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165화 (1,165/1,277)

##  1165화

금방 나갈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멜리아가 차 안에서 손을 흔들었다.

세연은 얼른 조수석에 올라타고는 스마트폰을 꺼내 콩쿠르 일정과 주요 사항들을 다시 체크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세미 파이널은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총 6일간 진행된다.

오후 3시, 저녁 8시에 각 세션이 시작되며 세션마다 참가자는 2명이다. 그렇게 하루에 4명 씩 총 24명이 무대에 오르는 것이다.

한 세션을 2명의 참가자에게 몰아 준다는 것은 그만큼 무대에서 요구하는 밀도가 높다는 의미였다.

참가자들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과 독주곡 프로그램을 한 번에 연주해야만 한다.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독주곡 프로그램 중 선택받지 못해 버려져야 하는 것까지 따지자면 이 세미 파이널 무대 하루에 준비해야 하는 곡은 최소 여섯 곡.

심지어 짧은 에튀드 등으로만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협주곡과 소나타 등이 포함되는 대규모 연주회에 가깝게 된다.

레퍼토리에 자신이 없다면 애초에 도전조차 못 할 정도의 상황을 요구하는 콩쿠르였다.

세연도 이 기준을 맞추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준비를 해야만 했다.

게다가 연주자를 몰아세우는 방식도 더 무시무시해졌다.

‘저번보다 압박이 더 심해졌어…….’

4년 전엔 이보다 조금 느슨한 일정이었다.

참가자가 협주곡이나 독주곡 프로그램을 연주하고 나면 그다음 남은 것을 연주하기 전 3일 정도 되는 여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배려를 기대할 수 없었다.

이 콩쿠르는 가면 갈수록 더더욱 난이도가 높아진다는 풍문이 있었는데, 세연은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정말 잘해야 해.’

세연은 이번 기회를 정말 중요하게 여겼다. 그것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심지어 부모님조차 아직 어리니까 경험 삼아 열심히 하란 이야기를 하실 뿐이었다.

물론 4년 후엔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피아니스트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때도 타티아나가 보이는 곳에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지금도 타티아나는 아득하게만 보이는 피아니스트다. 하지만 가까스로 따라갈 수 있었다.

이렇게 같은 콩쿠르에 출전하여 비견할 수 있는 기회는 평생을 통틀어 지금 한 번뿐일지도 모른다.

콩쿠르 난이도 등에 대한 쓸데없는 생각을 접어 둔 세연은 스마트폰을 끄고 가만히 차창을 바라보았다.

이제 익숙해진 도로를 따라 익숙한 건물들을 지나고 나자 플라지 빌딩이 보이기 시작했다.

{늦진 않았겠지?}

{예. 15분 일찍 왔으니 여유로워요.}

{잘됐다.}

차량을 주차하고 멜리아와 세연은 함께 움직였다.

콩쿠르 무대가 없는 저녁의 플라지 빌딩은 손님들이 없어 한산했다.

참가자도 24명으로 압축된 만큼 이제 전처럼 사무실 앞에서도 북적거리는 상황을 보긴 어려울 것이다.

조용한 복도를 걸으면서 세연은 조금씩 현실감을 느꼈다.

사무실로 올라가자 키가 큰 직원 한 명이 나와 세연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임세연 님.}

{아, 안녕하세요?}

{보호자님께선 이쪽에서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중한 태도로 멜리아를 대기실 같은 곳으로 안내한 직원은 다시 세연을 사무실 한편에 있는 테이블로 데리고 갔다.

물 한 잔과 함께 테이블 앞 소파에 세연을 앉게 한 직원은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오도카니 앉은 세연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미 몇 번이나 와 본 곳이지만 올 때마다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누군가와 통화하는 듯한 목소리 등이 들려온다.

이 늦은 시간에도 콩쿠르 운영을 위해 일하는 직원들의 소리였다.

「다들 바쁘구나…….」

연주자의 일은 정해진 시간에 무대에 올라 피아노를 치는 것이지만 그 준비를 위해선 정말 많은 사람이 움직여야 한다.

세연은 조용히 기다리면서 심호흡했다. 그렇게 10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그녀를 두고 갔었던 직원이 서류철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슬슬 시간이 되었군요.}

직원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정확하게 8시가 된 시점이었다.

이 정도로 기계같이 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원래 이래야 하는 모양이다.

직원은 다시 한번 세연의 순서를 알려 주었다. 24시간 후였다.

{임세연 님의 세미 파이널 연주 순서는 17일 이브닝 세션 8시입니다.}

{옙.}

세연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직원은 웃지도 않고 사무적인 태도로 이어 세연의 이름이 적인 봉투를 꺼냈다.

{이 안에 임세연 님께서 연주해 주셔야 할 독주곡 프로그램 목록이 들어 있습니다.}

저 봉투야말로 세연에게 있어선 운명의 갈림길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내용물에 따라 24시간 후 연주해야 할 독주곡이 정해지는 것이다.

세연이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자 직원이 침착하게 말했다.

{열어 보시기 전에…… 한 말씀 드리자면.}

{예?}

{보내 주신 곡들은 심사 위원분들이 모두 흥미롭게 생각하셨습니다. 하지만 규칙에 따라 그중 하나를 고를 수 밖에 없었다는 점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해해요. 원래 그런 규칙이니까요…….}

약간의 위로를 하려는 걸까?

어차피 모두 각오하고 이 자리에 선 사람들이니 이제 와 저런 말을 해 줄 이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절차상 필요한 멘트겠거니 싶어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가볍게 응하는 세연을 보며 조금 더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 절대로 심사 위원 측에선 연주자를 곤란하게 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음악적 평가 요소들만 고려하여 뽑은 것임을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

아무래도 이 통보를 두고 뭐라 한 사람이 있나 보다.

