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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164화 (1,164/1,277)

##  1164화

세연의 음악은 타티아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박 교수는 그 부분을 꿰뚫어 보고 벨기에로 와선 세연과 타티아나 두 사람에게 조언했다.

그 후로 세연은 계속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단순히 어린애들끼리 의기투합하는 건 적당히 하라는 식으로 타일렀다면 아마 그럭저럭 알아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박 교수의 태도는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세연은 평소 자유로운 풍조로 가르치던 교수가 갑자기 이런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 당황했고, 또 그것을 타티아나가 쉽게 인정해 버리고 포기한 듯 풀이 죽어 있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세연의 속앓이는 연습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라운드 결과가 발표되고 나면 연습할 시간이 극도로 부족할 테니 최대한 시간이 있을 때 준비해 둬야 했는데, 이미 세연은 손해를 많이 본 상태였다.

‘하지만 이젠 괜찮아.’

타티아나는 세연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자존심 강하고 빛나는 피아니스트였다.

늘 음악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증명하기를 바라는 사람답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단 30분 정도의 시간으로 모든 사람을 납득시켰다.

거기에 빠져 버린 건 박 교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1라운드 결과가 발표된 직후 박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연주를 어떻게 들었느냐는 그의 질문에 세연은 당당하게 말했다.

타티아나는 이번에 혼자선 올바른 답을 찾지 못해 실수했지만 같이 찾는다면 분명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타티아나와의 실력 차이를 생각한다면 그녀와 같이 무언가 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 교수는 그 말만으로도 이해했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지금도 박 교수는 타티아나와 전화를 하는 세연을 보면서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타티아나와 교수님이 같은 걸 믿고 있고…… 마지막 실수에 안심했다?’

세연은 중계자로서 충실하게 박 교수의 말을 영어로 통역하면서도 그 말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박 교수의 말은 메시앙을 근거로 하는 종교적 요소를 뜻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세연이 알기로 그는 종교가 없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자신이 유신론자라고 했으니 아마 정교회 신자일 것이다. 두 사람 간에 일치하는 부분은 없었다.

거기다 타티아나의 실수는 그녀가 마지막에 본능에 맡기지 않고 이성적인 답을 찾지 못한 결과다.

박 교수라면 당연히 본능적으로 강한 피아니스트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 실수에 안심했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연은 여전히 박 교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걸 느꼈다.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어련히 말해 주겠거니 싶지만…… 정작 멀리 떨어진 타티아나는 교수와 말이 통하는 것 같으니 조금 답답했다.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뭐…….’

일단 음악가로서 타티아나도 박 교수도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니 뭔가 음악만 들어도 통하는 것들이 있겠거니 싶었다.

세연은 일단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고는 타티아나와 마저 통화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들은 그녀의 목소리는 꽤 밝아져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전화 다 했어요.」

전화를 마치고 고개를 들자 커피를 마시고 있던 박 교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전화로나마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 다행이다. 고맙구나, 세연아.」

박 교수의 목소리와 표정 역시 약간 낙관적으로 변해 있었다. 이것도 다 타티아나가 음악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증명한 덕분이었다.

그래도 세연은 지금 박 교수가 한 발자국 양보해 준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제대로 감사를 표해야 할 때였다.

「저야말로…… 저희가 하는 걸 인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세연은 말하고 나서야 뉘앙스가 약간 이상하게 들린다는 걸 알아차렸다. 급히 무어라 더 덧붙이려는 찰나 박 교수가 대답했다.

「인정이라고 해야 할까…….」

박 교수는 커피 잔을 애매하게 든 채 중얼거리더니 세연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뭘 하든 너희를 막을 순 없을 것 같더구나.」

「헉.」

「하하하, 왜 긴장하지? 너희 멋대로 해 보라고 내가 포기한 것 같아서?」

갑자기 박 교수가 벌컥 화내며 사제 관계를 끊겠다고 말하진 않을 것이란 믿음은 있었지만 세연이 계속 그의 말을 안 듣고 고집을 부렸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박 교수가 괘씸하게 본다면 얼마든지 괘씸하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세연은 타티아나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녀가 현실에 음악을 실현시키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가능성 역시 많이 넓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 교수의 체계적인 교육이 없었다면 따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필요한 기술이나 체력 그리고 분석력 등은 트레이닝을 받은 덕분에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세연에겐 두 사람 모두 필요했다. 그게 굉장한 욕심이란 걸 알면서도 세연은 포기할 수 없었다.

심기를 많이 거슬렀나 싶어 불안해하는 세연을 보며 박 교수가 이미 세연의 생각은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느긋하게 말했다.

「걱정 말거라. 계속 지켜보다가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또 이렇게 날아와 괴팍한 구세대처럼 참견할 테니.」

「그,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저도 타티아나도.」

「그래? 그럼 좋고.」

박 교수는 가볍게 대답하더니 커피 잔을 기울였다.

평소와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유쾌해하는 웃음소리가 세연을 안심시켰다.

일단 지금은 지켜보는 것 정도로 괜찮겠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제야 자신의 일에 생각을 집중할 수 있게 된 세연은 교수에게 당장 아쉬운 부분부터 물었다.

「그런데…… 정말 내일 가실 건가요?」

「그래, 이미 세미 파이널 티켓이 아니라 비행기 티켓을 구해 뒀다.」

「저 당장 내일 무대에 오를지도 모르는데요?」

아직은 아무 연락도 없지만 세미 파이널에서 세연의 순서는 상당히 앞일 것이다.

