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6화
세미 파이널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연주를 위한 오케스트라 리허설은 딱 1시간 주어진다.
그걸 미리 알고 있었던 세연은 언제라도 리허설에서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도록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어도 갑자기 오케스트라를 만나러 가게 되니 무척 불안해졌다.
‘기억이…… 아, 악보 봐야 하나…….’
수없이 연습했던 모차르트의 선율이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올바르게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이후는 도미노처럼 와르르 쓰러진다. 그사이를 틈타 다른 소리도 섞여 들어와 세연을 헷갈리게 만들기도 했다.
계속 고민하던 세연은 결국 스마트폰 화면에 악보를 띄우곤 머릿속에 있는 악보와 대조해 가면서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렇게 다시 맞추어 보니 조금 마음이 진정되었다.
복도를 걸으면서 세연은 그렇게 다시 악보를 보며 중얼중얼거렸고 그런 세연의 모습을 보고도 직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 발걸음을 늦춰 주었을 뿐이다.
‘됐어…….’
세연이 협주곡을 복습하는 데에 든 시간은 2분 정도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일단 머릿속에 다시 새겨 넣는 데엔 충분했다.
준비한 곡에 대한 확신을 어느 정도 되찾은 세연은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걸으려 애썼다.
지금부터 만나게 될 오케스트라는 절대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고 세연에게 관심을 많이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세연은 단지 24명 중 1명일 뿐일 테니까.
노련한 베테랑들 사이에서 무엇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세연은 신중하게 고심해야만 했다.
{이곳입니다.}
생각하는 사이 세연은 스튜디오3으로 안내받았다. 콩쿠르가 열리는 스튜디오4와는 다른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 안엔 이미 30명 가까운 사람들이 각자의 악기와 함께 자리에 앉아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서워…….’
차라리 저 모두가 세연 쪽을 돌아보았다면 그녀도 힘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 몇 명만 뒤를 돌아보았을 뿐 나머지는 악기를 튜닝하거나 악보를 확인하는 등 각자 일에 열중이었다.
작게 오가는 목소리와 끼익거리며 우는 현의 소리. 세연은 문 근처에서 뻣뻣하게 굳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때 악기 없이 서 있던 한 남자가 세연을 발견하고는 프랑스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얼떨결에 세연도 프랑스어로 인사했다. 그랬더니 남자는 피식 웃으며 빠르게 이어 말했다.
『□□□□ □ □□□ □□ □□ □□□…….』
{죄송합니다. 인사말밖에 몰라요.}
빠르게 세연이 이실직고하자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각자 일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여도 세연 쪽으로도 귀를 열어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세연은 지휘자로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세연이 점차 지휘자와 가까워지자 주변에서 들리던 다른 소리들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영어는?}
{그럭저럭이요.}
{좋습니다. 기초적인 의사소통만 되면 되니까. 왈로니아 로얄 챔버 오케스트라orchestre royal de chambre de wallonie의 지휘자 가스파르 말레입니다.}
빠르게 자기소개를 한 가스파르는 옆의 직원에게서 서류철을 전달받았다.
{보자……. 대한민국의 임세연 양…….}
중얼거리면서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가스파르를 보며 세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회사 면접 자리가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약력으로만 A4 한 페이지는 채울 수 있을 것 같이 보이는 음악가가 겨우 17년 산 햇병아리를 서류로 파악하려고 하는 모습에서 세연은 입도 벙긋하지 못할 정도의 압박감을 느꼈다.
한참 동안 침묵하며 몇 장의 서류를 읽어 본 가스파르는 이윽고 안경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협연 경력은?}
서류로 다 알 수 없는 부분들을 상세하게 파악하려는 듯 가스파르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세연은 솔직히 그 전부를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답하려 애썼다.
생각나는 대로 대답하면서 정신이 멍해질 무렵, 가스파르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로 세연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럼 우선 이야기해 두겠는데, 저희 오케스트라는 임 양을 도와주기 어렵습니다.}
{어…… 예?}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세연이 말을 더듬자 가스파르가 손을 내저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게 말을 했군요. 그게 아니라…… 피아니스트의 연주 스타일과 해석 등에 맞추어서 저희가 면밀하게 조절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협주곡이고 뭐고 때려치우라는 말인 줄 알고 기절할 듯 놀랐던 세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오해하지 않고 이해한 가스파르의 말도 그리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세연은 다시 진지한 얼굴로 가스파르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일반적으로 협연 오케스트라는 피아니스트에게 많은 걸 맞춰 줍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당장 내일 무대에 올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 연주자만 4명입니다.}
피아니스트들은 어쨌거나 준비한 곡들을 한 번 연주하면 끝이지만, 오케스트라의 입장에선 하루에 4명씩 6일간 24명과 협주곡을 연주해야 하는 일정이다.