여기까지 와서 비협조적으로 구는 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 불과하다. 정신적으로 내몰리게 되면 무슨 말인들 못하겠냐마는…….

세연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밝혔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충분한 각오를 하고 온 연주자들도 패닉에 빠질 만한 상황 속에서, 세연이 아는 사람 중 가장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타티아나였다.

‘타티아나라면 뭐라고 했을까?’

아마 그녀라면 곡들이 버려지는 것을 따지지 않고 몽땅 칠 생각으로 준비하면 나중에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세연은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세연은 타티아나처럼 강철 같은 프로페셔널리즘을 갖추진 못했다.

지금 그녀는 벌써 버려질 곡들에 대한 미련과 염려 등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프로답게 행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 있는 프로그램 목록 두 개를 보내 드린 거잖아요? 그중 하나를 뽑아 주셨는데 곤란해하면 안 되죠.}

자신 있게 말한 세연은 직원이 내민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거기엔 누군가의 필기체로 독주곡 프로그램 B라고 쓰여 있었다.

{잠깐…….}

불과 3초 전에 곤란해하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당장 세연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내일 연주해야 할 프로그램 B 목록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폐기된 프로그램 A 목록이었다.

그간 프로그램 A를 준비하면서 들였던 시간과 노력 등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에튀드를 통보받았을 땐 그래도 짧은 곡들이라서 충격이 조금 덜했는데, 이번엔 총합 50분가량 되는 곡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미련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미련을 가지면 안 된다는 걸 이성적으론 알지만 생각이 자꾸만 그쪽으로 향하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세연은 몇 번이고 종이를 확인하면서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 열심히 해 볼게요!}

{해당 프로그램이 어떤 곡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기억하십니까?}

{예? 예…….}

{그럼 잠시 확인하겠습니다.}

절차에 따라 세연은 직접 프로그램 B의 곡들의 이름을 말해야만 했다.

혹시라도 착각하거나 잘못 알고 있을 수 있는 상황 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직원은 하나하나 곡들을 대조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군요. 이후 혹여 혼동하신다고 하더라도 저희 콩쿠르 측에선 도와드릴 방법이 없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예…….}

멍하니 대답하면서도 세연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이 프로그램 B가 나한테 유리한 것이 맞나? 오후엔 A가 더 잘되었던 것 같은데…….’

어쩐지 버려진 프로그램이 아쉽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B에 시간을 조금 더 쏟았어야 했다는 후회까지 느껴졌다.

어차피 어떤 프로그램이 선택될지 미리 알 방법은 없었기 때문에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후회였지만, 세연은 웃지 못하고 심각하게 상념에 잠겼다.

그러나 직원은 세연이 생각할 틈도 주지 않았다.

{미발표 의무곡은 악보가 필요하십니까?}

{필요해요…….}

콩쿠르가 시작되기 한 달 전, 콩쿠르 측에선 모든 참가자들에게 악보를 하나 제공했다.

그건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미발표 곡이었고, 참가자들은 그것을 한 달 동안 연습하여 독주곡 프로그램에 반드시 포함시켜야만 했다.

다행히 한 달이란 기간이 무척 짧기에 악보를 펼쳐 놓고 연주를 해도 되는 배려가 있었다.

암보도 그럭저럭 잘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전부 외웠다고 확신할 수 없었던 세연은 악보를 보면서 연주하는 것을 선택했다.

다행히 악보를 본다 해서 감점 같은 건 없었다.

직원은 들고 있던 서류철에 펜으로 무언가 체크하고는 이어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악보가 필요하시고…… 그럼 독주곡 프로그램에 대해선 설명드리고 확인 마쳤습니다. 혹 궁금하신 점이라도?}

세연은 바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이미 모든 시스템을 알고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긴장이 세연의 머릿속을 흔들어 놓았다.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잠깐만요. 정신 좀 차릴게요.}

세연이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자 이런 상황이 많았는지 직원은 곧바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놓인 물컵을 비우고 몇 번 심호흡을 하자 머릿속이 조금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다른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세연은 다시 상황을 일깨우며 각오를 다졌다. 해야 하는 것들만 추려서 모든 집중력을 모을 필요가 있었다.

평정을 찾은 세연은 일부러 살짝 과장하며 물었다.

{자! 괜찮아졌어요. 질문 하나 할게요.}

{예.}

{혹시 저처럼 바보같이 긴장한 사람 또 있었나요……?}

자신 있게 준비가 되었다는 듯 봉투를 받은 주제에 의연하지 못한 자신이 조금 한심스러웠던 세연은 약간 자학하듯 농담했다.

그러나 직원은 그 농담에 진지하게 답했다.

{모두가 그렇습니다.}

지금 세연처럼 정신 줄을 붙잡았다가 다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듯한 담담한 목소리에서 세연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임세연 님은 상당히 평정심을 잘 유지하시는 편입니다.}

{정말요?}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입가에 옅은 웃음기가 맺혔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만큼 긴장하며 다른 사람들만큼 이겨 내고 있는 중이라면 괜히 자신감을 잃을 이유는 없었다.

특별히 그보다 더 잘하면 좋겠지만 그건 용기를 내어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되는 것이란 걸 세연은 알고 있었다.

세연은 기세 좋게 어깨를 폈다. 그 모습을 본 직원이 이쯤 하면 되었다는 듯 서류철을 다시 정돈하더니 팔을 뻗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동하시죠.}

{어디로요?}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이 바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

자신만만해하던 세연은 다시 온몸을 조여오는 긴장감에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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