만약 내일 연주하게 된다면 그때 박 교수가 없는 것보단 있는 것이 나았다. 적어도 세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박 교수의 의견은 달랐다.

「그래서 가는 거란다.」

「예?」

「내가 옆에 있으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할 것 같아서.」

말도 안 되는 말씀이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세연은 미처 입을 떼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아마 박 교수가 가지 않고 레슨을 봐준다면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거기에 이런저런 잡념이 스며들면 기존에 연습했던 것보다 못 할지도 모른다.

그제야 솔직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 세연은 지금은 혼자서 연습하는 편이 낫다는 걸 깨달았다.

그 본심을 세연보다 박 교수가 빨리 알아차린 것이다.

그걸 바로 인정할 수 없었던 세연은 어설프게나마 변명을 조금 만들어 보려 했다.

「아무리 그래도…….」

「네가 얼마나 강한 피아니스트인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생각과 준비를 하고 이곳에 선 것인지…… 다시 확인했으니 괜찮단다.」

하지만 박 교수는 그저 세연을 믿는다는 듯 웃기만 했다.

「네 마음이 따르는 대로 해 보렴. 그럼 잘될 테니까. 내가 보장하마.」

박 교수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상당히 생소했다.

아무리 자유롭게 제자들을 가르치더라도 행해야 하는 음악에 대해선 엄격한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박 교수가 지금 이곳에 와 있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이었고, 원래 그는 한국에 있어야 하는 것이 옳았다.

처음 콩쿠르 참가 의사를 밝혔을 때부터 일관적인 태도로 현장에서의 모든 것을 세연이 견뎌 내길 바랐으니까.

그래도 걱정이 되었는지 양지은이나 이연주 같은 선배 연주자들을 붙여 주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교수는 지금 뒤늦게 일관성을 되찾으려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세연은 그것을 존중해야만 했다. 박 교수 역시 상당히 어려운 결정들을 연달아 하고 있음이 분명했으므로.

마음의 준비를 마친 세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박 교수는 흡족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럼 슬슬 난 가 봐야겠구나.」

「벌써요?」

「그래, 다른 아이들한테도 얼굴을 한 번쯤은 비춰야지. 연주나 진우 그리고 지은이도.」

「아.」

교수의 제자는 세연 하나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다른 이유로 벨기에에 온 터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세연과 타티아나에게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이젠 다른 제자들에게 인사 정도는 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거기엔 세미 파이널 진출자들뿐만이 아니라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탈락자들을 다독이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어렵겠다고 생각하며 세연이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박 교수가 장난스레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너만 보고 갔다간 말년에 무슨 수모를 당할지 모르잖니.」

가끔 박 교수가 하는 농담은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세연이 당황스러워하자 그는 귀엽다는 듯 껄껄 웃으며 커피를 다 마셔 버리곤 일어났다.

「그럼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렴.」

「아, 알겠습니다…….」

「그것도 모레까지려나? 하하.」

박 교수의 말엔 상당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세연은 그 태도에서부터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

커피만 한 잔 마시고 일찍 자리를 떠나려는 박 교수를 붙잡을 순 없었다. 세연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선 혼자 오전 연습에 빠져들었다.

이제 자신의 음악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걸 깨닫고 나자 놀랍게도 세연의 연주는 훨씬 더 정교해졌다.

연주자들의 기복은 정신력에 좌우되는 경향이 짙다. 그만큼 타티아나와 박 교수의 일이 세연의 정신에 혼란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더 원하는 음악을 잘 구사할 수 있게 된 세연은 기쁘게 연습에 임했다.

집주인 멜리아와 점심 식사를 하고 난 후에도 오후 연습이 그대로 이어졌고, 몇 시간 사이 세연은 상당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자신감은 멜리아에게 온 전화 한 통에 흔들렸다.

{세연아. 플라지로 와 달라는구나.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급히 시계를 보니 오후 7시였다. 세연은 왜 이 애매한 시간에 콩쿠르 측에서 그녀를 불렀는지 알고 있었다.

세미 파이널에서 준비해야 할 곡들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한 곡 그리고 독주곡 프로그램 A와 B였다.

1라운드 때 에튀드 네 곡을 준비하고 그중 두 곡을 심사 위원단이 통보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이번엔 세 곡 이상의 50분가량 되는 독주곡 프로그램을 두 종류 준비해서 그중 심사 위원단이 고른 하나를 연주해야만 했다.

그 통보는 정확하게 무대에 서기 24시간 전 이루어진다. 그러니 지금 부르는 건 그 통보를 위한 것임이 분명했다.

‘진짜 칼같이 부르네…….’

말이 24시간 전이지, 전날 적당히 말해 주리라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였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일정은 정말 정확하고 철저하게 돌아간다.

세연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갑자기 불려 가는 것도, 독주곡 프로그램 중 절반을 버려야 한다는 것도, 통보를 받고 나면 오케스트라와 리허설 시간이 딱 1시간 주어진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들이다.

알고 있다면 두려워할 건 없었다. 세연은 다시 시계를 확인하고 멜리아를 바라보았다.

{마음의 준비는 다 되었어요.}

{역시 세연이네. 아줌마가 데려다줄게.}

{감사합니다.}

가기 전에 박 교수나 타티아나, 아니면 친구들에게라도 전화를 해야 할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세연은 박 교수가 떠나기로 했던 이유를 떠올리며 강하게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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