물론 왈로니아 로얄 챔버 오케스트라는 그만큼 노련한 프로들로 구성되어 있는 오케스트라였으므로 다양한 레퍼토리 연주를 모두 소화해 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퀄리티를 완벽하게 연주자에게 맞추어 주긴 어려웠다.
가스파르는 딱 잘라 이야기했다.
{그 모두의 주문과 개성을 다 받아 줄 순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시간도 없고요.}
{그렇죠.}
만약 지금 이 상황이 세연 혼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상황이었다면 가스파르는 몇 번의 리허설을 거쳐 세연의 특색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추어 오케스트라를 조율하여 완벽한 협연을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24명의 연주자들과 각각 딱 1시간씩 리허설을 해서 그 연주자의 해석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준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세연도 그건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가스파르의 말은 간단했다. 오케스트라는 가급적 레퍼런스에 가까운 연주를 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그럼 나도 거기에 따라야 해?’
세연은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오케스트라가 참가자 개개인을 섬세하게 챙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 현실을 납득하고 타협할 필요가 있는데 그랬다간 결국 밋밋한 그저 그런 협주곡밖에 되지 않는다. 어쩐지 오답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때, 고민하고 있는 세연을 보던 가스파르가 웃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무뚝뚝하게 내려다보던 시선은 어느샌가 부드러워져 있었다. 힘을 내라는 듯 그가 이어 말했다.
{유연성 없이 딱딱하게 오케스트라를 운용하겠단 말은 아닙니다. 그러니 피아니스트가 특출한 기량으로 선도한다면 거기에 재주껏 따르는 것 정도는 가능하단 말이죠.}
지금까지 가스파르가 한 말은 어쩔 수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는 그렇게 책임감 없는 지휘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음악가였다.
세연이 멍하니 올려다보자 가스파르는 조금 더 힌트를 주겠다는 듯 손가락을 세워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까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피아니스트들이 파이널에 진출해 왔습니다.}
그제야 세연은 가스파르가 지금껏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에게 지워진 부담도, 시간의 제약도 모든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리고 그 현실이란 말을 받아들이고 나면 결국 체념밖에 남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현실을 극복해야 했다.
단 1시간 만에 오케스트라가 세연의 음악을 이해하도록, 무대 위에서 첫 음을 맞춰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같은 해석을 떠올리고 따라올 수 있도록.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음악으로 해내야만 했다.
제한적인 조건 안에서 현실적인 연습과 연구를 통하여 이상적인 기적을 실현해 내는 것이 바로 음악가의 일이다.
‘그렇구나…….’
세연은 지금까지 그녀를 옥죄어 오던 긴장이 어느새 사라졌음을 느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제시하는 모든 조건과 규칙은 너무 복잡하고 참가자들을 피로하게 만든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콩쿠르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젊은 연주자들 사이에서 다음 세대의 기수를 선출하는 일이다.
이처럼 극한의 조건에서 한계를 뛰어넘은 음악가야말로 그러한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콩쿠르가 다 이렇게 까다로운 건 아니고 그저 주어진 피아노 기술만 겨루는 경우도 많지만, 적어도 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어떤 피아니스트를 요구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 세연은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 또한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세연이 눈빛을 달리하며 가스파르를 올려다보자 그는 슬쩍 옆의 직원을 살피더니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많이 한 것 같군요. 어쩐지 조언을 조금 해 주고 싶어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요?}
가스파르는 피식 웃으며 자세를 약간 바꿨다. 그러자 한순간에 스튜디오3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뿔뿔이 흩어져서 이곳을 보고 있던 단원들이 어느새 한 덩어리로 뭉쳐 있었다.
상황을 확인한 가스파르는 지휘봉을 들었다.
{과연 임 양이 우릴 얼마나 써먹을 수 있을지 알아 봅시다.}
언제든지 그의 지시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묵직한 덩어리가 세연을 내려다보았다.
그 압력은 정말 무시무시해서 언제라도 세연을 깔아뭉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연은 밀려나지 않고 똑바로 고개를 들고는 천천히 앞쪽에 있는 피아노로 걸음을 옮겼다.