…… 응.}

상황을 꿰뚫어 본 내 말에 세연은 깜짝 놀란 것 같았다. 그러나 우물쭈물했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는 걸 자각했는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녀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을까 생각하며 웃었다.

{다행이에요. 이참에 다른 곡들도 레슨을 부탁드리면 좋을…….}

-{그건 안 될 것 같아.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신다고 하셨거든.}

{예?}

이번엔 내가 놀랄 차례였다. 세연이 전해 준 교수님의 결정은 내 예상을 완전 벗어나 있었다.

아마 교수님이 이곳까지 오시기로 한 건 상당히 중요한 결정이셨을 터다. 그런데 왜 벌써 돌아가신단 말인가?

기왕 오셨으니 세연이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좋고, 아니면 그냥 옆에 있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세연은 심적 안정을 얻을 테니 무대에서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교수님의 존재만으로도 세연은 상당한 이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난 조금 당혹스러워서 재차 물었다.

{빨리 귀국하시네요. 원래 그럴 예정이셨던 건가요?}

-{그냥…… 더 있을 이유가 없다고 하시네?}

그런데 지금 제일 혼란스러울 세연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했다. 이미 교수님과 어느 정도 이야기를 마치고 납득한 것 같았다.

어찌 된 일인지 조금 더 듣고 싶어서 물어보려고 하는 찰나, 세연이 이야기의 초점을 내 쪽으로 바꾸었다.

-{가시기 전에 너한텐 정말로 미안하게 되었다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혹시 직접 하실 말씀이 있나 싶어 무작정 전화했는데…….}

{……}

-{들을 생각 없으면 거절해 줘.}

그제야 난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교수님은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시기로 결정했고, 그 전에 세연과 만나서 마지막으로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세연은 이대로 그냥 가시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이전부터 세연은 내 일에 대해선 교수님에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곤 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사과해 달라고 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그 정도로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어쨌든 세연이 이렇게 또 한 번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면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괜찮아요.}

내가 긍정적으로 대답하자 전화 소리가 먹먹해졌다. 아마 세연이 손으로 수화기 부분을 가린 듯했다.

그 먹먹함 너머로 세연이 무언가 보채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교수님에게 말하는 것 같았는데, 그 내용까지 정확히 들리진 않았다.

그런데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세연과 교수님의 이야기는 꽤 길었다.

중간에 가볍게 다투기까지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난 걱정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세연이 살짝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거 그대로 못 전해…….}

{그대로 전해 주셔야 해요, 세연. 지금 중계자는 세연이잖아요.}

교수님은 나와 직접 만나서 이야기한 것을 후회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걸 후회하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연을 중간에 두지 않고 교수님과 내가 직접 이야기를 나누면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세연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합의된 것인데, 지금 그녀가 이야기를 제대로 전해 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아니면 잠시 바꿔 주시겠어요……?}

내가 침착하게 이야기하자 그제야 세연은 정신이 들었는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말했다.

-{네 메시앙을 듣고 너랑 같은 걸 믿고 있다는 걸 확인했고, 마지막에 실수한 것까지 보았으니 안심하셨다는데……. 아, 이건 말이야…… 무슨 의미인 것 같냐면…….}

{이해했어요.}

-{응?}

내가 이어지는 변호를 듣지도 않고 대답하자 세연은 어리둥절해했다.

난 지금 굉장히 기뻤다. 그래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 이해했어요.}

-{불쾌하지 않아? 네 실수를 보고 안심했다는 건…… 아무리 날 가르치는 분이라지만…….}

{아하하, 그 이야기가 아닐 거예요.}

우선 교수님과 내가 같은 걸 믿고 있다는 건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세연을 보며 느끼는 기쁨과 이해 그리고 더 나아가 음악의 신에 대한 믿음이 같다는 걸 확인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가 실수하지 않고 그대로 연주를 본능에 따라 끝냈다면…… 아마 교수님은 날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로 음악에 미쳐 살다가 언젠가 끝나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세연이 그렇게 되도록 두지도 않았을 테고.

하지만 난 내 의지로 경계를 지키는 데에 성공했고, 교수님은 그것을 높게 사 주신 것이다.

‘아마 완전히 마음을 놓으신 건 아니겠지.’

물론 교수님이 보시기에 난 여전히 위험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게 위험한 방향으로만 모든 것을 마무리하진 않을 것이란 걸 내가 증명하자 교수님도 약간은 날 인정해 주신 것 같았다.

-{왜 웃어? 무슨 이야기인데? 아니, 교수님도 웃으시는데?}

세연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지만 난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지에 대한 적당한 답을 떠올리지 못했다.

아마 시간이 조금 더 흐른다면 이야기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이대로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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